[정신의학신문 : 연세가산숲 정신건강의학과의원 허규형]

 

 

P씨의 사연

저는 30살 여자입니다. 저는 긴 시간 동안 큰 우울에 힘들었는데요, 대학생이 되고 나서 어려서부터 있었던 자살충동이 치료받아야 할 신호라는 걸 알게 되었고, 이대로 있다간 정말 죽어버릴 것 같아서 처음으로 병원에 갔습니다.

병원에 다닐 때 의사선생님이 가장 힘든 게 뭐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저는 “엄마와 통화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저의 얘기를 들으실 때마다 그 의사 선생님은 자꾸만 웃으셨어요.

저는 숨이 막히게 힘이 드는 일인데도 "그럼 전화를 안 하면 되지 않느냐", "어머니가 50은 넘으셨을 텐데, 이젠 그런 일로 외롭다거나 하지 않으실 거다"라고만 하세요.

그렇게 말씀하시곤, 다음 주에 만나면 또 가장 힘든 게 뭐냐고 물으니 더 할 말이 없더라고요.

 

그럼 엄마와의 통화에 대해서 말씀드릴게요. 2년 반 전에 아버지의 간암이 재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하던 일을 정리해두고 본가로 내려갔어요.

모든 노력을 했지만 아버지의 병세는 급속도로 나빠져서 한 달 반 정도 투병하시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동안 엄마는 매일매일 울며 지내셨고, 저는 엄마를 위로하고 돕는 데 많이 애를 썼습니다.

그때부터 어머니가 저에게 의지하는 게 심해졌습니다.

 

서울로 돌아와 매일 하루 한 번씩, 어떨 땐 두어 번씩 매번 30분 이상 통화를 해요.

오래 통화하는 것도 그렇지만, 말씀하시는 내내 했던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고, 방금 한 얘기를 두세 번 되감아서 다시 이야기하십니다.

한 번은 제가 관심도 없고, 보지도 않는 TV 얘기를 하셔서 드라마 줄거리를 1시간 넘게 듣고 있다가 갑자기 눈앞이 하얘지면서 고개가 뒤로 넘어간 적도 있습니다.

잠깐 정신이 나간 느낌이었어요. 듣고 있는 게 너무 지쳐서 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릴 것만 같아요.

남들 험담할 때도 정말 많은데 제가 맞장구를 안 쳐주면 삐지는 일도 너무 많아요. 이게 지금 몇 년째 계속되고 있어요.

사진_픽사베이

어머니는 아버지 직장 따라 이사오신 거라 본가 근처에 친구가 한 명도 없어요.

친구하려고 다가오는 아주머니들이 계신데 식사라도 한 번 하고 와서는 또 그렇게 욕을 늘어놓고, 본인은 아무랑도 어울리고 싶지 않다고 혼자가 편하다고 하십니다.

"우리 딸이랑 맨날 통화해요" 하면서 주변에 자랑한다고 자주 말씀하시는데, 그 말이 너무 부담되고 그러면서도 그걸 충족시켜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어요. 동시에 엄마가 너무 밉고 싫고요.

 

그 시작은 아마도 중학교 때 따돌림을 당하면서부터인 것 같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5년 동안 왕따를 당했어요. 불려 나가 맞기도 하고 교실에선 투명인간처럼 아무도 제게 말을 걸지 않았어요.

그런데 엄마한테는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없어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설명하자면, 말하면 혼날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요?

사춘기 때는 부모님을 많이 미워했습니다. 어머니는 친구 같은 딸이 있어 좋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기도 하셨어요. 저는 방과 후 만날 학교 친구가 없으니 엄마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건데, 그저 그게 좋다고 하는 엄마가 미웠죠.

아버지는 정말 무뚝뚝하시고, 작은 일로도 저희에게 크게 소리치고 화내셔서 중고등학생 때는 저녁 6시를 넘기면 아버지 퇴근하시는 게 무서워서 시계만 쳐다보고 앉아 덜덜 떨었던 기억도 있네요. 당시 아버지 얼굴을 생각하면 분노로 일그러진 무서운 얼굴밖에 생각이 안 나요.

 

저희 어머니가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고아원에 맡겨져서 자라셨다고 하셨는데요. 그래서 저와 애착이 형성이 잘 안 된 걸까 싶기도 합니다.

사실 고등학교 3학년 때 미술실기 준비도 안 되고 선생님에게 혼나기만 하니까 집에 와서 엉엉 운 적이 있는데 아버지는 멀뚱이 저를 보고 있고 어머니는 “얘가 왜 이래” 하다가 “너 자꾸 울면 습관 된다”라고 하더라고요. 그 기억이 저를 계속 괴롭히고 그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요.

저는 엄마한테 잘해주고 싶지 않아요. 의지되는 사람이 되기 싫어요. 그런데도 또 매일 같이 엄마에게 전화를 걸고 있네요. 통화하면서 저한테 징징대는 엄마가 싫다고 끊임없이 생각하면서도요.

"정말 받아주기 싫다. 나한테 위로가 된 적은 없으면서 왜 나에게 의지하려 하지. 정말 이기적이다"라고 늘 생각해요. 그럴수록 엄마가 더 싫어지고요. 끊임없이 험담을 쏟아놓는 날엔 혐오감마저 들어요.

 

제가 왜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매일 전화를 걸고 있을까요.

전화를 안 걸면 안 될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이 숨 막히는 상황에서 벗어나거나, 또는 통화를 좀 더 편안하게 할 수 있을까요.

사진_픽사베이

 

뇌부자들의 답장

안녕하세요, 뇌부자들입니다.

P님의 사연을 읽으면서 답답한 마음이 들었어요. 집에서는 무서운 아버지, 잘 공감하지 못하는 어머니와 지내고, 학교에서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5년 동안 따돌림을 당하셨다는 이야기를 보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우선 저희가 생각할 때, 사연자 분의 어머니는 ‘타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능력’이 조금 부족하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연자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머님께서 주위 사람들에 대한 공감이 전혀 가지 않는 험담을 늘어놓는다고 하셨잖아요.

P님이 고등학교 3학년 때, 우는 모습을 보고 “얘가 왜 이래”, “자꾸 울면 습관 된다”라고 하시면서 힘들어하는 마음에 공감하지 못하시는 모습도 있으셨고요.

부담스러워하는 P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우리 딸이 매일 전화한다’라고 자랑하고 계시기도 하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을 theory of mind, 마음 이론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마음 이론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 가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인 ‘공감’의 기반이 됩니다.

중학교 때 왕따를 당하고도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던 것 역시 ‘말해봐야 어머니가 내 마음을 알아줄 리 없다’라는 느낌, 어려서부터 공감받지 못하는 경험이 반복되면서 어머니와의 신뢰가 부족해서 일어났던 일이 아닐까 생각해요.

 

마음 이론이 형성되는 데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 중요합니다.

양육자와 상호작용을 통해 내가 아닌 타인도 감정과 생각을 가진 존재라는 걸 인식하게 되고, 또 양육자의 행동을 모방하는 과정에서 타인의 관점에서 행동을 해석하는 법을 배우는데요, 어머니께서는 고아원에서 지내면서 세심한 케어를 받기 어려운 상황이셨을 가능성이 있어요.

고아원에서 자란다고 모두가 다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되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어머니에게는 고아원에서 양육됐던 경험이 영향을 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굉장히 조심스러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런 문제는 되풀이되기도 해요.

진료실에서 가끔 ‘아이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고, 그 원인을 같이 찾아보면 ‘어머니가 나를 잘 보살펴주지 않으셔서 내가 그 방법을 배운 적이 없는 것 같다’라는 대답이 나올 때가 있거든요.

어머님께서 부모와 정서적으로 교감하면서 공감능력을 발전시키는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P님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지 못했고, 결국 제대로 된 사랑을 주지 못한 거죠.

이걸 다시 표현하면 ‘불안정한 애착을 가진 어머니가 다시 자녀와 불안정애착을 형성하게 됐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사진_픽사베이

어머니께서는 건강한 애착관계를 충분히 경험하지 못하신 것 같아요. 친구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셨던 것 같고요. 결국 소수의 사람과 의존적인 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게 아버지가 아니었을까요.

아버지는 굉장히 무뚝뚝하고 화도 잘 내는 무서운 사람인데도 아마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에게 굉장히 의존하고 사셨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아이들에게도 신경을 더 못 쓰셨겠죠.

그 관계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반복이 되고 결국 딸인 사연자분에게 병적인 애착을 보이고 계신 것 같습니다.

안타깝지만 P님도 비슷한 패턴을 보이는 것 같아요. 어머니가 자신을 힘들게 하는 아버지에게 의존했던, 어떻게 보면 자학적인 인간관계의 모습을요.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고통을 받으면서도 마치 어머니가 딸을 보살피듯 어머니를 보살피고 계시거든요.

 

그리고, 집안에서 공포의 대상이었던 아버지에게 어머니와 P님은 두 분 모두 피해자였다는 점에서 무의식적으로 어머니를 동일시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딸이 친구 같아서 좋다고 했던 것 역시 P님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모습을 봐서였지 않을까요.

어린 나이에는 부모의 어떤 모습이든지 따라 하는데 애착 유형, 대인관계 패턴 역시 어머니가 하는대로 학습하고 내재화하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혹시 연락을 하지 않아 어머니가 무너진다면 마치 자신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까 두려워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병원을 다니면서 의사 선생님이 한 이야기도 안타까웠어요. 정말 P님께는 가장 큰 스트레스인데 공감을 받지 못한 느낌을 받으셨을 거예요.

의사 선생님이 한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충분히 치료적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야기를 하신 것이 아닐까요.

조언을 한 방식이나 타이밍이 아쉬워요. 자꾸만 어머니에게 전화를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을 충분히 공감도 하고, 어머니의 마음에 대해서도 좀 더 깊게 들어가서 생각해보고 치료자와도 믿음이 쌓인 다음에 하셨다면 P님께서도 더 이해하시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사진_픽사베이

어머니를 바꾸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평생을 한결같은 방식으로 살아오신 분이잖아요. 결국 바꿀 수 있는 건 어머니를 대하는 나의 태도겠죠.

사실 이것도 쉽지는 않은데요, 내면에 해소되지 않은 감정의 크기가 큰 만큼 혼자 보다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면담 치료를 권유드립니다.

당장 전화를 억지로 하지 않으면 사연자 분의 마음이 더 불편하실 거예요.

제 생각엔 통화가 길어지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을 골라서 정해두고 매일 일정한 시간에 전화를 해보면 어떨까 싶어요. 만약 일을 하고 계신다면, 점심을 드신 후 오후 업무를 시작하기 전 같은 시간이요.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전화를 끊어야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시간 있잖아요.

어머니와 통화는 하시되 최대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방법을 마련해 보면 어떨까요. 그리고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으면 P님께서도 오늘 전화를 걸어야 하는데 하는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고, 어머님도 좀 더 안정감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아픈 과거, 어머니에 대한 미움의 속마음을 털어놓으면 날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나쁜 사람으로 보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드실 수 있지만 지금 P님께서 느끼는 감정은 너무나 당연하고, 정당한 감정입니다.

지금 서른 살이라고 하셨는데, 이전에 공감받지 못하며 살아온 과거는 너무 안타깝지만, 앞으로의 70년 동안은 그 과거에 더 이상 발목 잡히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저희의 조언이 P님께 도움이 됐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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