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허규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A씨의 사연

저는 20대 후반이고 여자예요. 직업은 뭐 크게 대단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거예요.

그냥 저는 언젠가부터 저에 대해서 제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이 싫었어요. 제 이름, 나이 같이 일반적인 것들은 상관없었지만 사소한 부분들을 아는 것은 정말 싫었어요.

예를 들면 제가 사는 곳, 제가 어릴 적에 어디서 살았는지, 제 가족은 무슨 일들을 하는지, 제게 어떤 형제자매가 있는지, 제가 주말에 뭐 하는지 같은 것들이요.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제가 사는 공간에 들어오는 것도 싫었어요. 그래서 제가 사는 곳에 절대로 초대하지 않았어요.

 

마트에 갈 때도 동네에 아는 사람들을 마주치는 게 무서워서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를 쓰고 나가요. 누군가 저를 알아보고 말 거는 게 싫어서요.

또, 제 사진이 찍히는 것도 극도로 싫어해요. 그래서 누군가 제 사진을 찍으면 지워달라고 그래요. 이런 이유에서 전 SNS도 전혀 하지 않아요. 

그리고 전 핸드폰 번호도 주기적으로 바꿔요. 바꾸면서 물론 저와의 인연들은 가족 이외에 다 끊기죠. 이걸 목적으로 바꾸는 것이기도 하죠.

사람들이 저에 대해서 아는 게 그냥 두려웠던 것 같아요.

 

어쩌면 제가 사회 부적응자인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전 사회 부적응자는 아니에요. 오히려 저는 너무 잘 적응해요. 남들보다 훨씬. 

잘난 척이 아니라 일도 평균 이상으로 항상 잘합니다. 추진하는 프로젝트들마다 성공시키고, 좋은 평가를 받아요.

친구들도 많아요. 그런데 어느 정도 이상으로는 친구들이 저에게 못 다가와요.

그 친구들 말로는 제가 무언가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 같이 느껴진대요. 제가 친해지지 않게 벽을 미리 치고 그 벽을 절대로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 친구들과는 얄팍하게 넓게 친해요. 저에 대해서 많이 자세히 아는 게 싫어서 미리 더 많이 알기 전에 차단했던 것 같아요. 어느 정도 이상으로는 친해지지 못하게요. 그걸 서운해하던 친구들도 많아요.

친구뿐만이 아니에요. 가족도 제가 사는 공간에 오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절대로 못 오게 해요. 그래서 제 가족들은 이미 제 사생활에 대해 물어보는 것을 포기했어요. 어차피 왜 물어보냐고 할 거니까요.

 

사진_픽사베이

 

남자 친구는 딱 한번 사귄 적 있어요. 그 후로는 없네요. 근데 그렇다고 누군가를 사귀고 싶진 않아요. 저를 아는 게 싫어서요. 앞으로도 딱히 결혼 생각도 없어요.

만약 전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게 된다면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아달라고 가족에게 부탁하기도 했어요. 누군가 제가 죽어서 제 장례식에 오는 게 상상만 해도 너무 싫어요. 그냥 제가 죽은지도 모르게 평생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가끔 주변 사람들이 물어봐요. 그렇게 살면 외롭지 않냐고. 근데, 전 이렇게 지내도 딱히 외롭진 않아요. 그냥 전 이렇게 사는 게 좋고 불편한 건 없어요. 사는데 지장은 없거든요. 그런데 요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요. 지금은 젊으니까 잘 사는데 나중에 나이 들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

 

조금 더 솔직히 말해 볼게요.

가끔 텔레비전에서 연예인들이 “나의 오래된 친구다, 힘든 일들을 우린 함께 극복했다. 지금은 서로 매우 의지한다.” 할 때마다 사실 부러워요. ‘아 인생에 저런 친구들 있으면 정말 든든하겠다.’하고요.

하지만 전 그런 친구들을 만들 노력은 딱히 안 해요. 두렵거든요. 저에 대해서 친구들이 많이 알게 되는 것이요.

아무튼 저는 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저에 대해 아는 게 너무 두렵습니다. 이 사연도 사실 고민을 많이 했어요. 올렸다가 누군가 제 주변 사람이 혹시라도 이 내용을 듣고 ‘앗! 이거 딱 OO인데?’ 하고 알아차릴까 봐요. 하지만 일단 용기 내서 사연 올려봅니다.

 

뇌부자들의 답장

안녕하세요, 뇌부자들 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개인적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는 분들은 정말 많으세요. 진료실에서도 자주 듣는 이야기죠. SNS를 하지 않으시는 분들이나 친구들 사이에서 벽이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듣는 분들이 많죠.

저 역시 친구들에게 벽이 느껴지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어봤던 경험이 있어서 공감이 많이 됐는데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신경 쓰이고 막상 하려고 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라서 못 했던 기억도 나네요.

그런데, A님처럼 가족 이외에 모든 인연을 끊기 위해 핸드폰 번호를 주기적으로 바꾼다거나 가족들에게도 사생활을 알려주지 않으신다는 이야기는 쉽게 듣지 못했던 것 같아요. 특히, 갑자기 사고로 죽게 된다면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달라고 가족에게 부탁하기도 했다는 것은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개인적 이야기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신다고 하셨는데 자신의 정보, 개인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공유하는 것을 자기노출, self-disclosure라고 하죠. 자기노출을 하는 것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 한다면 얼마나 해야 하는지 정답은 없을 텐데요.

사회적 침투 이론이라는 자기노출을 다룬 이론이 있어요. 자기노출을 ‘폭’과 ‘깊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한 이론인데, 관계가 발전함에 따라 의사소통이 상대적으로 얕고 덜 친밀한 수준에서 더 깊고 친밀한 수준으로 이동해 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이 자기 노출(self-disclosure)을 통해 발생한다고 보는 거죠.

두 사람 간의 친밀감은 두 사람이 자기 노출을 지속적이고 순차적으로 교환하면서 발전합니다. 대신, 자신을 노출하고 사회 침투를 계속하면서 점차 친밀한 관계를 맺는 상대방으로부터 받는 상처에 취약해지기도 하고요.

 

사회적 침투 이론은 사람의 성격을 양파에 비유해서 ‘성격의 양파이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람의 성격이 양파처럼 여러 겹, 여러 층으로 되어 있다는 의미인데요. 바깥 껍질은 상대방에게 작은 관심만 가진다면 누구라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적 자아(public self)입니다. 그 사람의 고유한 속성이 아닌 공동체 구성원이라면 그 정도는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는 일반적인 사실이죠. A님께는 이름과 나이 정도만 해당이 될 듯해요.

이에 비해 양파의 중심부 쪽에 속하는 내면적 자아 혹은 사적 자아(private self)는 그 사람의 가치관, 자아상, 상충된 모순, 그리고 정서와 감정의 구조를 포함합니다. 이는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세계이며, 그 사람의 본질적인 성격의 속성을 반영합니다.

사진_픽사베이

 

양파 중심부에 있는 비밀스러운 사적인 영역에 상대방이 침투할 수 있도록 자신을 노출할 수 있을 때, 상대방과 관계 발전을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무에게나 자신의 사적인 영역을 드러내지 않죠. 그 이유는 사적 영역의 공유는 어느 정도 사생활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인데요, 누구에게 어느 정도로 자신을 노출시킬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 사회적 침투 수준을 결정합니다.

 

서로 친해지는 과정을 양파의 겉에서 가운데로 들어가는 모습으로 비유해서 말씀드릴게요.

처음에 양파의 껍질에 해당하는 외적인 정보는 자주 그리고 빠르게 교환됩니다. 그러나 관계는 정보 공유의 속도에 비해 그리 빠르게 친밀한 단계에 이르지는 못하죠.

이후, 자기 노출은 관계 발전의 초기 단계에서 상호 호혜적으로 일어납니다. 상호 호혜적이라는 것은 내가 이만큼 주면 상대방도 이만큼 주겠지 라는 것입니다. 관계 형성 초기에 개방적인 자세는 상대방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지만 일방적인 자기노출은 상대방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불편함을 만들 수도 있죠.

초기에는 침투가 빠르게 진행되지만 견고한 내부 층에 도달할수록 그 속도는 급속도로 느려집니다.

대부분의 경우 즉각적인 친밀감을 형성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빠르게 친해지면 상대방의 마음속에 저항을 만들기도 하죠.

대부분의 관계는 안정적이면서 동시에 친밀한 교환을 이루는 단계로 가기 전에 소멸됩니다. 서로 긍정적 반응과 부정적 반응을 교환하는 것에 대해 편안함을 느끼는 관계는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A님께서는 자기노출이 초기의 외적인 정보가 교환되는 수준에 머무르고 상호호혜적인 침투 단계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회적 침투 이론에서 관계는 보상과 비용에 따라 이뤄진다고 하는데 내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보다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이 적다면 관계를 더 깊게 만들려고 하지 않겠죠. A님은 더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아도 얼마든지 편하고 좋기 때문에 관계에서 선을 긋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그리고, 애착이론으로도 A님의 대인관계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어요.

A님께서는 불안-회피적 애착의 형태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상대방과 친해지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와 동시에 남들이 나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이 두려워서 친밀한 인간관계를 맺기를 회피하는 거죠.

그러다 보니 사람들과 데면데면하게, 어느 정도 인간관계를 이루는 데는 크게 어려움이 없지만, 더 깊은 관계를 갖지 못하고 마치 ‘벽’을 친다고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이고요.

 

이런 회피적 애착은 어린 시절 공감을 잘 못하거나 과도하게 통제적인 양육자로부터 애착을 형성한 경우에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아이 입장에서는 어떤 표현을 했을 때 양육자가 보이는 반응이 공감이 배제된 차가운 반응이거나, 과도하게 통제적인 반응이라면 상처받게 되기 쉬워요. 내 감정을 표현했을 때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픔이 되는 거죠.

결국 차라리 표현을 안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 때, 상대방이 어떤 감정을 느낄지 알 수 없고 두려워지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A님처럼 차라리 내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것이 편하고 상대방의 감정을 읽는 것이 고통스러운 상황이 될 수 있는 거죠.

불안- 회피적 애착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특히 감정이 오고 가는 친밀한 인간관계를 회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감정을 읽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아는 것 역시나 어려워하죠.

 

사진_픽셀

 

진단이나 상태를 궁금해하셨는데요, A님을 뵙고 직접 면담을 한 것이 아니라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럽지만 진단을 내리기에는 어려울 것 같아요. 일상적인 생활에 지장은 없다고 하셨고 스스로 느끼는 불편감도 크지 않으니까요.

사연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성격군 중에서 ‘A군의 성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A군 성격은 엉뚱하고 독특한 생각을 하거나 혼자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얕은 관계이지만 친구들이 정말 많다고 하셨고 친구들 사이에서 불편감 역시 크게 느끼지 못하셨던 것으로 봐서 A군 쪽의 진단을 내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회공포증이나 회피성 성격도 생각해 봤어요.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기 어렵다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진단인데요. 평가에 대한 두려움, 고민이나 깊은 이야기를 했을 때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돼서 피상적인 이야기만 하고, 자기주장도 잘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평가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근원적으로 다른 사람이 나를 아는 것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큰 것 같고 자기주장은 또 잘 하시는 것처럼 보여요. 대인관계도 피상적이긴 하지만 잘 한다고 하셨고요. 가능성은 있지만 진단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의 정보로 진단을 내리기가 어렵다는 것이지 A님께서 하시는 고민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고 충분히 고민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렇게 친밀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데 두려움을 느끼는, 아니면 두려움 까지는 아니더라도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참 많다고 합니다. 많게는 20% 가까운 사람들이 이런 성향이 있다는 연구도 있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이게 치료를 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그냥 이렇게 지내도 상관없나 하는 생각이 들기 쉬워요.

 

이럴 때 일차적인 기준으로 이런 질문을 먼저 드립니다.

‘다른 사람과 친밀하게 지내지 못하는 내 성향 때문에,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라는 질문이요.

사실 이 성향이 그다지 불편하지 않고, 그냥 살아가는데, 일하고, 일상생활을 하고, 몇몇 친구들과는 만나기도 하고, 이 정도로 만족스럽다면 어쩌면 굳이 치료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A님께서 어느 정도 마음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친한 친구가 생겼으면 좋겠고, 누군가와는 더 친밀한 관계를 맺고도 싶지만 내 마음속 불안 때문에 그런 관계를 자꾸 피하게 되는 것이라면 평가를 받고 필요하다면 치료의 도움을 받아보시기를 권유드리고 싶습니다.

뇌부자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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