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Q) 안녕하세요. 제가 궁금한 것이 있어 이렇게 글을 적어봅니다.

다름이 아니고 저는 일단 제가 생각하기에 남들보단 어릴 적 기억이 많이 생각이 안 난다고 해야 할까요, 지워졌다는 표현이 맞을까요.

그냥 어머님께서 하시는 말씀으로 '네가 어릴 때 이런 일이 있었다'라고만 들어서 알고 있는 정도인데 동생은 신기하게 다 기억을 하고 있고요, 그리고 사람을 잘 기억 못 하는 것도 있어요.

다만 제가 기억하는 부분들은 굉장히 좋지 않았던 기억들 뿐이라서... 혹시나 여쭤봅니다. 어릴 때 우울했거나 안 좋은 일들이 많이 있었으면 어릴 적 기억들이 많이 안 나기도 하나요?

제가 기억하는 장면들은 거의 부모님께서 싸우시던 도중 피를 봤던 장면이나 성추행을 당한 기억, 초등학생 때 따돌림을 당한 기억 등이 대부분 이라서요... 

좋았던 기억들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대부분 충격적인 기억들이 남는 건 맞겠지만 그렇다기엔 다른 기억들이 너무 나지 않아서... 혹여 이런 것도 마음의 병이라면 치료를 받아야 할지 문의드립니다.

두서없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답변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진_픽사베이

 

A) 안녕하세요. 어린 시절의 기억이 부분적으로 없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말씀이시군요. 걱정되시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궁금하시기도 할 것 같습니다. 우선 가장 당연한 사실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어린 시절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기억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누구라도 불가능합니다. 누구나 어린 시절, 과거의 일들은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기억나는 일들만 기억을 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어느 순간 갑자기 떠오르거나, 어떤 자극에 의해 기억이 날 수도 있습니다. 혹은 영영 기억나지 않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사진이나 동영상, 혹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없는 기억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기존의 기억이 변형되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기억이란 것은 굉장히 취약하고 유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기억이 생기고 회상이 되는 것인지 자세히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뇌의 수많은 신비 가운데 비교적 가장 오랫동안 연구되어온 부분이 있다면 그것들 중 하나가 바로 기억에 관련된 내용들일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기억을 하게 되는 과정을 아주 간단하게만 설명한다면 어떤 외부의 자극이 뇌에 '등록'되게 되고, 그 뒤에는 '등록'된 기억이 '저장' 되게 됩니다. 그리고 '등록'되거나 '저장'된 기억들은 수시로 '회상'되게 되지요. 이 등록-저장-회상의 각 단계들마다 각각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기억과 관련된 문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기억상실'과 같은 문제들 말이지요. 즉, 우리가 기억하지 못한다,라고 뭉뚱그려 이야기하는 문제들은 기억이 등록되지 않는 문제일 수도 있고 저장되지 않는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등록되거나 저장된 기억이 손상된 문제일 수도 있고, 저장된 기억이 회상되지 않는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각 단계의 문제들이 '기억이 안 나'라는 표면적인 문제로 드러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보자면, 갓 태어난 직후 신생아 시절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을 수는 있지만 사실 정말로 그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난 직후에는 뇌 발달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라서, 기억을 '저장'할 수 있는 기능이 아직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생아 시절의 기억은 애초 저장되지 못했기 때문에 누구도 기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면, 분명 시험공부를 하면서 외웠던 내용이 시험을 볼 때 기억나지 않거나, 알고 있던 친구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것은 저장된 기억이 '회상'되지 않는 문제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분명 저장은 되었는데, 그것을 꺼내는 것이 어려운 문제이지요.

 

마찬가지로 질문자님께서 지금 겪고 계신 기억의 문제도 이런 시각을 통해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질문자님께서는 기억의 저장과 회상 모두에서 생긴 문제 때문에 어린 시절의 즐거움을 잊게 되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먼저, 아동기에 학대나 성추행, 폭력 등 외상적(traumatic)한 경험을 하게 된 경우에는 당시의 기억들을 상실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해리성기억상실(Dissociative amnesia)이라고 이야기하는 내용이 그것입니다. 아마 질문자님께서도 어린 시절의 심한 상처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그 기억을 잊는다는 식의 설명을 들어보셨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해리성기억상실 같은 경우에는 그 끔찍한 경험을 하는 순간에 너무나 강렬한 두려움, 공포에 압도되었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을 담당하는 '감정뇌'가 너무 강력하게 활성화되면 상대적으로 생각하고 기억하는 뇌의 부위에 혈류량이 감소하고 활성도도 떨어지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정뇌의 지나친 활성화로 애초에 기억이 제대로 '저장'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물론 '감정뇌'도 나름의 기억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시의 감정은 무의식 속에 남긴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이나 맥락, 세부사항 등은 뇌에 저장되지 못하고, 결국 시간이 지나서는 그 사건을 경험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해리성기억상실로 아동기 기억을 잃은 사람들은 충격적인 사건과 관련된 기억들을 잃는 경우가 흔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질문자님께서는 오히려 충격적이고 외상적이었던 기억들만 남아있고,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들을 떠올리지 못하고 계시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가능한 원인을 추정해보자면, 첫째로는 당시의 즐거운 기억이 '등록'은 되었으나 오랫동안 '저장'되지는 못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것들이 질문자님에게는 오래도록 저장될 만큼의 강한 기억이 아니었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들을 해마(Hippocampus)라는 뇌의 부위에 잠시 동안 '등록'시킵니다. 그러나 등록되는 모든 것들이 '저장'되는 것은 아니지요. 그중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혹은 강렬한 감정을 동반하는 것들을 선택적으로 '저장'하게 됩니다. 그것들을 선택하는 과정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기도 하고, 시험기간에 공부를 하는 것처럼 의식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 소풍을 갔거나 놀이동산을 갔던 것처럼 즐겁고 재미있었던 일들을 기억할 수 있는 이유는, 당시의 감정이 강렬했기 때문에 강하게 '저장'이 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만약 아무 일도 없이 평소와 똑같았던 하루라고 한다면 그날 하루 이틀간은 기억이 '등록'될 수 있지만 10년이 넘게 회상할 수 있을 만큼 강렬하게 '저장'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질문자님께서 기억하지 못하는 당시의 즐거운 기억들은 어쩌면 질문자님에게는 그다지 강렬한 기억이 아니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 주신 어린 시절의 끔찍한 상처들, 충격적인 외상들로 어린 시절이 점철되어 있어 항상 우울감으로 멍하게 있던 시간들이었다고 한다면 놀이동산을 가거나 소풍을 가는 날들 역시 그다지 특별할 것 없이 지나갔던 날들이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어린 시절의 질문자님께서는 기억에 남을 만큼 즐겁고 행복한 날을 보낼 만한 마음의 여유가 부족했던 것일 수 있습니다. 또한 반복적인 외상들로 인해 만성적으로 '감정뇌'가 활성화되어 기억을 저장하는 뇌의 활성이 항상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애초 즐거운 일이 저장된 일이 없었기 때문에 기억나는 일도 없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진_픽셀


둘째로는, 당시의 즐거운 하루가 기억 속에 저장은 되었지만, 지금의 질문자님에게 떠오르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회상'되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확히 어떤 원인으로 그러하다고 쉽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질문자님께서 어린 시절 너무 많은 상처와 괴로움을 겪어오셨기 때문에, 당시의 즐거웠던 '나'를 지금의 상처받은 '나'와 같은 '나'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즐겁고 행복한 사람이라 할 지라도 절망스럽고 슬픈 순간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처참하고 절망스러운 사람이라도 잠시간 즐거움을 느끼는 순간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단 1초라도 즐겁다고 느끼는 순간이 없이 십여 년을 보낸다는 것은 누구라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많은 절망과 상처가 만들어낸 분노가 마음속에 가득하다고 한다면, 잠시라도 즐거움을 느끼는 '나' 자신을 용납하고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의 상처받은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의 경험들을, 즐거움을 느낄 수 없는 절망과 어둠뿐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더 쉽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조금의 즐거움이나 조금의 긍정적인 기억이라도 섞여 들어간다면 마음속에 들끓고 있는 그 분노와 절망을 스스로 이해하기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이런 것들은 의식하지 못하는 과정 속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즐거운 기억이 뇌 속에 '저장'은 되었을지 몰라도 그것이 '회상'되는 과정이 무의식적으로 억압될 수 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스스로가 그 기억들을 떠올릴 수 없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이런 무의식은 점점 어린 시절, 지나간 과거를 더욱 비참하고 슬프게만 만들 따름입니다. '나의 어린 시절은 비참했어'라는 사실을 진짜 사실보다 더 무겁고 더 끔찍하게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의 즐거움도 기억하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질문자님의 상황을 나름대로 추정해본 이야기들이니 이것이 정확하다고 받아들이시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겠다' 정도의 느낌에서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또, 제가 말씀드리지 못한 전혀 다른 원인일 수도 있고, 제가 말씀드린 원인들이 모두 조금씩 섞여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질문자님께서 어린 시절의 즐거움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린 시절의 끔찍한 상처 때문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 즐거움을 기억하지 못하는 지금 질문자님의 우울과 좌절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즐거운 기억은 나지 않고, 상처받고 힘들었던 기억만 난다는 것은 정말이지 슬픈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질문자님 역시, 어린 시절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단편적인 사실만을 말씀해주셨지만, 그 이외에 지금 오늘의 질문자님을 힘들게 하는 많은 어려움들을 함께 가지고 계시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듭니다.

'혹여 이런 것도 마음의 병이라면 치료를 받아야 할지' 문의주셨습니다만, 사실 질문자님의 문제가 ‘어린 시절 기억이 좀 나지 않는 것’ 하나뿐이라면 그것이 꼭 치료를 받아야 할 내용은 아닙니다. 어린 시절 기억이 몇 개 사라졌을 수도 있고, 그게 일상에 큰 영향이 없다면 별다른 문제라고 강조할 것 까지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이렇게 질문까지 해주시며, 질문자님께서 어린 시절의 상처를 담아내시는 것을 보면 질문자님께서 지금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기 힘들어하는 것도, 그리고 '혹시 내가 치료를 받아야 하나'라는 막연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도 모두 사실은 그때의 상처들에서 아직 질문자님이 온전히 벗어 나오시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온전히 벗어 나오지 못해 지금도 여전히 아파하고 계실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그리고 그러하다면 지금이라도 과거의 나를, 또 지금의 나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보듬어줄 수 있기 위한 여정을 시작해보시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궁금증에 답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모쪼록 질문자님의 상처가 잘 아물 수 있기를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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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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