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Q) 얼마 전 지인의 20대 초반의 딸이 병 때문에 실명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 후부터 한 밤중에 혹은 새벽에 혼자 깨어 어두운 방을 보며 실명의 공포로 몸서리치게 됩니다. 문제는 그 실명 상황이 곧 저에게 닥칠 불운 같아서 만일 내가 실명한다면 어찌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제자신입니다. 그리고 그 고민의 끝은 그저 두려움과 절망감에 죽고 싶은데 죽지 못할 거란 답답하고 초조한 기분에 온종일 휩싸여 있다 보니 우울하고 불안하고 힘이 듭니다. 

전 당뇨병이 없습니다. 직계에 당뇨병이 있는 분도 없습니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현재 건강상태로 보면 전 당뇨병에 걸릴 확률도 매우 낮아 보입니다. 그런데 제가 청소년 시절(중2) 주인집 할머니의 결혼도 하지 않은 20대의 젊은 자식들이 어느 날 갑자기 실명하고 심지어 죽기도 하고 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젊었던 주인집 언니가 실명을 하고 집에 돌아와 계단에서 뚝 떨어지는 모습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또 저에겐 지금은 많이 호전되어 문제가 되지 않고 있지만 몇 년 전까지 가끔 알러지성 결막염이 너무 심해서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한두 시간씩 눈을 감고 있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사실 실명에 대한 공포는 그때부터였습니다. 명절에(꼭 추석 때 전을 부치고 나면 눈이 엄청 가렵고 안구의 투명한 막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습니다.) 할 일도 많은데 눈을 감고 있자니 너무 답답하고 초조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시어머니나 동서의 눈치도 보이고...

어젯밤에는 정신과 상담을 받고 약을 먹어야 할지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불을 끄고 자려고 누우면 실명의 두려움이 잠을 확 달아나게 하고 고민하게 합니다. 기도도 하고 이성적으로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 걱정 말자라고 스스로 다짐도 해보고 또 설령 어떤 불행이 온다 해도 힘들겠지만 견디고 이겨내면 된다고 입으로 중얼거립니다. 그런데 마음은 너무 무섭고 곧 저에게 닥칠 일처럼 느껴져 지옥 같습니다. 남편이나 사람들에게 이런 저의 고통을 솔직히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이해 못하거나 가볍게 생각할 거 같아서요.

치료를 받아야 할까요? 제가 스스로 이겨낼 수 있을까요?

 

사진_픽셀

 

A) 젖먹이 아이는 뱀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아직 뱀이 자신에게 어떤 위험이 되는지 모르고, 경험도 없기 때문이죠. 반복적인 혹은 강렬한 경험이 공포를 만들어 냅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지금 질문자 분께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네요. 

경험이 공포의 근원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합리적인 공포가 누군가에게는 비합리적인 공포로 인식됩니다. 예를 들어, 투명한 베란다 창문을 무서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공포에 대해 아무 설명이 없다면 그냥 ‘그게 뭐야.’ 하겠지만, 거실에 앉아서 양말을 신던 중에 투신자살하는 사람을 본 뒤로 공포가 생겼다면 다들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질문자 분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학창 시절 젊은 주인집 언니가 실명을 해서 계단에서 떨어지는 것을 목격하셨죠. 그리고 주인집 할머니 자녀나 지인의 자녀가 실명을 했다는 소식도 계속 듣으셨고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또 의학적으로는 젊은 사람의 실명은 일어날 가능성이 극히 낮은 일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질문자 분에게는, 젊은 사람의 실명은 일어날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일로 느껴지실 수 있을 듯합니다. 알러지성 결막염으로 일시적으로 앞이 잘 안 보이는 상태를 경험해 보셨던 것도, 실제로 실명될 수 있다는 확신을 질문자 분에게 가질 수 있게 만들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질문자 분이 실명하는 것에 대한 공포를 가지는 상황은 질문자 분의 입장에서는 정상입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을 다시 따져보고, 실명의 공포에 숨겨져 있는 다른 공포들을 확인하고 분리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질문자 분의 공포가 지금 본인의 삶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명에 대한 공포 말고도, 가족으로부터의 버려짐, 죽음, 자살에 대한 어떤 두려움이 질문자 분의 글에서 느껴집니다. 실명과 죽음 (또는 자살), 그리고 가족으로부터의 버려짐을 현재 질문자 분은 거의 같은 개념으로 쓰고 있습니다. 실명을 한다면 죽음 등이 지체 없이 일어나는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실명을 해도 죽지 않을 수 있고, 가족들이 더 보살펴 줄 수도 있는데 말이지요. 실명 자체도 두려운 일이지만, 실명 이후에 일어날 상황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을 가능성도 높아 보입니다.

거대한 동물의 그림자를 보면 누구나 두렵습니다. 하지만 그 그림자가 귀여운 동물 인형의 그림자인지, 크기만 큰 순한 동물의 그림자인지, 정말 무서운 동물의 그림자인지 그 실체를 확인한다면 불필요한 두려움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지금 질문자 분이 가지고 있는 실명에 대한 두려움의 실체를 확인하실 필요가 있어 보이며, 전문의의 상담이 도움이 될 듯합니다.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삼성마음숲 정신건강의학과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국립공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저서 <정신건강의학과는 처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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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따뜻하게 사람을 감싸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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