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ㅣ  황성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일러스트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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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은 우리가 처음으로 소속감을 배우고, 관계를 경험하며,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익히는 가장 작은 사회입니다. 그런데 이 공간이 안전하지 못할 때, 우리는 건강하지 못한 행동패턴을 학습하고, 다양한 정신건강 문제가 세대를 이어 나타나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알코올 중독, 가정폭력, 정서적 방임, 감정표현을 억압하는 소통방식 등은 세대를 걸쳐 대물림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처받은 부모가 상처를 주는 부모가 되고, 그렇게 형성된 관계의 방식이 자녀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향을 전문용어로는 ‘세대 간 전이’라고 합니다. 이는 특정한 경험이나 감정, 행동 양식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현상을 말하는데요. 전이는 유전적인 차원뿐 아니라, 관계 맺는 방식, 감정을 다루는 태도, 위기를 처리하는 반응 등 환경적·심리적인 요소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울증을 비롯한 많은 정신질환의 발병에는 유전적 요인과 함께 환경적 요인이 상호작용하는데요. 세대 간 전이 역시 환경적 요인의 하나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이었던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어릴 때부터 감정을 억누르거나, 눈치를 보거나, 갈등을 피하는 방식으로 살아남는 법을 배웁니다. 그러다 보면 감정조절이나 자기표현에 서툴러지고, 성인이 되어서는 또 다른 회피 방식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가령, 심리적 문제로부터 회피하는 방식으로 과도한 음주를 한다든지,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어머니가 항상 불안하고 과잉 보호적이었던 가정에서 자란 자녀가 성인이 되어 타인과 건강한 거리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독립에 대한 불안을 느끼기도 합니다. 또, 가정폭력이 있던 가족 내에서 자란 아이가 성인이 되어 결혼한 후 본인은 절대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폭력을 되풀이하는 경우도 있는데요. 이는 세대 간 전이와 함께 ‘공격자와의 동일시’라는 개념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닮고 싶지 않은 사람, 가해자의 행동을 반복하면서 어릴 때 갖지 못했던 통제감을 되찾으려 하기도 하고, 다른 방법의 감정 해소법을 배우지 못한 데서 이런 문제가 비롯되기도 합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런 대물림이 꼭 ‘똑같은 방식’으로 되풀이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세대 간 전이는 때로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지나치게 통제적이었던 데 대한 반감으로 자신은 자녀에게 지나치게 허용적이거나 방임하는 양육 태도를 보이는 식으로 말이죠. 이렇게 세대 간 전이가 나타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가족 문제에 대한 반응으로서 유발되는 또 다른 문제의 반복이라는 측면에서 대물림의 또 다른 양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님이 했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는 합니다. 그러나 이런 다짐이 무색하게, 어느새 부모님이나 다른 가족이 보인 문제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는데요. 그럴 때면 실망감과 무기력감, 죄책감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세대 간 전이를 끊겠다고 다짐함에도 이런 패턴이 반복되는 까닭은, 무의식적인 패턴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곳에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안에 어떤 패턴이 반복되고 있는지를 직면하고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1. 우리 가족의 역사 돌아보기

 내 부모님은 어떤 사람이었고, 나는 그들과 어떤 관계였나요? 부모님의 말투, 갈등 상황에서의 반응,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우리 가족 안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돌아보세요.

2. 감정의 언어를 회복하기

 대물림되는 문제의 중심에는 억압된 감정이 자리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화내면 안 된다’, ‘슬프다고 말하면 약해 보인다’라는 믿음은 결국 감정을 무시하게 만들고, 그것이 다른 방식의 분노나 회피로 터져 나오게 됩니다. 감정을 인식하고, 안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익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3. 관계의 자동 반응에서 벗어나기

 예를 들어, 누군가 나에게 화를 낼 때 곧장 위축되거나, 반대로 과도하게 방어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 이는 과거 가족관계에서 형성된 자동 반응일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반응이 ‘누구에게서 배운 것인지’, ‘어떤 상황에서 반복되는지’를 메모하고 성찰해 보는 것만으로도 변화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4. 가족 내에서의 대화 방식 바꾸기

 회피와 침묵은 문제를 외면하고 회피하게 만들 뿐, 치유와 회복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대신 갈등 상황에서 감정을 존중하며 소통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넌 왜 그렇게 말을 하니?”라는 표현 대신, “네 말이 나에게는 이렇게 들렸고, 그래서 속상했어”라는 식의 비난이 아닌 감정 중심의 대화로 변화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5. 전문가의 도움 받기

 반복되는 감정 패턴이나 관계의 고리를 혼자만의 힘으로 바꾸기는 쉽지 않습니다. 특히 가족 전체가 얽혀 있는 문제일수록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변화가 어렵기 때문에, 가족상담이나 개인치료를 통해 외부의 시선으로 구조를 재인식하고 재조정하는 작업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끊어야 할 것은 ‘가족’이 아니라, 대를 이어 반복되는 ‘상처의 고리’입니다. 누구도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나지 않았고, 누구도 완벽한 부모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또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대물림은 멈출 수 있습니다.

 ‘원래 그런 거지. 다들 이렇게 살아’, ‘우리는 원래 말이 없는 가족이야’라는 익숙한 틀을 의심하고, 우리 가족 안의 상처와 감정을 꺼내어 말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진정한 변화의 출발점입니다. 우리의 자녀가 더는 같은 방식으로 상처받지 않도록, 그리고 나 자신도 다시 상처주지 않도록, 지금 여기서부터 그 고리를 끊어내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당산한결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ㅣ 황성연 원장

황성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산한결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한양대학교 의료원 인턴 수료
국립법무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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