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ㅣ 장승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해야 할 일은 끝도 없고, 머릿속은 복잡한데, 막상 집중은 잘 안되고 단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말이 어눌해지고, 방금 전 했던 일을 또 반복하거나 중요한 약속을 깜빡하는 일이 생기곤 하지요. 분명 과거에는 능숙하게 처리하던 업무인데, 어느 순간부터 머리가 '멈춘 것처럼' 느껴지고, 자신이 한없이 무능해진 듯한 좌절감이 따라오기도 합니다.
이런 증상들은 단순히 '건망증'이나 '피로' 때문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는 과도한 스트레스와 업무 과부하가 뇌의 인지기능과 정서 체계에 부담을 주면서 나타나는 일종의 ‘인지 과부하(cognitive overload)’ 상태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뇌는 기본적으로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특히 계획, 판단, 집중, 문제 해결 같은 고차원적인 인지기능을 담당하는 뇌 영역인 전두엽은 스트레스에 매우 민감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이 많아지고 시간 압박이나 정서적 부담이 늘어나면, 전두엽의 활동 효율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생각이 잘 안 나는’ 느낌이 드는 것이지요. 이럴 때는 기억력이나 집중력, 판단력이 일시적으로 둔해지고, 일상적인 언어 능력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특히 만성적인 과로와 수면 부족, 정서적 소진(burnout)이 겹치게 되면 뇌의 정보 처리 능력은 더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만성 스트레스는 해마(기억을 담당하는 뇌 부위)의 기능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전두엽과 해마 간의 연결성도 방해하여 학습과 기억, 감정조절 능력까지 전반적으로 손상할 수 있습니다. 가끔은 이러한 상태가 우울증이나 불안장애의 초기 증상으로도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단순히 “요즘 좀 피곤해서 그래”라고 넘기기보다는 자신의 몸과 마음 상태를 잘 점검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지 과부하 상태를 예방하고 완화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뇌가 회복할 수 있는 ‘여유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뇌도 근육과 같습니다. 과도하게 사용하면 기능이 저하되고, 적절히 회복하면 다시 본래의 힘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휴식은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니라 뇌 기능을 재조정하고 재충전하는 시간입니다.특히 수면은 인지기능 회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잠이 부족하면 집중력, 기억력, 정서조절 능력 모두가 급격히 떨어지며, 이는 다음 날의 생산성까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또한, 업무 중간중간에 짧은 ‘인지 휴식’을 의도적으로 넣는 것도 매우 효과적입니다. 예를 들어, 50분 일하고 10분 걷거나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 휴대폰 없이 산책하거나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는 시간은 뇌에 중요한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기본 모드 회로)’를 활성화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 회로는 우리가 의식적인 작업을 멈추고 있을 때 창의력이나 문제 해결력을 회복시키는 뇌의 시스템입니다.
더불어, 해야 할 일을 모두 떠안기보다는 적절하게 분산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는 전략도 필요합니다.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한꺼번에 처리하려 할 때, 뇌는 정보의 흐름을 정리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럴 때는 '지금 꼭 해야 할 일'과 '조금 미뤄도 되는 일'을 분류해 보는 단순한 메모 습관만으로도 뇌의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정보가 머릿속이 아니라 종이나 화면 위에 정리될 때, 뇌는 그만큼 여유를 갖고 중요한 결정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또한, 누군가와 속마음을 나누는 대화, 음악 감상, 좋아하는 취미 활동, 자연 속에서의 산책처럼 정서적 피로를 풀 수 있는 활동도 뇌 회복에 큰 도움이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분 전환을 넘어서, 뇌의 정서 시스템을 안정화하고 전두엽의 기능 회복에 직결되는 중요한 행동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증상이 장기간 지속되거나 일상 기능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라면, 반드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때로는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혹은 경도인지장애와 같은 다른 정신건강 문제가 그 배경에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조기에 개입하고 적절한 치료를 받는다면 회복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우리 뇌는 생각보다 섬세하고, 동시에 회복력도 강한 기관입니다. 다만 그 회복을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뇌를 존중하고, 과부하 상태에 놓이지 않도록 작은 실천들을 꾸준히 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도 혹시 ‘요즘 나답지 않다’라고 느끼고 계신가요? 그 느낌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땐 잠시 멈춰서, 뇌가 숨을 쉴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해 주세요. 그것이 곧, 다시 건강하게 생각하고 기억하고 일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어줄 것입니다.
합정꿈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ㅣ 장승용 원장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한국정신분석학회 정신분석적 정신치료 Master class 수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