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ㅣ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남자친구와의 관계에서 일어난 폭력과 강간으로 인해 PTSD가 의심되는데 병원에서는 양극성 장애 진단을 받아 의문이 들어 사연 남깁니다.
저는 남자친구에게 오랜 기간 데이트 폭력을 당했습니다. 예를 들어, 첫 성관계를 기습강간으로 당했습니다. 이때 며칠간 반추적인 사고로 갑자기 화가 치밀면서 남자친구에게 이에 대해 항의했고 부정적인 감정을 내비쳤습니다. 신체적 이상 증상도 발현되어서 메신저에서 나와의 대화창에 ‘불안하다 초조하다 심장이 아프다 이명이 느껴진다’ 등을 기재했습니다. 신체적 증상이 너무 심해 심리상담도 받기 시작했습니다.
몇 달 뒤 더 심한 강간을 당했고, 사건에 대한 기억이 일부 소실되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아무렇지 않은 척 감정이 느껴지지 않거나 둔감해지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또, 그전에는 친구들에게 속상한 일들을 말하곤 했는데 강간당한 피해 사실에 대해 주변에 호소하지도 않고 심리상담도 다 끊어버렸습니다. 원인불명의 콜린성 알레르기도 생겼는데, 긁거나 갑자기 온도변화가 있을 때 혹은 이유 없이 알레르기가 올라오는 것으로 보아 콜린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후 살면서 처음으로 정신과 방문을 했는데 남자친구와 관련된 문제로 방문했지만 내원 초진부터 양극성 장애로 진단되었습니다. 아마 훨씬 전의 일화인데 과거 조증 삽화를 말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후 병원에서 여러 가지 두뇌 및 심리검사를 했는데, 피해의식과 방어기제가 나왔습니다.
병원은 리튬, 데파코트 등 약을 바꾸었는데 모두 부작용이 생겨서 그만 다녔습니다. 그런데 제가 간헐적으로 화를 못 참고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고, 정신운동(psychomotor) 증상이 나타나면서 이상해졌습니다.
그러다 좀 잠잠해졌는데, 최근 사건을 복기하는 일이 생기며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상태가 또 악화되었습니다. 악몽을 꾸며 새벽마다 발작하고 메신저 나와의 대화창에 ‘심장아파, 살려줘’ 이런 것들을 보내고 업무 시간에는 멍해서 사고가 지연되고 실수가 너무 잦습니다. 길을 걷다 복통에 배를 부여잡기도 하고 일상생활이 어렵습니다.
하도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서 그런지 사건을 말할 때 심박수가 올라가지는 않는 것 같은데요. 결론은 분명 사건 때문에 영향을 받았고 이상심리가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은데, 이것이 일관된 증상인지(병이나 원인에 의해) 궁금합니다.
상대방을 고소한 상황인데, 제가 당시 사건 중 기억 못하는 부분들이 있기에 이런 부분을 일반인들에게 이해시키는 게 쉽지 않고 대학병원을 다녔는데 담당의 퇴사로 인해 담당의가 계속 바뀌었습니다. 병원의 판단은 불안이나 양극성 장애여서 이를 과학적으로 소명하는 것이 어려운데 제 상황과 관련해 참고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지 싶어 사연 남깁니다.
답변)
안녕하세요. 남자친구와의 관계에서 지속적인 데이트 폭력과 강간으로 인해 큰 신체적, 정신적 충격과 어려움을 겪으셨을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가장 친밀하고 안전감을 느껴야 할 연인과의 관계에서 반복되는 폭력과 강압적인 성관계로 인해 얼마나 불안하고 힘드셨을까요. 사연에 남겨주신 내용만으로 정확한 진단을 내리거나 단정적으로 말씀을 드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우선 말씀드립니다.
외상이란 실제적이거나 위협으로 느껴질 수 있는 죽음, 심각한 부상, 성폭력 노출을 직접 경험하거나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상황 등을 의미합니다. 강간이나 반복적인 폭력은 개인의 안전이나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한 상황으로 인지되며 그로 인한 심리적 충격과 후유증, 관련 증상이 지속될 때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의 진단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특히 가까운 관계 속에서 일상적,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폭력과 강간 같은 외상적 사건은 일회성으로 경험하는 자연재해, 폭력 범죄, 관계 상실 등과는 달리 오랜 시간 만성적으로 타인에 의해 행해진 것으로서 복합 PTSD로 분류합니다.
이런 지속적, 반복적인 위험 상황에 노출된 피해자들은 PTSD의 일반적 증상으로 알려진 과각성이나 침습, 회피 외에도 해리, 불안, 분노 관리의 어려움, 공격성이나 사회적 회피와 같은 자기조절, 대인관계에서의 어려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건 당시에 대한 기억이 일부 소실되었다고 말씀해주셨는데 그 부분 역시 성폭력 피해자들에게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 고통스럽고 힘든 사건이었기에 인지적으로 통합되지 못하고 기억에서도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지 못한 채 조각조각, 부분적으로 기억되는 것입니다. 이는 일종의 해리 증상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일반인들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사건 당시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정말 피해를 입은 것이 맞는지 의심하기도 하고, 재판장에서는 증언의 신빙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안타까운 결정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성폭력과 관련된 PTSD 증상에 대한 인지나 이해가 이전보다는 개선되고 있는 상황이고, 재판 과정에서도 이런 부분에 대한 인식이 차츰 향상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강간과 데이트 폭력이라는 피해를 당한 사실만으로도 심적으로, 신체적으로 많이 힘드실 텐데 피해자로서 자신의 피해를 법리적으로 입증해야 하는 상황에 있으시다는 점이 여러모로 많이 어렵고 부담이 되실 것 같습니다.
보다 정확한 진단과 치료를 위해서는 해당 사건이 발생하기 전 정신과 진단 이력 및 관련 증상, 경과를 함께 살펴보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데이트 폭력과 강간으로 인한 PTSD를 경험하셨을 수도 있지만 그 이전 경험하신 조증삽화 등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증상이 복합적이고 혼재된 양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시기나 유발인자와 같은 요인에 따라 증상이 나타나는 형태에 영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성적인 정신질환의 경우에는 증상의 발현도 조금씩 변화되는 형태를 더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보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사연자님의 정신적, 신체적 변화를 과거부터 현재 시점에 이르기까지 통합적이고 종합적인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 면에서는 지속적, 일관적으로 사연자님의 상태를 지켜보고 담당의가 바뀔 가능성이 낮은 의료기관을 찾아보시는 것도 어떨까 싶습니다. 또, 과거의 조증삽화를 비롯한 과거력뿐만 아니라 데이트 폭력과 강간과 관련해 당시 경험하셨던 증상, 현재 PTSD를 의심해볼 수 있는 증상(현재도 지속되는 악몽, 복통을 비롯한 신체적 증상, 사고의 지연, 일상생활의 어려움)을 함께 이야기하시고 현재 상태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진단을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최초 강간 이후 심리상담을 진행하신 전문가분께 당시의 상담기록에 대한 자료를 요청하셔서 의료기관에 함께 제출하시면 사연자님의 상태에 대한 보다 면밀하고 정확한 진단, 치료적 개입을 위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부분에 대한 검토를 통해 진단명 변경이나 법적 진행 과정에서도 도움이 될 수 있을지를 정신과 전문의 및 변호사 등 의료적, 법적 지원을 제공할 수 있는 전문가들과 논의해보시면 좋겠습니다.
더 불어 성폭력 사실에 대한 입증, 그와 관련된 신체적/정신적 피해에 대한 입증, 법률적 처리 과정 등에서 추가적인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여성가족부의 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지원 서비스(http://www.mogef.go.kr/sp/hrp/sp_hrp_f003.do), 한국 성폭력 상담소(https://www.sisters.or.kr/) 등을 통해 도움받으실 수 있습니다. 답변드린 내용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기를 바라며, 외상적 사건과 기억, 그로 인한 증상들로 인해 많이 힘드시겠지만 적절한 의료적, 법률적 지원을 통해 사연자님께서 몸과 마음의 건강을 되찾으시고 일상을 회복하실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ㅣ 전형진 원장
국립공주병원 전공의 수료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