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길을 걷거나 지하철이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식당에서 식사할 때처럼 일상생활의 곳곳에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을 마주칩니다. 그렇게 마주친 사람들의 얼굴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대부분 무표정하거나 화난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웃는 얼굴을 한 사람을 찾기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만큼 쉽지 않습니다. 

자, 그럼 이제 거울 앞에 서서 내 얼굴을 한 번 들여다볼까요? 어떤 표정을 하고 있나요? 깊게 패인 미간, 찌푸려진 눈썹, 못마땅하다는 듯 삐죽 나온 입술을 하고 있지는 않나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도 모르게 화난 얼굴을 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화를 내고 싶지 않지만 주위를 조금만 둘러보면 화나는 일이 잔뜩인데, 어떻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겠냐고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맞습니다. 뉴스를 틀어보면 온통 좋지 않은 소식들로 가득하고, 일터에서는 업무나 대인관계 스트레스, 월세나 생활비 등 경제적 고민, 가족이나 지인들과 관련된 문제 등 우리를 힘들게 하고 화나게 하는 일들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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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듯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성난 사람들(BEEF)>이라는 드라마가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아시아계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 이 드라마에서는 다양한 사회적 계층의 인물들이 저마다의 이유와 상황으로 분노를 느끼는 모습이 잘 그려집니다. 일이 잘되지 않는 도급업자 대니와 성공했지만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느끼는 사업가 에이미가 사소한 일로 부딪히면서 분노를 느끼고,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입니다. 

미국 드라마로서는 드물게 연출부터 제작, 주연배우까지 대부분 한국계 인물들이 담당한 이 드라마가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아시아인이라는 인종적 소수자로서의 정체성보다 ‘분노’라는 인류 보편의 정서를 주요 테마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소한 일로 차량 추격전까지 벌이는 것이 과장되고 극적인 설정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실은 이들이 느끼는 분노는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경험하는 감정과 매우 닮아있기도 합니다. 단지 우리는 분노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선에서, 극단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을 뿐이죠. 

분노는 그 자체로는 좋거나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내부적 요인 또는 상황이나 타인과 같은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우리의 필요나 욕구, 노력이나 계획이 좌절되고 실망을 경험할 때 느끼는 자연스러운 정서적 반응입니다. 

그러나 분노를 직접적이거나 파괴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터부시되기에 우리는 많은 경우 분노를 억지로 누르거나 아예 인식하지도 못하도록 무의식의 영역 안에 가두고는 합니다. 많은 사람이 화가 날 때 잠을 자거나 음식을 먹는다든지, 다른 활동을 하며 주의를 돌리고 잊어버리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분노가 크지 않을 때는 이렇게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리는 것이 효과적인 대처법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도 분노가 해결되지 않고 계속 마음속에 남아 있거나, 제대로 표출되지 못한 분노가 계속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폭발적인 형태로 표현됩니다. 마치 거대한 화산이 갑자기 폭발해 용암이 쏟아져 나오듯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나오는 것이죠. 그리고 분노는 우리의 통제범위를 벗어나게 됩니다. 

그렇기에 단순히 분노를 억압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임시방편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분노가 자연스러운 반응임을 인정하면서 분노를 느낄 때 그것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효과적으로 다루며 잘 표현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와 관련해 분노를 다루는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해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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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정 일기 쓰기

매일 느꼈던 감정을 글로 정리해보면서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화나 분노를 일기에 적어봅니다. 글로 쓸 때는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할 때보다 더 정리되고 순화된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 속에만 담아두고 표현되지 못해 답답했던 마음을 해소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2. 분노를 이해하고 재구성하기

분노를 느낀 상황이나 유발요인이 무엇인지 떠올려봅니다. 어떤 맥락에서 화가 났고 나는 그 사건 혹은 대상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분노와 관련된 인지적 틀을 파악해볼 수 있습니다. 분노를 느끼는 데 영향을 준 부정적 생각이나 믿음이 있다면 더 적응적이고 건설적인 방식으로 사고를 전환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3. 효과적인 소통 방법 배우기

분노를 전혀 표현하지 않거나 폭발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이분법적 소통방식은 나 자신과 타인에게 모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2만큼의 분노라면 2만큼의 표현으로, 6의 분노라면 6에 해당하는 표현방식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무조건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이기보다는 지금 느끼는 감정과 그 이유, 내 생각을 상대방에게 명확하게 전달하고 대화, 논의와 같은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좋습니다. 

 

분노는 건강한 방식으로 잘 표현되었을 때 긍정적인 역할을 하며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줍니다. 개인적 차원에서의 감정 해소만 아니라 불의에 대한 저항, 사회정의 추구와 같은 사회변화까지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노를 참고 표현하지 않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잘 인식하고 건설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분노를 삶의 자양분과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이호선 원장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한양대병원 외래교수, 한양대구리병원 임상강사
(전)성안드레아병원 진료과장, 구리시 치매안심센터 자문의, 저서 <가족의 심리학>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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