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장승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한 우물만 파라”, ‘일만 시간의 법칙’과 같은 이야기를 쉽게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직업적,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충분한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한 분야에 몰두하고,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 사회에서는 특정 분야에서의 전문성을 기르는 것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높게 평가합니다.
어느 분야에서든 전문가로 인정받는 사람들은 그만큼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한 분야에 대한 선택과 집중이 반드시 모든 사람에게 잘 맞는 방식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중에도 아마 그렇게 느끼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팔방미인’이라는 말은 여러 분야에서 재능을 보이는 사람을 뜻합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표현이지요. 그런데 이 말을 조금 더 전문적으로 표현해 주는 용어가 있습니다. 바로 ‘다중잠재력자(multipotentialite)’라는 단어입니다.
다중잠재력자는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지며 인생에서 창의성을 추구하고, 어떤 하나의 영역으로만 자신의 관심사나 직업적 소명을 국한하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 용어는 2015년 에밀리 와프닉(Emilie Wapnick)이 TED 강연에서 사용하면서 다시금 주목 받았습니다.
팔방미인이라는 말이 예부터 흔하게 사용되어 온 것처럼, 다중잠재력자라는 개념은 사실 아주 낯설거나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해부학자, 식물학자, 천문학자, 지리학자였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대표적인 다중잠재력자에 해당합니다. 요즘에는 인기 연예인 중에서도 배우, 가수와 같은 본업 이외에 미술, 사진 등 다른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 역시 다중잠재력자라고 볼 수 있겠죠.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다중잠재력자를 편견을 갖고 바라봤던 측면이 있습니다. 다중잠재력자는 한 우물을 진득하게 파지 못하고 관심사가 이리저리 쉽게 바뀌는 사람, 어느 분야에서도 특출나게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 집중력과 끈기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 일쑤였지요. 많은 관심사와 재능으로 인해 오히려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해 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며 마땅치 않은 눈길로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중잠재력자 중에는 이런 자신의 성향을 애써 외면하거나 자신이 무언가 잘못된 사람,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여긴 채 사회에서 원하는 기준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고 노력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에 염증을 느끼기도 하고, 뭔가 채워지지 않은 듯한 공허함, 자신을 감추고 사는 것 같은 답답함을 경험합니다.
최근에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다양한 분야 사이의 융복합, 통섭이 강조되면서 다중잠재력자에 대한 재평가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한 분야에서의 전문성이나 능력이 영역을 뛰어넘어 다른 영역까지 확장될 수 있다거나, 다양한 분야에 걸친 지식과 재능이 결합해 새로운 문제해결, 창의적인 방법, 혁신을 가져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중잠재력자가 가진 사고의 유연성, 폭넓은 지식과 경험치, 호기심, 재능이 매우 가치 있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또, 평균 기대수명의 증가와 함께 평생직장이나 평생 직업의 개념이 약해지면서 동시에 여러 직업을 함께 영위하거나 하나의 직업에서 은퇴하고 다른 직업으로 전환하는 것이 비교적 흔한 일이 되고 있습니다. 그럴 때 원래 몸담고 있던 분야 이외의 다른 분야에 대한 지식이나 기술적 준비가 되어 있다면 보다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겠지요.
이런 점에서 다중잠재력자가 가진 다양한 관심사와 흥미, 재능을 잘 활용한다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또, 다중잠재력자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본인의 전문 영역 이외의 다른 영역에도 관심갖고 분야를 넓히는 것은 삶의 다양성과 재미, 만족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특정 전문 분야에서 종사하면서 전혀 다른 분야, 혹은 연계성을 갖지만 낯선 분야를 취미나 제2의 적성으로 탐색함으로써 원래 몸담고 있던 분야에서 느끼지 못했던 지적 도전이나 성취감, 해방감, 스트레스 해소 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중잠재력자로서 살아가는 데 이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다양한 갈림길에서 선택과 집중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고, 지나치게 많은 관심사로 인해 몸과 마음이 지치거나 시간 부족에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에 현명하게 잘 대처하기 위한 몇 가지 팁을 소개해 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시간 쪼개기
하루, 일주일, 한 달, 일 년과 같은 시간 단위를 기준으로 어떤 일에 얼마만큼의 시간을 할애할 것인지 구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루 중 8시간은 본업에, 출근 전 1시간은 관심 있는 어학 공부에, 퇴근 후 1시간은 운동에 시간을 쓰겠다고 계획할 수도 있습니다. 일주일을 기준으로는 평일 중 4일은 본업에 충실하고 금요일과 토요일은 새롭게 공부하고자 하는 분야의 강의를 듣거나 실습하는 데 사용하고, 일요일은 운동이나 휴식에 쓸 수도 있겠죠.
2. 다양한 관심사를 융합하기
너무 많은 관심사를 다 소화할 수 없다면 ‘일타쌍피’처럼 한 번에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관심 영역을 함께 다루는 것도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사진과 뜨개질에 모두 관심이 있지만 시간이 부족하다면, 뜨개질한 작품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입니다. 공연 관람과 글쓰기에 관심이 있다면, 공연을 본 후 공연 후기를 블로그 등에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좋겠죠.
3. 우선순위 정하기
다양한 관심사를 모두 한꺼번에 소화해내겠다는 무리한 기대를 갖기보다는,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당장 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 천천히 해도 좋은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해당 영역은 천천히 꾸준히 한다는 생각을 가지면 몸도 마음도 조금 더 여유가 생길 것입니다.
4. 적절한 휴식 취하기
다양한 관심사는 열정의 동력이 되지만 너무 많은 일을 끊임없이 하다 보면 심신이 지칠 수 있습니다. 적절한 휴식은 더 멀리, 더 오래 나아가기 위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5. 한 가지 일에 집중 후에는 다른 영역을 시도하기
한 가지 분야에 일정 기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면, 그 후에는 다른 영역에 집중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예를 들어 3~4개월간 글을 쓰는 데 몰두했다면, 그 후 3~4개월은 또 다른 관심 분야인 사진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기를 갖고 여러 가지 일을 저글링하듯 하다 보면 한 분야에 느꼈던 스트레스나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 압박감 등을 덜고 새로운 활력과 영감을 얻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재주 많은 사람이 밥 굶는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재주 많은 사람이 다양한 곳에서 밥을 먹을 수 있다.”라고 이 속담을 바꾸는 것이 더 적절할지 모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사회가 기대하는 일반적인 인식과 기준치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자책했을지 모르는 다중잠재력자 여러분, 자신이 누구인지 알며 스스로에게 가장 맞는 삶의 방식을 통해 여러분이 가진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살아가실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합정꿈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장승용 원장
참고문헌: 1. Kate Olson, (2023). 삶을 추구하는 방식. Breath 매거진, 17, 8-15.
2. How to Deal With Being A Multipotentialite. (2020). Retrieved from https://medium.com/@justjen02/how-to-deal-with-being-a-multipotentialite-43fde79adfc0
3. Sahasrajit Krishnan. (2022). Being a Multipotentialite. Retrieved from https://www.linkedin.com/pulse/being-multipotentialite-sahasrajit-krishnan?trk=pulse-article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한국정신분석학회 정신분석적 정신치료 Master class 수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