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대학생입니다. 제 불안의 시작은 고등학생 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고등학생 시절, 과민성대장증후군 때문에 조용한 곳에서 공부하는 게 매우 힘들었습니다. 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수능을 봤고, 시험을 망치게 된 후 지금의 대학교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이후로 시험장에서 시험을 보는 상황 자체, 시험장 분위기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후부터가 정말 큰 문제였어요. 코로나로 2년간 학교에 가지 않다가 새롭게 가게 되니, 교실이란 공간 자체에 제가 공포를 느끼더라고요. 항상 사람들이 앉지 않는 구석진 곳, 제일 끝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수업을 듣게 되었습니다.
매번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공간을 찾다 보니, 이젠 조금만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싶으면 속이 안 좋고 배가 아픕니다. 예를 들어, 학교 강의실에서 자리에 앉을 때, 제 뒤에 많은 사람들이 앉는다면 그때부터 속이 메스껍고, 어쩔 땐 강의실을 박차고 나가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이 증상이 교실 또는 강의실이란 공간에만 한정된다는 것입니다. 밖에 나가서는 제 뒤에 누가 앉든, 제 앞사람이 무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일을 곧잘 합니다. 심지어 저는 원래 모임에서 리더나 발표를 도맡아할 정도로 사람들의 시선이나 인정을 받는 일을 즐깁니다.
강의실이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공부하는 공간에만 들어가면, 제가 사람들의 시선을 받을까 봐 걱정되며, 그럼 제가 불안을 느끼게 되어 배가 아플 텐데 하고 또 걱정합니다. 혹시라도 배가 아플 것을 염려하여 학교 가기 전에 먹는 밥은 최대한 적게, 자극적이지 않게 먹는 게 벌써 반년이 넘어갑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목감기에 걸린 상태인데, 오늘 강의에서 잔기침이 너무 나와 끊임없이 기침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내일 강의 중간에 제가 기침을 멈추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과 불안이 또 드네요. 3년 넘게 이런 걱정을 달고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이렇게 긴 글을 남겨 봅니다.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올려주신 고민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과민성대장증후군을 계기로 조용한 곳에서 공부하는 게 힘들어지고, 중요한 수능 시험에까지 안 좋은 영향을 받으셨다고 하니, 상심이 꽤 크셨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이 크게 각인되어 이후로 시험 보는 상황이나 강의실 같은 공간에 있을 때 많이 불안해지고, 심지어 공포감까지 느낄 정도라고 하시니 불편감이 상당하시리라 생각됩니다.
더군다나 현재는 대학생 신분으로 하루 일과 중 많은 시간을 강의실에서 보내고 있고,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강의 수강이나 시험을 보는 일은 언제든지 해야 할 수 있기에, 이 문제를 잘 극복하는 일은 사연자님께 꽤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미 지난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관련된 증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 오신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사연자님께서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과민성대장증후군을 앓아 왔다고 하셨는데요, 과민성대장증후군이라는 질환 자체가 심리적 불안이나 스트레스 자체에 영향을 많이 받는 질환인 만큼, 원래도 조금 불안감과 민감성이 높은 기질을 타고났거나, 스트레스에 취약한 부분이 있으리라 짐작됩니다.
또 ‘불안’을 일으키는 데는 학습적인 요소가 작용하기도 하는데요, 이것은 어떠한 개인의 생물학적 상태나 외상적 사건, 학습 반응 등을 통해 위험하지 않은 특정 상황과 불안 반응을 연관시키면서 불안이 습득되는 메커니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즉, 시험장(강의실)에서 수능을 봤던 경험이 과민성대장증후군 증상으로 인해 기대했던 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하면서 사연자님의 두뇌가 이를 학습하여 ‘강의실’이라는 공간에 있을 때, ‘과민성대장증후군’과 ‘불안’이 더욱 자극되고 활성화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제부터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연습을 하는 것이 사연자님께서 강의실에서 좀 더 편안한 몸과 마음 상태로 강의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입니다. 우선, 몇 가지 실천적인 팁을 드리기 전에 장기적으로 과민성대장증후군을 잘 관리하는 것이 사연자님의 장 건강은 물론 전신 건강 증진과, 강의실에서 겪는 불편감을 완화하는 데도 중요한 요인이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현재처럼 학교에 가기 전에 먹는 양을 조절하거나 자극적이지 않게 먹는 습관은 비단 강의실에서 느낄 불안이나 걱정을 줄여 줄 뿐만 아니라, 과민성대장증후군 증상의 개선을 위해서라도 바람직한 노력입니다. 과민성대장증후군 증상은 자율신경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우리가 보통 스트레스를 받을 때 교감신경이 항진되면서 뒷목과 어깨가 굳어지고, 소화가 잘 안 되면서 장이 예민해져 과민성대장증후군이 나타나게 됩니다.
따라서 평소 이러한 증상을 잘 관리하기 위해서는 식습관과 생활 습관을 잘 잡아 나가는 것이 중요한데요, 자극적인 음식(특히 매운 음식)이나 카페인, 탄산음료, 알코올, 가공식품, 정제된 탄수화물, 글루텐이 포함된 음식 등은 가능한 한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평소 걷기나 산책처럼 꾸준한 운동을 통해 장운동을 활성화하는 것도 소화기 계통은 물론 정신 건강을 증진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죠. 만약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민성대장증후군 증상이 완화되지 않는다면 적절한 진료와 함께 약물치료를 받는 방법도 고려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최근 연구로 밝혀진 뇌장축(Brain-Gut Axis) 이론에 대해 잠시 설명드리는 것이 현재 사연자님께서 겪는 어려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뇌장축 이론이란, 우리의 ‘뇌’와 ‘장’이 약 2,000개의 신경가닥으로 연결되어 있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 처하면 뇌에서 여러 신경계 호르몬의 분비에 변화를 일으켜 뇌장축을 통해 소화기능에 영향을 미치거나, 반대로 장내 환경이 좋지 않은 경우 뇌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설명해 줍니다.
즉, 사연자님께서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 처음에는 과민성대장증후군(‘장’) 때문에 조용한 곳에서 공부하는 게 힘들어지고(‘뇌’), 점점 더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공간을 찾다 보니 이제는 강의실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긴장감이나 불편감(‘뇌’)이 증폭되면서 다시 속이 불편해지는(‘장’) 패턴이 굳어지고 또 강화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장 건강’을 위한 실제적인 노력과 함께, 강의실에 들어갔을 때 느껴지는 높은 긴장감과 불편감, 불안의 수준을 낮추는 것을 목표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중 첫 번째는 강의실에 들어설 때 엄습하는 불안과 불편감이 느껴지기 직전, 사연자님의 무의식중에 스쳐 지나가는 왜곡된 사고가 있을 텐데요, 이러한 왜곡된 사고를 찾아서 반박하고 바로잡음으로써 불편한 감정적 반응을 줄이고, 좀 더 적응적인 사고와 태도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왜곡된 사고의 유형으로는 최악을 예상하기, 과일반화, 개인화, 흑백논리, 왜곡된 마음 읽기 등이 있는데요, 이를테면 ‘사연자님께서 배가 아파서 강의 중에 화장실을 들락날락하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때 사연자님의 머릿속에는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몇 가지 왜곡된 사고가 작동될 수 있는데요,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 볼까 합니다.
① ‘과일반화’의 예: ‘내가 수업 중에 화장실을 들락날락해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내가 자기 관리를 잘 못했기 때문이야.’
--> ‘과일반화’를 반박하기: ‘누구나 수업 중에 배가 아플 수 있고,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어. 이건 생리적인 현상으로 자기 관리와는 별 상관이 없지.’
그리고 학생들이 단순히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연자님을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본 행위에도 의미를 부여해서 다음과 같은 왜곡된 사고를 보일 수 있습니다.
② ‘개인화’의 예: ‘저 학생들이 나를 쳐다본 것은, 내가 수업을 방해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
--> ‘개인화’를 반박하기: ‘학생들은 그냥 문이 열리니까 자연스레 시선이 나한테 온 거야. 내가 다른 학생들이 하는 생각을 다 알 수는 없지. 그리고 다른 학생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지 나와는 상관이 없어.’
③ ‘최악을 예상하기’의 예: ‘앞으로 이 수업 시간에 어떻게 참여하지? 너무 끔찍해. 차라리 다음번 수업 시간에는 결석하는 게 낫겠어.’
--> ‘최악을 예상하기’를 반박하기: ‘사람들은 생각보다 남에게 관심이 없어. 그들은 오늘 내게 있었던 일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다음 수업 시간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도 안 날 거야.’
어떠신가요? 이처럼 사연자님께서 강의실에 들어설 때 그동안 자기도 모르게 왜곡되고 부적응적으로 사고했던 부분이 있다면 한번 찾아보고 이를 반박해서 좀 더 적응적이고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바꿔 보신다면 도움이 되실 겁니다.
두 번째는 불안하다고 해서 언제까지고 그 상황을 피하기만 한다면 그 불안을 극복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진다는 건데요, 즉 사연자님께서 강의실 자체에 공포를 느끼면서 구석진 자리만 고수한다고 해서 강의실에서 느끼는 불안감이 없어지거나 줄어들기는 어렵다는 것이죠. 일단은 지금 당장 강의실에서 느끼는 불안감을 완벽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세요.
사연자님뿐만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든지 불안감을 조금씩은 느낍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감을 느낀다고 해서 어떤 큰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고, ‘내가 불안하구나.’ 하고 인식하면서 ‘불안감이 계속 나에게 머물지 않고 이 또한 지나갈 거야.’라고 생각하는 순간, 마음의 불안감이 차츰 줄어드는 느낌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강의실에서 불안감을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단계적 노출’ 훈련을 적용해 보실 것을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단계적 노출이란, 불안장애를 치료하기 위한 행동치료 중 한 가지 방법인데요, 불안장애나 사회불안장애 등에 효과적인 치료 방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연자님의 경우, 강의실 자체가 ‘공포스럽고 불안한 장소’로 각인되어 있는 인식을 좀 더 ‘편안한 장소’로 바꾸기 위해 점차적으로 불안한 강도가 높아지는 정도로 노출함으로써 ‘어, 좀 힘들지만 참을 만하네.’, ‘조금 불안하지만 견딜 수 있겠네.’와 같은 경험을 통해 강의실에서의 불안감을 낮추는 훈련을 해 보는 거죠.
단계적으로 실천할 만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안 드리자면, 가장 먼저 휴일에 아무도 없는 강의실에 가서 이완된 몸과 마음으로 그곳에 머물러 보세요. 강의실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가볍게 스트레칭도 하고, 바닷가나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명상을 해 보셔도 좋겠습니다.
그렇게 1단계를 시도해 보시고, 2단계로 남들보다 가능한 한 먼저 강의실에 도착해서 이전보다 좀 더 앞쪽, 안쪽 자리에 앉아서 편안한 음악을 듣거나 명상, 스트레칭을 하며 평소보다 이완된 상태에서 강의를 들어 보세요. 이런 식으로 좀 더 앞쪽 안쪽 자리로 계속해서 시도해 보는 것이죠.
그리고 이때 사람들이 사연자님을 쳐다보거나 관찰하는 게 아니라, 사연자님께서 사람들을 쳐다보고 관찰해 보는 것으로 관점을 바꿔 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관찰당한다는 생각을 하면 긴장감이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반대로 이제는 내가 관찰자의 입장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오늘 제안 드린 몇 가지 방법을 실천해 보면서 점차 강의실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수업에 집중하게 될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아울라 사연자님의 삶에서 또 다른 불안감이 찾아오더라도, 인생의 동반자라고 생각하시고 그 불안을 잘 다스려 나갈 수 있게 되기를 응원합니다.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이호선 원장
한양대병원 외래교수, 한양대구리병원 임상강사
(전)성안드레아병원 진료과장, 구리시 치매안심센터 자문의, 저서 <가족의 심리학>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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