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우선 이런 공간을 만들어 주셔서, 고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전문가의 도움 또한 받을 수 있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학생입니다. 이야기는 중학생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는 잘하는 게 많고, 외모도 좋고… 한마디로 잘났습니다. 그 친구에 대해 그전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면 중학교에 입학한 후 뭔가 자의식이 생기면서 그 친구 앞에서 조금 (마음속으로는) 작아졌던 것 같습니다. 또 비슷한 시기에 반에서 겉돌면서 심적으로 조금 힘들고, 자존감이 낮아지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스스로를 속이기 시작했어요… 제가 스스로 그렇게 잘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저 자신에 대해 과도하게 높게 평가하고, 자존감이 높다고 생각하는 등 계속해서 마음을 다잡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게 중학생 때쯤 자존감에 대해 큰 강박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좋은 친구들도 생기고, 다양한 방법으로 자기 계발을 하고, 제가 이뤄 내는 일들이 생겼고, 저 스스로도 계속 되새기고 셀프 가스라이팅(?)을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제가 스스로를 속이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아요. 제가 정말 그런 사람이 된 걸 수도 있고… 아무튼 제 생각뿐 아니라 객관적 지표도 몇 생기면서 제삼자의 입장에서 저를 생각해도 나쁘지 않다고 평가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게 너무 과도했던 탓인지, 저 스스로를 잘났다고 여기는 것에서 그쳐야 하는데 남을 보면서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빈번해졌습니다. 이걸 의식한 지는 1, 2년 정도 된 것 같아요.사실 제가 원래 이렇게 태어난 인간인데 이걸 자각하기 전에 자존감 높이기 운동을 한 것인지, 자존감 높이기 운동이 저를 이렇게 만든 것인지 순서가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이걸 문제라고 느끼게 된 계기가 있는데요, 평소에는 뭔가를 열심히 안 하거나 미래에 대해 생각이 없어 보이는 사람을 보면 ‘왜 저럴까? 저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나라면 안 그럴 텐데….’ 정도로 생각해 왔다면, 어느 날 저와 비슷한 성과를 낸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의 노력이나 성과는 아무렇지 않게 혹은 하찮게 여기는 스스로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은 대단하게 여기고 뿌듯해했으면서요… 그 후 저를 되돌아보니 스스로 주변 사람에 대한 한계를 정해 놓고 있었고, 마음속으로 무시하고 있었다는 걸 느꼈어요.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스스로가 정말 싫고,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이성은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어서 정말 미안하고 죄짓는 기분입니다.
제 생각이 틀려먹었고, 정말 오만한 생각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런 저의 생각을 고칠 수 있을까요? 글을 올리기가 정말 두렵네요.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올려 주신 고민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학창 시절부터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되는 데 관심이 많고, 또 그렇게 되고자 부단히 노력해 오셨다는 사연자님의 사연 속에서 무척이나 성실하고 또 자신의 인생을 소중하게 일구어 갈 수 있는 분이라는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우선 본격적인 답변에 앞서 자존감(self-esteem)이란 어떤 개념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마도 흔히들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 있는 존재라는 믿음’ 정도로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거의 맞는 개념이기는 한데요,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어떤 분들은 자존감과 자존심을 혼동해서 사용하거나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존감과 자존심은 ‘자신에 대한 긍정’이라는 측면에서는 통하는 면이 있지만, 자존감이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에 대한 긍정’을 뜻한다면, 자존심은 ‘자기 능력에 대한 자신 또는 집단이나 타인의 인정 혹은 승인’을 기초로 합니다. 때문에 자신의 능력이나 객관적인 상황이 급변하거나 만족스럽지 않을 때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그다지 흔들리지 않지만, 자존심만 높은 사람은 이러한 변화에 큰 타격을 받게 될 수도 있죠.
사연자님께서는 그동안 자존감을 높은 수준으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도 애써 오셨던 것 같습니다. 특별히 그중에서도 다양한 방법으로 자기 계발을 하며 능력을 키우고, 객관적인 지표나 제삼자의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게 됨으로써 스스로도 ‘이 정도면 괜찮지.’ 하는 자존감의 토대를 쌓아 오셨던 것 같고요. 그러한 성실함과 꾸준한 노력에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나만의 인생 목표를 세우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는 자존감을 높이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또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이루어 나가는 과정은 한편으로는 우리 삶을 지탱해 줄 만큼 중요하고도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죠.
다만, 이때 유의해야 할 점은 어떠한 성취나 목표 달성, 수행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성취와 나의 성취를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것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빤히 눈앞에 보이는 능력 있는 직장 동료나, 잘나가는 친구들의 소식이 들려올 때면 내심 지금의 내 능력이나 위치와 비교하며 가늠해 보는 게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이기도 하니까요.
더군다나 학업적 성취나 학벌, 능력, 경제적 수준 등 객관적 지표를 바탕으로 사람을 평가하거나 급을 나누는 잘못된 사회적 분위기 또한 은연중에 우리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이들이 능력이나 학벌, 경제력과 같이 눈에 보이는 조건들로 사람을 평가하거나 우열을 가리지는 않습니다. 진실로 누군가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해 줄 수 있는 것들은 수치화되지 않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죠.
이를테면 우리는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부자이며, 외모가 출중한 사람이더라도 자기가 최고라는 자만에 빠져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이에게 호감을 가지고 다가가지 않습니다. 반면에 자기 자신만큼이나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비록 그가 능력이 출중하지 않거나 가진 것이 별로 없더라도 그 사람의 주변에는 자연스레 사람들이 모여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도 타인의 인격이나 성격이라는 기준이 달라졌을 뿐, 어떠한 기준이나 잣대를 바탕으로 상대방을 평가하려는 태도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연자님께서는 과거 학창 시절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소위 말해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 무엇이든지 잘하고 완벽한 조건을 갖춘 남자)’처럼 모든 것이 완벽하게만 느껴지고, 내심 마음속으로는 잘난 그 친구와 자신을 비교하며 자존감이 낮아지는 경험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당시 느꼈던 감정은 스스로가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만 느껴지는, 존재에 대한 수치심에 가깝지 않을까 짐작됩니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기 위해 현실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물론, 스스로의 성취나 노력에 과도하게 도취된 측면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듭니다.
그리고 여전히 사연자님의 마음 깊은 곳에는 ‘나에 대한 긍정의 마음’에 확신이 부족하거나 불안정한 측면이 있기에, 나보다 능력이 부족해 보이거나 내 기준에 못 미치는 사람들을 보며 한심하다고 여김으로써 반대급부로 우월감을 느끼고자 하셨던 것일 테고요.
사연자님과 비슷한 성과를 낸 동료를 보며 그의 성과는 하찮게 여기고, 사연자님께서 이룬 성과는 대단하다며 우쭐대는 마음이 들었던 것은, 그 역시 나만큼이나 노력하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경우,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이나 느낌을 유지하기가 어렵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상대의 성과가 하찮다고 생각해야 상대적으로 나의 성과나 능력이 더 대단하다고 느낄 수 있을 테니 말이죠.
사연자님께서 이러한 인식이나 느낌을 받으신 것은 ‘우월감’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만 사실 우월감이란, 열등감의 방어기제로서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남을 깎아내리고 얻는 보상심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사연자님께서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느낀다고 해서 너무 자책하거나 속상해하지는 않으셨으면 해요. 왜냐하면, 열등감 역시 다른 감정들처럼 인간이 느끼는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감정 중 하나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사연자님께서 느끼는 열등감이나 우월감이라는 감정을 부정하거나 급하게 없애야 할 것으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또 그로 인해 스스로를 책망하지 말고, 그저 내가 지금 이러한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바라봐 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사연을 읽으며 무엇보다도 사연자님께서 멋진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놓치지 않고, 또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고 자아 성찰을 통해 좀 더 성숙해지고자 노력하는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사연자님께서 눈에 보이는 성취나 객관적인 조건들을 향상시키기 위해 많은 시간과 열정, 에너지와 노력을 기울이셨다면, 이제부터는 인생의 가치관을 숙고해 보고 자신에게 맞는 가치관을 찾아보면서 원하는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실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아울러 사연자님께서 좋아하는 활동이나 취미 생활을 통해 긍정적인 감정과 여유를 만끽할 시간을 충분히 가져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취나 실패, 발전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하는 행위에 집중함으로써 행복감과 충만감을 느껴 보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렇게 존재 자체의 가치나 행위를 통한 즐거움, 인생의 가치관에 초점을 맞추고 생활하시다 보면 자연스럽게 성취나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일에서 점차 자유로워지시리라 생각됩니다. 반드시 무언가를 성취하지 않아도, 남들보다 잘하지 못해도 사연자님께서는 얼마든지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전형진 원장
국립공주병원 전공의 수료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