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번 칼럼은 몇 가지 간단한 질문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점심에 드신 메뉴는 무엇인가요? 일주일 혹은 그보다 더 오래전에 가졌던 지인들과의 모임을 떠올려 보세요. 그때 당신의 오른쪽과 왼쪽에는 누가 앉아 있었나요? 그들이 입은 옷 색깔은 무엇이었나요? 자, 이제 조금 더 오래된 과거의 일을 떠올려 보겠습니다. 열 살 생일날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갑자기 뚱딴지같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느냐고요? 여러분의 기억력을 확인해 보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질문에 답하는 동안 아마 오늘 점심 메뉴처럼 비교적 최근의 일은 잘 기억이 나는 반면, 열 살 생일 때처럼 오래전 일은 쉽게 떠올리기 어렵다고 느끼셨을 것입니다. 혹은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 같은데, 그 기억이 정확한 것인지 헷갈리셨을 수도 있지요. 어쩌면 더 정확한 기억을 위해 그날 함께 했던 사람들에게 확인하면서 기억을 퍼즐 조각처럼 맞춰 나가고 싶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자극을 경험하고, 셀 수 없이 많은 기억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모든 사건이나 사람, 보고 들은 내용이 다 기억에 남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것은 그냥 그때 잠시 스쳐 지나간 것처럼 전혀 기억에 남지 않기도 하고, 어떤 것은 잠시 기억에 머물다가 이내 사라지기도 합니다. 간혹 아주 드물게 어떤 기억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은 채 오랜 세월 우리와 함께하기도 하지요.
뇌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곳은 ‘해마(hippocampus)’입니다. 대뇌변연계(limbic system)를 구성하는 영역 중 하나로, 측두엽 안쪽에 있습니다. 시각, 촉각, 청각 등 오감을 통한 자극은 감각기관을 통해 뇌에 입력되는데, 해마는 이 정보들을 잠시 가지고 있는 역할을 합니다. 그 정보 중 해마에서 대뇌피질로 이동되는 것은 장기기억으로 저장되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삭제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마는 기억과 학습을 담당하면서 장기기억, 서술기억에 관여하고, 감정 행동과 운동 기능을 일부 조절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해마가 손상되면 새로운 기억을 생성하거나 미래를 상상할 수 없게 됩니다. H,M으로 잘 알려진 헨리 몰레이슨(Henry Gustav Molaison)은 뇌전증 발작으로 1953년 해마를 포함한 뇌 반구 관자엽의 가운데 부분을 절제했고, 새로운 기억과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H.M은 해마가 기억에 미치는 영향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심리학 및 뇌과학 분야에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H.M의 사례에서 해마가 기억 손상에 미치는 영향을 볼 수 있었지만, 지능이나 운동 능력, 감각 등과 같이 다른 영역에는 문제가 없었다는 사실을 통해 해마가 없어도 운동 능력, 절차기억 등은 뇌의 다른 영역에서 저장될 수 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최근 연구에서는 해마뿐만 아니라 피질, 기저핵, 소뇌, 편도체 등의 다른 뇌 영역에서도 기억 저장 기능을 담당한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신경학적 관점에는 기억 저장 원리를 밝혀내기 위한 노력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1949년 캐나다의 신경심리학자 도널드 올딩 헤브(Donald O. Hebb)는 저서 <행동의 조직화(The Organization of Behavior)>를 통해 두 개의 인접한 뉴런이 동시에 활성화되면서 시냅스 연결 강화, 즉 시냅스 가소성(synaptic plasticity)을 통해 기억이 일어난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이후 다양한 실험을 통해 시냅스에서 일어나는 장기강화(long-term potentiation, LPT)를 통해 기억이 생성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헤브의 가설은 기억 연구의 정설처럼 인정되어 왔습니다.
한편 헤브보다 조금 더 앞선 1904년 독일의 동물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리하르트 지몬(Richard Semon)은 <기억술>이라는 책을 통해 뇌에서 기억이 저장되는 단위, 인지 정보가 구성되는 곳을 엔그램(engram)이라고 명명했습니다. 헤브의 가설과 엔그램의 개념을 연결하면 장기강화(LPT)가 기억을 입력하는 뉴런을 어떻게 결정하는지, 즉 수많은 뉴런 중 어떤 것이 엔그램이 되는지에 관한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기억 생성에 관한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기술의 한계로 이 가설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기가 어려웠지만, 최근 뇌과학 연구가 활성화되면서 엔그램의 개념을 활용한 다양한 실험들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니, 기억 생성의 신경학적 원리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기억 생성 과정에 관한 연구와 함께 ‘기억 오류’에 관한 부분도 오랫동안 기억 연구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우리의 기억이 완벽하지 않으며, 망각과 함께 편집, 왜곡과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인지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로프터스(Elizabeth Loftus) 교수는 자동자 주행 속도에 관한 지각 실험을 통해 기억 왜곡 현상을 밝혀냈습니다. 이 실험에서 로프터스 교수는 자동차 충돌 영상을 시청한 참가자들에게 “자동차가 ‘접촉’할 때 속도가 얼마나 빨랐나요?”라고 질문하기도 하고, “자동차가 ‘들이박을’ 때 속도가 얼마나 빨랐나요?”라고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들이박다’라는 표현을 썼을 때 참가자들은 속도가 더 빨랐다고 지각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같은 실험 결과는 우리의 기억이 정확한 사실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며, 주변의 상황이나 정서 상태 등의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기억 오류는 아동기 성학대, 목격자 증언의 신빙성과 같은 중요한 문제들과도 연결됩니다. 로프터스 교수는 아동 성학대 피해자들의 회복 기억(recovered memory), 오기억(false memory)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어제 본 영화 제목, 오늘 아침 메뉴와 같이 잊어버려도 일상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 기억부터 삶에 아주 중요하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건에 대한 기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억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중 어떤 것은 저장하고, 어떤 것은 삭제하면서 말이지요.
흔히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합니다. 잊어버리는 것이 그만큼 자연스럽고, 또 생존을 위해 필요한 일이기도 하니까요. 모든 일을 다 기억할 수 있다고 하면 우리는 더 행복할까요? 어제 나를 서운하게 한 사람, 오늘 아침에 있었던 짜증나는 일, 배우자가 다투면서 나에게 했던 말들이 영영 잊히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반대로 중요한 일들을 기억할 수 없다면, 그것 역시 우리 삶에 많은 지장을 가져올 것입니다.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의 주인공처럼 말이지요. 부디 기억에 관한 다양한 연구들이 기억 형성과 오류에 대한 더 많은 비밀을 밝혀내 주기를 기대합니다.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정정엽 원장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미래전략 이사, 사무총장
서울고등검찰청 정신건강자문위원회 위원
보건복지부 감사자문위원회 위원
교육청 학교폭력대책 심의위원회 위원
생명존중정책민관협의회 위원, 산림청 산림치유포럼 이사
저서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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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를 듣는 것 같은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고 많은 사람이 도움 받고 있다는 걸 꼭 기억해주세요!"
"선생님의 글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르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