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우경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도와주시지 못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어느새 저는 우리 집의 애물단지가 되었고, 모두에게 미움을 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어제오늘 어머니가 말하길 이 집에서 가장 편한 것은 저, 아버지는 제가 집안의 물을 흐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전 노력했습니다. 죽을 각오로 다시 임한 대학 입시에서 전 떨어졌고, 제겐 더 이상 목표도, 목적도 없습니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다 의미가 없어졌어요.
하지만 저희 집에서 운영하는 편의점에서 일주일하고 3일 정도 열심히 일을 배우면서 전 제가 새로운 희망을 찾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무서웠지만 점점 이겨 내고 저만의 속도를 찾아간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어제 아버지께서 제가 일하는 모습을 옆에서 감시하시면서 계속 지적하시더군요. 계속되는 지적 그리고 제가 하는 행동을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흉내 내는 아버지의 모습에 저는 또다시 희망을 잃었습니다.
제가 심적으로 아파서 쓰러졌을 때도, 뭔가 잘못을 했을 때도 늘 그런 식으로 조롱하곤 하셨죠. 편의점에서의 저는 처음에는 목소리가 작았지만, 이제는 꽤 커진 목소리로 손님을 응대하고, 또 최대한 예의 바르게 행동해 왔습니다.
제가 뭘 어떻게 더 해야 할지 모르겠고, 20년 가까이 저를 무시해 온 아버지를 이제 더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절망적입니다. 그리고 편의점에 나가지 않게 된 저를 보는 어머니의 시선을 버티지 못하겠습니다. 감사했습니다.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근래에 가족들, 특히 부모님께 받은 마음의 상처가 무척이나 크신 것 같아 걱정이 됩니다. 아마도 사연자님께서는 지난해 입시에 재도전하셨지만 원하는 곳에 합격하지 못하는 고배를 마시게 됐고, 그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신 듯합니다.
안 그래도 두 번의 입시 실패라는 아프고 쓰디쓴 경험을 겪으시면서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피로감이 상당히 누적되었으리라 짐작됩니다. 비록 그 결과는 아쉽지만 두 번의 입시 도전에 임한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도전은 아니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마주하며 ‘죽을 각오로 임한’ 사연자님의 노력과 그 시간을 누가 감히 헛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정말 고생 많으셨고, 또 그 도전 정신에 박수를 보내 드리고 싶습니다.
누구나 살다 보면 유독 마음이 힘들고 나약해지는 시기가 찾아옵니다. 그럴 때는 가장 가깝고 친밀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위로와 지지를 받고 싶은 것이 자연스러운 마음이죠. 그런데 입시 실패에 대한 아픔을 딛고 조금씩 힘을 내고 있던 사연자님께 부모님의 격려와 지지가 아닌 지적과 비난의 목소리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겁니다.
사연자님께서 올려 주신 사연 내용을 보면 짐작건대 아버지께서는 꽤 오랜 기간 동안 사연자님께 지지적인 표현을 해 주거나 따뜻하게 대해 주기보다 다소 무뚝뚝하고 또 상처가 되는 말들도 종종 해 오셨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만큼 사연자님께서 마음고생이 심하셨을 테고요. 우리는 누구나 태어나면서 가족을 선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가정 혹은 부모님의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하고, 또 좌절하기도 하죠.
그러나 사연자님을 함부로 규정해도 되는 사람은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없습니다. 설사 그가 가까운 가족이나 부모일지라도 말이지요. 사연자님은 현재 마냥 편하지도 않으며, 또 가정 안에서 애물단지도 아닌 소중하고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입니다.
사연자님께서는 혹시 세계 명작 동화 『미운 아기 오리』를 아시나요? 하얀색 털을 가진 다른 오리 형제들과 달리 회색 털에 까만 부리를 가진 아기 오리 이야기 말입니다. 이 동화에서 아기 오리는 다른 형제들과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로 가족들로부터 놀림을 받고 결국 집을 떠나게 됩니다. 이후 세상 밖으로 나간 아기 오리는 매서운 겨울바람을 견디며 따뜻한 봄을 맞이하게 되지요. 호숫가에 앉아 있다가 웅크리고 있던 날개를 펼쳐 날아오르는 순간, 아기 오리는 자신과 똑같은 생김새를 가진 새들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자신은 오리가 아닌 백조였던 것이죠.
사연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연자님께서 애물단지 자체가 아니라, 때때로 부모님께서 사연자님께 그런 느낌이 들도록 하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일 뿐입니다. 이 부분을 잘 구분하고 이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진짜 사연자님의 모습은, 비록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두 번의 입시에 도전해 보기도 하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신만의 속도를 찾으려 했던 모습, 또 최대한 손님들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하려 했던 노력들에서 저는 용기 있는 사연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도전하고 노력하는 자신의 진짜 모습에 초점을 맞추면서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 보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그런 부정적인 메시지를 보내는 부모님의 말들에 화도 나고 속상하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진짜 사연자님의 모습은 아니라는 것을 사연자님 본인과 이 글을 쓰는 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을까요. 부모님께서 사연자님을 향해 지적하거나 비난하는 말을 했을 때, 사연자님께서는 스스로에게 자신을 안심시키는 말과 긍정의 말들을 다음과 같이 해 보셨으면 합니다.
- ‘저는 이 집의 애물단지가 아니라 숨겨진 보물단지라고요!’
- ‘부모님이 전의 진가를 아직 잘 모르시네요.’
-‘저는 이제 막 저만의 인생 여정을 시작했을 뿐이에요. 이제 배우는 단계인데 아직 서투르고 미숙한 게 당연한 거죠.’
-‘괜찮아, 지금은 잠시 휴식이 필요하겠어.’
이렇게 자기 자신을 위로하고 다독여 주는 말을 시시때때로 해 주시는 것은 물론, 좀 더 용기를 내셔서 부모님께도 더 이상 근거 없는 비난이나 부당하게 상처 주는 말은 하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표현해 보시기를 권유 드립니다.
그리고 부모님 가게에서 일하는 것이 감정적으로 힘들고 부모님과 트러블이 생겨서 불편하다면, 아르바이트를 꼭 부모님 사업장에서 하실 필요는 없겠지요.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를 한번 구해 보시고, 용돈도 벌고 사회생활 경험도 쌓으시면서 새롭게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떠실까요.
사연자님에게는 아직 스스로도 발견하지 못한 무한한 가능성과 보석들이 숨겨져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어느 날 집을 나와 자신과 같은 생김새의 백조를 만나 진짜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 아기 오리처럼 말이지요.
지금 잠시 모험의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숨을 고르고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차근차근 미래를 준비하며 내면의 힘을 키워 간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혼자서는 너무 버겁다는 느낌이 든다면, 상담소나 정신건강의학과에 방문하시어 전문가 분들의 도움을 받으며 길을 찾아 나가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부디 아직 펼치지도 못한 날개를 꺾지 마시고, 오늘부터 다시 날아오르는 연습을 이어 가시기를 마음속 깊이 응원하겠습니다.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우경수 원장
대구가톨릭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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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것만으로 왠지 위로가 됐어요. 뭐라도 말씀드리고 싶어서 댓글로 남겨요. "
"게을렀던 과거보다는 앞으로 긍정적으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되네요. "
"글 잘 읽고 있습니다. 다음 편이 기대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