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30대 직장인 여성이에요. 제목 그대로 오랜 기간 낮은 자제력으로 중독에 취약하고 매일 불안, 우울감, 애정 결핍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참고로 진료는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고, 빨리 치료받아 해야 할 일들을 잘 해 나가며 남들처럼 살고 싶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을 정리해 보면, 담배/알코올 중독, 섹스 중독, 쇼핑 중독, 영상 시청 중독, 식이장애(폭식+토), 잦은 지각 등으로 매일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있어 그로 인한 불안, 우울감이 더욱 심해지고 있는 것 같아요. 불안하고 우울한 마음 때문에 중독에 시달리는 것인지, 중독 때문에 불안하고 우울해지는 건지… 이제는 헷갈립니다.
이렇게 되어 버린 원인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어릴 때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일단 저희 아버지는 극심한 담배/알코올 중독이셨고, 온갖 집기와 물건을 부수고 폭언하는 일은 태어나서부터 계속되었던 것 같아요. 그로 인해서 마음에 상처도 많았고, 성격이 점차 의기소침해지며 만성 우울, 불안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애 있는 동생이 있어 마음 한 켠에 이상하게 떳떳하지 못한 마음도 있어서 더 의기소침해졌던 것 같아요(사실 소심하며 중독에 취약한 이유가 유전적인 이유도 있다는 생각이 들긴 하더라고요).
학령기 때는 학교생활도 쉽지 않았어요. 스트레스도 심해 매일 폭식하며 살도 많이 쪄서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고도비만이 되었고요. 그래서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되는데, 결국에 목표로 했던 대학을 가지 못하고 어찌어찌 맞는 곳으로 진학하게 되었어요.
20대 때를 돌아보면, 비만을 해결하고 싶어 대학 입학 전 지방흡입을 받았고, 수술은 성공적이어요. 열심히 다이어트를 하며 외모를 가꾸고, 대학 생활도 성공적으로 해냈고, 남자친구와 친구들을 사귀며 잠시였지만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나날들을 보냈던 것 같네요. 누군가가 저를 좋아해 주고 평범한 사람으로 봐 준다는 것이 저를 행복하게 해 주었던 것 같아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였는데, 다니던 회사들이 연달아 문을 닫으면서 저는 열정을 잃고 실의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회피 차원에서 친구들과 부어라 마셔라 하며 시간을 보냈고, 남자친구가 있었으나 그저 새로운 남자가 저를 좋아해 주는 게 좋아서 아무 남자나 만나서 술을 마시며 방탕하게 지냈습니다. 취업 준비도 하지 않고, 놀고는 싶으니 이때 생각 없이 600만 원 정도 대출을 받게 됩니다.
20대 후반쯤 되어 계속 백수로 지낼 수는 없어 마음을 다잡고 취업 준비를 해서 입사하게 됐습니다. 직장에서도 인정을 받아서 행복했고, 잃어버린 열정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차올랐어요. 대출금도 잘 갚고 안정적으로 지내고 있었는데, 직장에 라이벌이 등장하면서 저조차도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계속해서 패배감에 젖어들었습니다. ‘나는 더 잘할 수 있는데….’ 기회를 안 주는 느낌이라는 표현이 맞을 듯합니다. 이때부터 매일 억울함과 공허함을 달랠 길이 없어 배달 음식과 술을 마시며 눈물을 흘리고 죽지 못해 살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으로 인해 발생한 뇌경색 투병을 하셨고, 결국엔 돌아가셨어요. ‘나도 저렇게 되지 않을까?’ 너무 불안하고 무서웠어요. 하지만 그랬는데도 술을 못 끊었죠.
30대에 들어서는 회사에서 좋은 선임을 만나 회사생활은 즐거워지기 시작했고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다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노력해도 잦은 지각은 고쳐지지 않고, 불은 몸과 엄청난 빚이 남겨져 있더라고요. 그래서 행복해지기 위한 수단이라 생각하며 엄청난 카드 빚을 감수하고 또 다시 지방흡입을 하게 됩니다.
‘이제 행복해질 거야.’ 하고 생각했는데 주변에선 다 연애나 결혼을 하고, 저축도 많이 했으며, 커리어적으로 더 성공한 친구들도 많고 현실을 자각하니 너무 절망스러웠습니다. 저는 너무 늦어버린 것 같고, 다 포기하고 싶고, 자신감도 하락하니 연애도 어렵고, 악순환으로 계속 우울해지구요. 빚도 4천 정도 있어 정말 앞길이 막막합니다. 그러니 더욱더 결혼과 멀어지는 느낌도 들고… 아픈 동생과 홀어머니를 생각하니 더 힘들고 동생을 짐으로 생각한다는 데 대한 죄책감까지 느껴지네요. 그래서 회피하고 싶어 더 술을 먹게 되고 술을 마시니 더 무기력하고 우울해지네요. 제 인생에 계속해서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진짜 미쳐 버릴 것 같습니다. 어디서부터 문제고,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빨리 치료받고 머릿속에 있는 무수한 해야 할 일들을 열심히 해 나가며, 남들처럼 살고 싶습니다. 병원 및 상담센터에 방문해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절대적으로 많은 것은 인지하였는데 왠지 모르게 용기가 안 나고 망설이며 자꾸 시간을 버리고 있어요.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도와주세요.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오랜 기간 각종 중독과 그로 인한 일상생활에서의 어려움, 우울감과 불안감 등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사연자님께서 겪으시는 중독의 유형도 담배/알코올 중독, 쇼핑 중독, 섹스 중독, 영상 시청 중독 등등 그 종류가 많다는 점이 다소 우려가 됩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자신이 이토록 여러 방면에서 중독 증상을 보이는 원인을 되짚어 보기 위해 지금까지 사연자님 인생의 주요 역사와 중독된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는 사건 등을 상세히 적어 주셨네요. 공개된 곳에 이렇게 사연자님 개인의 이력을 밝히는 것이 쉽지 않으셨을 텐데, 그 용기에 감사 드립니다. 또 이렇게 자신의 삶의 궤적을 뒤돌아보고 지금까지의 삶에 영향을 끼친 요인들을 분석해 보는 시도 또한 좋습니다. 충분히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는 능력과 회복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사연자님께서 적어 주신 글을 읽고 있자니, 알코올중독이 심하셨던 아버지께서 오랫동안 가정 집기를 부수거나 폭언 등을 일삼으셨던 과거의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 두려움에 떨며 눈물을 흘리고, 웅크리고 있는 작디작은 한 소녀가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큰 체구의 아버지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폭력과 폭언을 행사할 때마다 어린 사연자님께서는 얼마나 무섭고 힘드셨을까요.
이러한 일련의 학대적인 상황과 폭력적인 시간들이 여리고 작은 사연자님의 마음에 꽤 깊은 상처를 드리운 것만 같아 저 또한 마음이 아픕니다. 기술해 주신 내용에는 “태어나서부터 계속”되었다고 적고 계신 것으로 보아, 아마도 어린 시절의 사연자님께 이 세상은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 찬, 예측 불가능한 곳으로 각인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 얼굴도 모르는 사연자님이지만 지면을 빌려서라도 꼭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사연자님께서는 작고 연약한 아이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누구도 사연자님께 위협을 가하거나 공포감을 조성하도록 할 수 없습니다. 설사 만약에라도 비슷한 상황에 처하신다 해도 사연자님께서는 이제 한 성인으로서 그 상황을 벗어나거나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실 수 있습니다.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안심하셔도 괜찮습니다.”
각종 중독이 일어나는 원인은 다양하고 또 복합적입니다. 특정 유전자가 중독의 취약성을 증가시키기도 하고, 높은 수준의 스트레스가 지속되면 감정적 고통이나 혼란감을 떨쳐 버리기 위해 중독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또 우울감이나 낮은 자존감도 중독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부모가 중독자일 경우에도 중독률은 올라갑니다.
앞에 나열된 중독이 일어나는 각종 원인처럼 사연자님께도 중독에 빠져들게 된 나름의 이유가 있으실 겁니다. 어쩌면 사연자님께서는 과거의 아픈 기억들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어서, 우울한 가정 분위기를 떨쳐 내고 싶어서 각종 중독 행위에 빠져들게 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알코올중독자였던 아버지가 너무 밉고 싫으면서도 마음이 힘들 때면 무의식의 저 깊은 곳에 각인됐던 알코올이라는 물질이 자동적으로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그 물질에 의존하게 된 것인지도 말입니다.
어떤 행위가 즐거우면 우리는 그 행동을 반복하고 싶어집니다. 이는 뇌 변연계의 중변연 도파민 시스템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곳을 자극하는 물질이 들어오면, 같은 행동을 반복해서 흥분감과 안도감, 쾌감과 짜릿함을 계속 느끼고 싶어 하고, 이런 중독 행위는 점점 쾌락이나 흥분감을 원하는 뇌 신경회로를 강화시킵니다. 이렇게 점차 어떤 행위 혹은 물질에 중독되는 것입니다.
어떤 행위나 대상에 중독되거나 과도하게 의존하게 되면,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해야 할 일이나 정서를 조절해야 하는 상황에서 쉽게 조절 능력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또다시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중독 행위로 도피하는 선택을 하게 되지요.
사연자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것처럼, 이제는 이런 중독의 굴레에서 빠져나오셔야 할 때입니다. 각종 중독에 빠져들수록 우리의 뇌도 더욱 중독에 취약해지며, 다른 심리적 어려움들, 우울증이나 불안 문제 등도 동반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반대로 우울증이나 불안감 등 정신질환 등이 있을 때 중독에 더 취약해지기도 합니다. 따라서 중독 문제와 우울증과 같은 심리적 어려움에 대한 전문적 치료를 꼭 받으실 것을 권해 드립니다.
정신건강의학과에 방문하시어 중독 치료를 받으시면서 심리치료나 상담도 병행하시는 것이 치료 효과를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부분은 전문가 분과 어떻게 치료를 해 나가면 좋을지 상담을 통해 방향을 잡아 나가시면 될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적어 주신 것처럼, 사연자님께서 중독에 빠져들게 된 원인으로 짐작하시는 것들, 그간 겪으신 심리적 어려움에 대해서 숨김없이 솔직하게 털어놓으시는 것이 정확한 진단과 치료 방향을 설정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전문적인 치료를 받으시면서 사연자님께서 노력해 나가셔야 할 부분들도 물론 있습니다. 무엇보다 치료를 시작했다고 해서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중독이나 우울증 같은 문제를 치료해 나가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좀 괜찮아진 것 같다가도 내일은 또 중독의 유혹이나 우울해진 기분이 들어도 괜찮다고, 자연스러운 거라고 스스로를 잘 다독여 주신다면 좋겠습니다. 행여 ‘그러면 그렇지.’, ‘내가 이럴 줄 알았어.’처럼 자기 비난하거나 자책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지금부터는 사연자님께서 그동안 쾌락을 느끼거나 도피처로 삼았던 각종 중독 행동들을 대체할 만한 그 무언가를 찾아 나가실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알코올을 대신할 맛있는 음료라든지 섹스를 대신할 가까운 사람들과 보내는 즐거운 시간, 폭식 행동을 대신할 건강한 식단 짜 보기, 쇼핑을 대신할 필요 없는 물건 정리하기, 영상 시청을 대신할 가벼운 운동이나 산책과 같이 좀 더 생산적이고 사연자님의 인생을 유익하게 채워 줄 활동 같은 것들 말이지요.
그동안 중독 행동으로 채워졌던 사연자님의 시간들을 정말로 사연자님께서 흥미를 느끼면서도 유익하게 할 수 있는 활동들로 조금씩 채워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활동들을 찾아 나갈 때 꼭 오래 지속하거나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가지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저 재미를 느끼고, 좀 더 생산적이라고 여겨지는 활동들을 하나씩 찾아 나가신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중간중간 중독에 대한 유혹이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술 한잔, 쇼핑 한 번, 보고 싶은 영상 시청을 하실 수도 있겠지요. 단번에 사연자님께 즐거움을 주었던 모든 행위를 끊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 어느 정도 기준을 세우시고, 그 기준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통해 계속해서 스스로를 격려해 주세요. 바람직한 행동, 예를 들면, 이번 주에 목표로 했던 운동을 모두 실천했을 때 스스로에게 주는 보상으로 보고 싶은 영상을 한 번 보는 식으로 유익한 활동은 강화하면서 그에 대한 보상으로 자신에게 강화물을 제공한다면 또다시 중독 행동을 했다는 죄책감 없이 어느 정도 중독 행동을 조절하는 데 도움을 받으실 수도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장애가 있는 동생, 홀어머니에 대한 부담감 및 다른 사람들의 삶과 비교하는 생각은 당분간 머릿속에서 지우개로 지우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비록 장애가 있는 동생이지만 아직 어머니께서 돌봐 주고 계시고, 사연자님께서 걱정하시는 부분은 먼 미래의 일입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들이 우리의 머릿속을 채울수록 우리는 쉽게 불안감을 느끼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특별히 나보다 잘나가는 것 같은 사람들과의 잦은 비교는 우리를 우울감과 패배감에 젖도록 만듭니다.
그러니 지금은 오로지 사연자님의 문제, 나의 내면과 삶에 집중하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전문적인 치료 기관에 방문하시는 것도 처음에는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막상 문턱을 넘으시면 지금 겪고 계신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데 분명 도움이 되실 테니 용기를 내어 방문하시기를 바랍니다. 사연자님께는 틀림없이 숨겨진 내면의 힘과 회복을 향한 잠재력이 있으십니다. 스스로를 믿고 다독이면서 치유를 향한 여정을 내딛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전형진 원장
국립공주병원 전공의 수료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