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죠?”

정신의학신문 |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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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이 다리는?”

“백만 불짜리 다리.”

 

여러분은 혹시 이 대사를 기억하시나요? 바로 영화 <말아톤>에서 그동안 준비해 온 마라톤 경기 직전, 주인공 초원(조승우)이와 어머니인 경숙(김미숙)이 나눈 명대사입니다. 경숙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초원에게 ‘마라톤 서브쓰리 달성’을 목표로 혹독하게 훈련시키는 과정에서 자신이 너무 아들을 혹사시킨 것은 아닌가 하는 죄책감에 휩싸입니다.

그리고 고민 끝에 경숙은 초원에게 “이런 거 할 필요 없다.”면서 경주를 말리지만, 초원은 달리고 싶다는 의사를 계속해서 경숙에게 전합니다. 그래도 초원의 진심이 경숙에게 전달되지 않자 훈련 때마다 어머니가 자신에게 하던 말인 “초원이 다리는?”이라는 말을 꺼내 놓습니다. 그동안 어머니가 초원을 믿으며 응원해 주던 말을, 이제는 본인이 함으로써 스스로를 격려하고 마라톤에 대한 열정과 진심을 어머니께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이 고된 훈련에 지치고 힘들 때마다 서로를 믿으며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 준 그 말. 

 

“초원이 다리는?”

“백만 불짜리 다리.”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이 세상에 두 모자뿐 아닐까요? 초원과 경숙은 마치 두 사람만의 암호처럼 이 말을 주고받습니다. 아마 영화 속 다른 인물들은 두 모자가 이런 대화를 어떨 때 나누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지 않는다면 속뜻을 헤아리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러나 이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지켜본 관객이라면 두 사람의 대화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죠. 

이처럼 보통 사람들이 자폐를 가진 사람과 제대로 의사소통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폐를 가진 사람들은 타인의 표정이나 감정을 읽는 데 서투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의도를 알아차리거나 감정을 공감하는 게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 또는 의도 등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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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증이 있는 사람은 단어나 구, 문장 등을 되풀이해서 말하거나 상대방이 말한 것을 그대로 따라서 이야기하는 언어적 특성을 보이곤 합니다. 이것을 전문용어로는 반향어(echolalia)라고 하는데요, 이것이 자폐증을 규정짓는 특징 가운데 하나로 손꼽힙니다. 이러한 반향어는 소위 ‘자폐성 행동’의 일종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 시급히 교정해야 할 행동으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자폐 아동의 부모님들은 행여나 보통 사람들과는 좀 다른 자녀의 언어 표현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거나 고집스러워 보이지는 않을지 걱정되기도 할 것입니다. 또 부모님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이 자폐 아동이 하는 같은 말을 반복해서 듣는 일도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자폐 아동들이 하는 반향어에 다른 사람들을 괴롭게 하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을뿐더러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문가들조차 자폐를 가진 사람들이 반향어를 사용하는 특징이 있다는 것은 잘 알지만, 그들이 반향어를 사용하는 이유, 즉 ‘왜 사용하는가?’라는 질문은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어치료 전문가이자 자폐증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배리 프리전트Barry M. Prizant는 40년이 넘도록 자폐증이 있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위해 자폐 관련 연구를 하며 상담사로도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동안 많은 자폐 아동들의 일상을 다양한 장면, 즉 가정이나 교실, 운동장에서 가족이나 또래들과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촬영하거나 관찰하면서 자폐 아동들이 발화하는 반향어가 단순히 무의미한 흉내 내기가 아니라, 복잡하고 목적이 있는 표현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즉, 자폐 아동들이 하는 말을 여러 맥락과 전후 사정 등을 고려해서 해석해 보았을 때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자신의 의사나 정보, 감정 등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자폐 아동의 반향어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특징일 뿐이라며 지나쳐 버린다면 절대로 그 말뜻을 알아차릴 수 없겠지만, 자폐 아동의 가족이나 선생님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맥락적 정보를 얻고 충분히 아동을 지켜보며 관심을 기울인다면 아동이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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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향어는 아동이 어떤 말을 들은 즉시 그 자리에서 바로 따라 반복하는 ‘즉각적인 반향어’와 소리를 들은 지 몇 시간 혹은 몇 달이나 수년 뒤에 문득 그 소리를 떠올려 되풀이하는 ‘지연된 반향어’로 구분됩니다. 둘 중 그 형태가 어떤 것이든 자폐 아동들의 반향어는 자신이 상대방과 대화 중에 상대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현재 자기가 겪고 있는 상황이나 마음 상태, 어떤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 자폐 아동들이 사용하는 언어적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반향어 중에서도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거나 별다른 목적이나 의미가 없는 표현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 조금만 귀 기울이면 이해할 수 있음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자폐증이 있는 아동들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되풀이하는 방식으로 언어를 배운다는 점입니다. 요약하면, 자폐 아동들에게 이런 식의 표현은 매우 중요한 소통 방식이고, 이를 통해 점차 인지나 언어가 조금씩 발달하면서 반향어도 점차 줄어들게 됩니다. 당연히 아동마다 그 발달 과정이나 속도는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자폐 아동의 반향어를 무턱대고 금지하거나 교정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단순히 반복해서 말하는 대신 아동이 좀 더 사회적인 맥락에 맞게 의사소통하고, 창의적인 표현을 사용하도록 장려하며 도울 필요는 있습니다. 몇 가지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아동이 통째로 외우는 반향어 표현을 다시 단어나 구로 나누어 짧고 명확한 표현을 쓰도록 알려 주고, 가능한 한 쉽게 설명해 주고, 시각적인 자료를 통해 언어 습득이나 표현력을 키워 주는 것이 좋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자폐 아동들이 사용하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 혹은 반향어 표현이 그들이 우리와 소통하지 않겠다고 벽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한 자기 나름의 최선의 표현 방식임을 알아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폐를 가진 사람들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는 인사에 이제는 우리가 답해야 할 차례입니다.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관심이 “초원이 다리는?”이라는 질문에 초원이가 원하는 답을 내놓게 할 것입니다. 진정한 소통이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이호선 원장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한양대병원 외래교수, 한양대구리병원 임상강사
(전)성안드레아병원 진료과장, 구리시 치매안심센터 자문의, 저서 <가족의 심리학>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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