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어느 날 도로 한복판에서 한 남자가 차를 세운다. 그는 갑자기 눈이 멀어버렸다. 그는 병원을 찾아가지만, 원인을 찾지 못한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 앞이 보이지 않는 정체불명의 이상 현상은 이후 전염병처럼 모든 사람에게 급속하게 번져 간다. 눈먼 자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정부는 그들을 병원에 격리해 수용하고, 이 병의 최초 발견자인 의사와 그의 부인도 그 수용자에 포함된다. 남편을 지키기 위해 눈먼 자처럼 행동하는 의사 부인은 유일하게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다. 눈먼 자들이 지속해서 늘어나자 수용소는 포화상태에 이르고 그 안에서는 생존을 위한 뜨거운 투쟁이 벌어진다.
우리는 시각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는다. 두 눈으로 보는 행위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자 생활을 통해 인간적 가치를 낼 수 있는 기본적인 요소일 것이다. 이런 시각의 기능을 잃었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자산 가운데 매우 중요하고도 큰 것의 상실을 의미한다. 장애인 중 가장 불편하고 힘든 장애인이 시각장애인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린 여럿이지만 결국 혼자일 뿐이야.”라는 영화 속 한 인물의 대사처럼, 눈먼 자들의 세상으로 전락한 사회는 인간을 파편화한다. 법과 제도 혹은 이성적 판단에 따라 운용되었던 체계적인 질서는, 눈먼 자들의 세계에서는 더는 통하지 않는다.
더는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으면서 수용소에서의 식량 배급도 사라지게 되었고, 식량이 줄어들자 어느 순간 힘을 통해 식량을 차지하는 집단이 생겨난다. 이제 눈먼 자들이 갇힌 수용소를 지배하는 시스템은 ‘폭력의 힘’이 되었다. 이같이 왜곡된 형태의 힘이 작동하는 사회를 온통 감싸는 정서는 ‘불안’이다.
보지 못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신체조차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경험은, 완성된 이성과 신체를 갖기 이전 유아기의 불안으로 이어지고, 이는 개인과 주체의 붕괴를 가져온다. 이는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근원 공포’에 대한 집단 무의식이다.
사실 우리가 영위하는 사회 시스템은 오랜 인류의 역사를 통해 구축되고 형성된 것이다. 어릴 적부터 우리는 이런 사회 시스템을 학습하고 길듦으로써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자리한다. 그러나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시각의 상실을 통해 이러한 인류 역사의 흐름에 입각한 사회적 위치와 이를 통한 사회적 개인으로서의 자아가 얼마나 유약한 것인지 드러나며, 그러한 혼란에 봉착했을 때 인간이 얼마나 불안과 공포에 따라 추하게 변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그리는 사회는 조금만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눈뜬 자들의 도시’와 하등 다를 게 없다. 맹목적으로(결국 이도 실명과 같은 의미이지만) 자본적 가치, 즉 ‘소유’에 대한 목적 의식적 사고의 틀 안에서 만인에 대한 쟁투의 상태에 빠진 인간들은, 눈뜬 자들인 동시에 ‘눈먼 자들’과 동일하다.
그렇다고 이런 사회에 대한 치유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실명의 전염이라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지옥도를 그리는 재난영화지만, 미국의 천재 심리학자 캔 윌버가 언급한 감각의 눈을 잃어버린 군상들이 ‘치료제’로서의 ‘관조의 눈’을 얻어 가는 과정을 우화적으로 그려냄다.
캔 윌버는 ‘봄(seeing)’이라는 시각적 행위에 있어 ‘눈(eye)’이라는 개념의 확장적 재해석을 통해 이 세계를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그 확장된 재해석의 구체적 틀은 ‘감각의 눈’과 ‘이성의 눈’, ‘관조의 눈’이며, 감각의 눈이 육체의 눈을 대변하고 있다면, 이성의 눈과 관조의 눈은 지적 영역과 초월 영역, 즉 심안(心眼)과 영안(靈眼)의 다른 이름이다. 특히, 윌버는 이 세계의 궁극적 진실을 발견하는 데 있어 관조의 눈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관조의 눈은, 영화 속에서 감각의 눈을 잃은 자들 가운데 자신들에게 처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일부 그룹의 살아남기 위한, 처절하지만 아름다운 연대와 협동, 이타(利他)의 행위들을 통해 획득된다.
관조의 눈을 획득하기까지 그룹을 이끄는 이는 유일하게 감각의 눈을 잃지 않은 의사 부인으로, 그는 곧 이 세계의 참상을 직시할 수 있는 증인이자 지도자다. 감각의 눈으로는 절대로 발견할 수 없는 세계의 본질적 비극을 시나브로 깨달아 가는 일부 그룹에 관조의 눈으로 터득되는 이 세계의 대안은, 최초 신이 인류에게 선물로 부여한 ‘이타적인 사랑’이다. 그 이타적 사랑의 능력은, 영화 후반부에 드라마틱한 에피소드로 제시되는데 바로 감각의 눈의 회복이다.
감각의 눈만이 전부인 사람들에게 감각의 눈의 상실은 극한의 공포일 뿐이다. 시각적 토대 위에 존재 의미를 부여받는 모든 문명의 이기들, 그리고 그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각종 체계와 질서들이 그 해석의 주체인 감각을 잃었을 때 오게 되는 혼란은 일견 성경에 묘사된 스올(Sheol)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감각의 눈은 그들에게 세계이고, 지식이며, 권력이다. 그들에게 실명은 세계의 부재이며 지식의 패퇴이자 권력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감각의 눈을 잃은 자들 속에서도 인간의 역사가 반복적으로 그래왔듯 약탈과 전쟁, 살인과 착취는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감각의 눈을 잃었으되 일군의 사람들이 관조의 눈을 얻어 가는 과정은, 선과 악의 그룹이 뚜렷이 구별되는 수용소 병동의 분위기의 차이만큼이나 명확하다. 그것은 <눈먼 자들의 도시>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이며, 곧 감각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 진정한 ‘봄’(Watching)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생텍쥐페리가 그의 소설 <어린왕자>에서 전언하듯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여기서 눈은 단연히 감각의 눈을 가리킬 터. 감각의 눈으로 걸러낼 수 없는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것, 단말마의 비명과도 같은 세계의 지옥도에서 구원을 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관조의 눈을 갖게 되면서 가능해진다. 관조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에서는, 더러워진 몸을 서로 닦아 주고 소박한 음식을 나누며 기꺼이 타인을 배려하는 행위들이 가능해진다.
다양하게 열려 있는 해석적 기반을 지닌 원작의 장점을, 평면적 이야기 전개에 의존해 단순화시켰다는 평에도 불구하고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는 긍정적 결말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칭찬받아 마땅하다. 온갖 종류의 비극과 고통이 점철된 이 세계에 대해 던져진 시선에 따스한 온기와 희망이 묻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봄직도 하다. 과연, 나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가, 라고.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전형진 원장
국립공주병원 전공의 수료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