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많은 어머님들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잘한 일’이라는 질문에 ‘사랑하는 자녀를 낳은 일’이라고 답합니다. 그런데 불과 몇 년 뒤, 사춘기에 접어든 자녀를 바라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꿀이 뚝뚝 떨어지던 눈에서 이제는 강력한 레이저가 발사됩니다. 부모 마음도 모르고 속을 팍팍 썩이는 자식들 때문에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입에서 절로 나옵니다. 물론 진심은 아니지만, 진심에 가까울 만큼 부모 노릇 하는 데 지쳤습니다. 더 절망스러운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부모 역할이 너무 고되다 보니 “죽어야 끝나나 봐요.”라고 푸념 섞인 체념의 말도 합니다.
세상 모든 부모들이 모든 걸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람, 내 모든 걸 걸고 지켜주고 싶은 사람, 바로 ‘내 자녀’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내 입에 들어가는 것보다 자식 입에 들어가는 게 더 좋고,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금이야 옥이야 정성을 다해 자식을 키웁니다. 그런데 몸과 마음을 바쳐 자녀에게 헌신하던 부모도 어느새 훌쩍 자라 더 이상 부모의 손길이 별로 필요하지 않게 된 자녀를 보며 문득 깨닫게 됩니다. 그동안 자신이 오로지 ‘부모로서의 삶’만 살아왔다는 것을 말이죠.
부모에게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번아웃 형태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1980년대부터 제기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한 연구는 학계에서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루뱅 가톨릭대학교 의학 및 건강심리학 교수인 모이자 미콜라이자크와 같은 대학의 발달심리학 교수인 이자벨 로스캄은 부모에게서 나타나는 번아웃의 원인과 증상을 밝히기 위해 공동으로 연구를 해 왔습니다. 그들은 부모 번아웃이란 스트레스가 연쇄적으로 잇따르는 상황에서 이를 처리할 시간이나 방법이 없는 경우에 주로 나타난다고 보았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부모 번아웃이 의심된다면 다음의 체크리스트 사항 중 해당하는 것이 있는지 한번 체크해 보시기 바랍니다. 체크된 항목이 많을수록 부모 번아웃을 의심해 볼 수 있습니다.
□ 완전히 지쳐서 몸과 마음이 녹초가 된 기분이다.
□ 부모 노릇을 하는 게 버겁고, 부모 역할이 조금도 기쁘지 않다.
□ 자녀와 정서적으로 거리를 둠으로써 자녀와의 관계에서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소모하려 한다.
□ 자녀의 이야기를 흘려듣거나, 자녀의 교육에 관심을 두지 않고, 애정 표현도 하지 않는다.
□ 과거의 자신과 현재 자신의 모습이 달라졌다고 인식한다.
□ 예전의 열정과 활력 있던 모습은 사라지고, 만성피로에 시달리고 있다.
□ 개인적으로도 부모로서도 자신이 원했던 모습이 아님을 깨닫고, 우울감과 수치심을 느낀다.
부모 번아웃을 진단할 때 무엇보다 주의해야 할 점은, 항상 피곤해하고 활력이 없던 부모, 원래부터 자녀들에게 무관심하고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한 적이 없던 부모들은 번아웃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모 번아웃으로 진단하기 위해서는 번아웃 이전과 이후를 비교했을 때 명확한 차이가 드러나야 합니다.
현대의 부모들은 왜 이런 부모 번아웃을 앓게 된 걸까요? 부모 번아웃을 일으키는 이유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며, 눈에 보이는 몇 가지 이유만으로 설명될 만큼 단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부모 번아웃을 일으키는 여러 위험 요인(스트레스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한데요, 연구에 따르면 가장 주요한 세 가지 위험 요인으로 개인적 요인, 교육적 요인, 가정적 요인이 있다고 합니다.
① 개인적 위험 요인 – 부모의 낮은 정서적 유능성, 과거 부모와 맺은 불안정한 애착 관계, 완벽주의, 예민한 성격 등
② 교육적 위험 요인 – 부모의 비일관성, 강압성, 점진적 분노 표출(부모와 자녀의 힘겨루기) 등
③ 가정적 위험 요인 – 공동의 부모 역할 불만족, 부부 관계의 불만족, 안정적 루틴의 결여 등
④ 그 밖의 위험 요인 – 필요한 경우, 외부 지원이나 도움 서비스 등 사회적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
과거 농경사회에서 부모들은 양육해야 할 자녀들의 수가 지금보다 월등히 많았습니다. 대신에 현대사회의 부모들처럼 먹는 것 하나부터, 교육과 체험, 놀이나 정서적 케어와 교감, 학교생활이나 교우 관계 등 다방면에 걸쳐 세세한 것 하나까지 자녀 양육을 위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좋은 부모’의 조건이 넘쳐 나고 상당히 까다로워진 현대 부모의 역할에 반해, 가정은 사회 집단에서 좀 더 고립되고, 이웃에게 양육과 관련된 도움을 요청하기란 어려워졌습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무색해질 만큼 만능 부모의 역할이 오롯이 부모에게만 지워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게다가 현대의 부모들은 맞벌이나 자아실현에 대한 개인의 욕구와 사회적 기대의 부담을 동시에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모 번아웃,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부모 번아웃의 위험 요인을 상쇄해 주는 것이 바로 보호 요인(내적·외적 자원)입니다. 가능한 이 보호 요인을 늘려서 위험 요인과 어느 정도 안정된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할까요?
▪ 1단계: 부모 역할의 균형을 무너뜨린 원인 파악하기
현재의 위험 요인과 보호 요인을 명확히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해 제거하거나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위험 요인은 무엇이고, 보충하거나 강화할 수 있는 보호 요인은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분석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모 역할과 관련된 보호 요인을 찾아보고 집중하는 것은 번아웃을 극복하는 데 있어 희망의 신호탄이 될 수 있습니다.
▪ 2단계: 자기 돌보기
만약 번아웃으로 인해 에너지 저하가 나타나고, 부정적이거나 조급한 태도, 짜증이 늘어나는 전조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다면, 그때가 스스로를 돌보며 내면에 축적된 긴장을 풀어야 할 때입니다. 긴장을 풀거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므로 각자에게 맞는 방식을 선택하면 됩니다. 짧은 휴가를 자주 떠나는 것도 번아웃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네요.
번아웃을 예방하거나 극복할 때 정서적 유능성은 큰 힘이 됩니다. 여기서 정서적 유능성이란,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잘 알아차리고 잘 이해하며, 잘 표현하고 관리할 줄 아는 능력을 뜻합니다. 이러한 정서적 유능성은 얼마든지 노력으로 키울 수 있습니다. 연구 결과, 정서적 유능성이 높을수록 스트레스에 저항력이 증가했습니다. 물론 이 저항력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다른 요인들과 균형을 맞춰야 합니다.
▪ 3단계: 부부가 함께 대처하기
부모 번아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내적 자원만으로는 어려우며, 부부 관계에서 비롯되는 외적 자원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부부의 스트레스 수준이 높을 때 부부 관계의 만족도는 낮아지는 반면, 부부 사이가 좋으면 스트레스는 줄어듭니다. 따라서 아무리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조차 부부의 관계를 좋게 유지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또 부부가 협력적 육아를 통해 자녀의 교육과 발달을 둘러싼 일들을 부모가 함께 책임지고 담당하며, 육아로 인한 대립을 해결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협력적 육아를 해 나가는 데 있어 유용한 팁은 솔직하게 서로의 의견을 나누며 의논해 나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부 각자의 교육관, 가사 분담, 가족 간 원활한 상호작용을 위해 해야 할 일 등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서로의 격차를 좁히며 합의점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 4단계: 자녀와의 관계 개선하기
부모의 긍정적인 행동을 통해 자녀의 긍정적 행동을 불러옴으로써 악화된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개선하고, 좋게 유지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자녀와의 관계가 좋지 않을 때 부모 번아웃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자녀와의 긴장 관계는 자녀뿐만 아니라 부모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인 것이죠. 따라서 어떻게 하면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선순환을 이룰 수 있을지 면밀히 검토하고, 기존의 부모 역할을 새롭게 설정하도록 합니다. 이때 부모 자신의 자아상을 확인해 보는데, 만약 부모 자아상이 부정적이라면 긍정적인 자아상과 부모로서의 유능감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녀와 함께했던 긍정적인 경험이나 즐거운 기억들을 꾸준히 떠올리거나 기록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주변 사람들, 특히 배우자나 자녀로부터 부모 역할과 관련해 긍정적 피드백을 요청할 수도 있고요.
무엇보다 자녀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따뜻한 부모, 든든한 안전 기지가 되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녀에게 안전 기지가 되어 주려면 부모는 정서적 여유와 감수성, 관대함을 장착하고, 빈번한 애정 표현을 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자녀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행복감과 기쁨을 공유하는 것도 부모 번아웃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자기와 함께하는 시간을 정말로 좋아하는지 그런 척하는 건지 직감적으로 알아차립니다. 때문에 부모도 즐겁고 자녀도 좋아할 만한 활동을 꾸준히 함께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부모도 처음부터 부모는 아니었습니다. 세 살 아이의 부모도 열 살 아이의 부모도 처음이고, 열다섯 살, 스무 살 자녀의 부모도 모두 처음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한때 부모님의 어린 자녀였습니다. 그러기에 부모가 되어 본 적이 없는 자녀는 부모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없지만, 부모는 조금만 동심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면 자녀의 마음을 십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부모 역할을 여전히 어렵기만 하고, 하루가 다르게 변덕을 부리는 자녀에게 어떻게 하면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지 늘 고민입니다. 허나 그 진지한 고민만으로도 여러분은 이미 충분히 좋은 부모입니다.
지구를 구하는 슈퍼 영웅은 희어로 물에서나 볼 수 있듯, 모든 것이 완벽한 만능 부모란 육아서에나 존재합니다. 부모로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솔직하게 인정하는 부모가, 부족하다고 자책하거나 완벽한 척하는 부모보다 훨씬 더 자녀에게 귀감이 되지 않을까요. 부모 번아웃, 이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예전처럼 다시, 자녀를 향하는 눈길에 사랑의 콩깍지가 씌워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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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김미정 역(2022). 부모 번아웃. 심심.
서대문봄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이호선 원장
한양대병원 외래교수, 한양대구리병원 임상강사
(전)성안드레아병원 진료과장, 구리시 치매안심센터 자문의, 저서 <가족의 심리학>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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