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늑대 한 마리가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맛있는 먹이를 잔뜩 먹어 배가 부르고 기분도 좋았습니다. 한참 가다 보니 길 위에 뭔가 쓰러져 있는 게 보였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양이었습니다. 양 한 마리가 기절한 채 길에 누워 있었습니다. 멀찍이서 자신을 보고 겁을 집어먹어 쓰러진 것 같았습니다. 자기를 잡아먹으려고 다가오는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이것 참, 나는 너를 잡아먹을 생각이 없단다. 겁내지 말고 어서 일어나거라. 괜찮아.”
양은 늑대의 말을 듣고 천천히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경계를 늦출 수는 없었습니다.
“못 믿는 모양인데…… 나에게 세 가지 참된 말을 하면 정말 안전하게 그냥 보내주마.”
“정말요? 세 가지 참된 말을 하면 진짜 해치지 않고 그냥 보내주실 건가요?”
늑대는 그렇다고 재차 다짐했습니다. 양은 자세를 가다듬고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습니다.
“첫 번째는 제가 어디를 가더라도 늑대를 아예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음, 그럴 수 있지. 너로서는 그 말이 참된 말이지.”
“두 번째는 만약 어쩔 수 없이 늑대를 만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늑대가 눈이 먼 늑대였으면 좋겠어요. 저를 보지 못한다면 해칠 수가 없을 테니 저는 위험하지 않을 거예요.”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그 말 역시 참된 말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양들은 늑대들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는데, 늑대들은 저희만 보면 공격하고 잡아먹기 일쑤예요. 그러니까 늑대는 천성이 악한 동물이라고 할 수 있죠. 이렇게 나쁜 늑대들이 저희를 해치지 못하도록 모조리 비참하게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요.”
말을 마친 양은 늑대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너무 솔직하게 진실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내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니 대단해. 너의 말이 모두 참된 말이라는 걸 인정한다.”
늑대는 약속한 대로 양을 무사히 보내주었습니다. 양은 안전하게 숲속으로 돌아갔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일입니다. 교실에서 한 아이가 돈을 잃어버렸습니다. 찾다 찾다 없으니까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담임선생님이 교실을 아무리 둘러봐도 돈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주웠다는 아이도 없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은 반 아이들을 책상 위에 올라가도록 했습니다. 눈을 감은 채 무릎 꿇고 앉게 했죠. 절대 눈을 떠서는 안 된다고 단단히 일러두었습니다.
“자, 다들 눈을 꼭 감았으니까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 오직 선생님만 볼 거야. 돈을 가져간 사람은 조용히 손을 들어 봐. 진실을 고백하면 야단치지 않고 없었던 일로 해 줄게.”
분위기는 숙연했습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죠. 누가 손을 들었는지, 손을 들었다면 그게 누구인지, 아니면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는지 궁금했지만, 눈을 감고 있어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이 손을 내리라고 하지 않는 걸로 봐서 손을 든 아이가 없었나 봅니다.
“순간의 실수로 돈을 가져갔더라도 금방 뉘우치고 솔직하게 진실을 말하면 얼마든지 용서해 줄 수 있어. 누구나 크고 작은 실수는 하는 거니까. 자, 용기를 내서 손을 들도록 해.”
몇 번 더 타이르고 채근하던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그만 눈을 뜨고 책상 아래로 내려앉으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돈을 잃어버린 아이와 반장을 불러 교무실로 갔습니다. 이후 일이 어떻게 결말지어졌는지는 모릅니다. 정말 손을 든 아이가 있어서 돈을 주고받은 뒤 훈계를 하고 일이 무마되었는지, 손을 든 아이가 없어서 분실된 것으로 처리하고 담임선생님이 돈을 잃어버린 아이 부모님께 연락해서 마무리를 지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그때 책상 위에서 무릎 꿇고 눈을 감은 채 시간이 흘러가자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은 왜 아이들 가운데 누군가 돈을 훔쳐 갔으리라고 생각하시는 거지? 만약 선생님 짐작이 맞는다면 그 아이가 정말 손을 들까? 손을 들면 선생님은 진짜로 용서해 주실까?’
얼마 전 진료실에서 만난 한 젊은 여성은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아하는 남자가 있어요. 정말로 저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에요. 저도 그 남자가 좋고요. 그런데 아무래도 헤어져야 할 것 같아요. 더는 진실을 감춘 채 계속 만날 수가 없어요.”
그녀는 남자친구에게 자기 자신과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거짓으로 꾸며서 말했다고 했습니다. 진실 그대로 이야기하면 자신을 만나 주지 않을 것 같아서였답니다. 전문대를 나왔으면서도 서울 명문대를 졸업했다고 했고,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작은아버지 집에서 자랐으면서도 부모님이 살아 계시는 건 물론 유망 중소기업을 경영하고 있다고 했으며, 남동생이 장애인이라 보호시설인 재활원에 입소해 있는데도 미국 유학을 떠났다고 했다는 겁니다.
난감했습니다. 워낙 여러 가지를 속였기 때문입니다. 남자친구가 그녀의 학벌과 부모님의 직업과 남동생의 미국 유학 사실에 감동해서 그녀와 사귄 건 아니겠지만, 이 모두를 속여 왔다는 사실을 알면 큰 배신감을 느낄 게 뻔했습니다. 이해하고 용서한 뒤 만남을 이어 간다 해도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실망감은 어쩔 수 없을 겁니다.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은 세 가지였습니다. 계속 속여 가면서 연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 다른 이유를 대고 이별을 선언하는 것, 모든 진실을 솔직히 털어놓는 것입니다. 어느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계속 속여 가면서 연인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습니다. 남자친구의 인격을 무시하고 기만하는 일이니까요. 뜬금없이 이별을 선언하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남자친구가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요. 있는 그대로 진실을 말하는 게 최선일 듯합니다. 숨김없이 다 밝히는 겁니다. 헤어지더라도 그런 다음 헤어져야 뒤탈이 없습니다. 남자친구가 다 용서하고 받아 준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것까지 미리 기대하는 건 욕심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거짓의 바탕 위에 이루어진 사랑이었지만, 스스로 진실의 저울 위에 올라갔을 때 남자친구가 감당해야 할 맞은편 저울의 기울기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확실한 건 그녀가 진실의 시간 앞에 당당하게 직면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은 뭐고, 진실은 뭘까요?
사실(事實, Fact)은 실제로 이루어진 일이나 일어난 일을 말합니다. 아무런 가치 판단이나 해석 없이 있었던 일 그대로를 가리키는 것이죠. 진실(眞實, Truth)은 약간 다릅니다. 검증 가능한 객관적 사실에 근거를 두지만, 이에 관한 판단과 해석이 따릅니다. 거짓이나 왜곡, 은폐나 착오를 모두 배제했을 때 온전히 밝혀지는 바가 진실입니다. 사실 자체만을 진실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예를 들면, 비행기가 추락하거나 배가 침몰했을 때, 육하원칙에 기초해서 추락과 침몰에 관한 모든 객관적 사항을 조사하고, 동원 가능한 과학기술을 활용해 원인을 밝혀낸다면 사실은 잘 드러날 겁니다. 그러나 왜 그런 사고가 일어났는지, 미리 이런 사고를 막을 수는 없었는지, 누구의 책임이 가장 큰지, 배후 세력이나 음모 등은 없었는지를 명확히 밝혀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게 다 밝혀지는 게 바로 진실입니다.
법은 사실에 주목합니다. 정확한 사실에 근거해서 법을 적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사실도 중요하지만, 진실이 더 중요합니다. 사실이 다 밝혀졌어도 진실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면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고 이런저런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언론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게 표절 문제입니다. 논문 표절이나 문학 작품 표절 또는 미술이나 음악 작품 표절 시비가 그것입니다. 사실을 드러내는 일도 어렵지만, 진실을 밝히는 일은 더 어렵습니다. 과학적으로 작품을 비교 분석하고 정밀히 대조해서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는지를 찾아낼 수는 있으나 학자나 작가가 이를 부인하면서 우연의 일치일 뿐 자기 논문과 작품은 순수 창작물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면 진실은 드러날 수가 없습니다.
몇 년 전 한 유명 작가의 소설에 관해 표절 시비가 있었습니다. 어떤 문학평론가가 원래 작품과 표절 작품을 비교하며 이를 고발한 겁니다. 얼마 후 작가는 이렇게 해명했습니다.
“독자들께 미안하고 마음이 아픕니다. 풍파를 함께해 왔듯이 나를 믿어주시길 바랄 뿐이고,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이런 일은 작가에게 상처만 남는 일이라 대응하지 않겠습니다.”
출판사 역시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두 작품의 유사성은 전체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다. 몇몇 유사성을 근거로 표절을 운운하는 건 문제가 있다.”
문단과 독자들을 분노하게 한 건 표절 여부보다 이 문제에 대한 작가와 출판사의 태도였습니다. 진실은 말하지 않으면서 믿어달라는 건 설득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사성의 비중이 문제가 아니라 표절을 했느냐 안 했느냐가 핵심인데, 가장 중요한 진실은 교묘하게 피해 간 겁니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고 어쩌면 그동안 쌓아 온 모든 것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음에도 진실을 밝히는 건 어지간한 용기가 있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모두 진실을 은폐하며 아니라고 할 때 진실대로 그렇다고 말하는 것, 모두 거짓으로 그렇다고 할 때 진실에 따라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진실의 힘은 의외로 강하고 셉니다. 용기 있게 진실을 당당히 마주했을 때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실의 힘입니다. 위기 상황에서 진실은 빛을 발합니다. 거짓 없는 참된 말은 가치가 있습니다. 무게가 있습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과 처지에 따라 제각각 다른 진실을 말한다 해도 분명한 진실은 하나입니다. 진실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실의 후보로 존재하는 것은 여러 개 있을 수 있지만, 엄밀한 의미의 진실은 하나밖에 없는 겁니다.
늑대와 양이 마주쳤습니다. 양은 죽은 목숨입니다. 양이 여우처럼 꾀를 내거나 말처럼 빨리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얼마나 무서웠으면 기절을 했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고, 호랑이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삽니다. 늑대가 세 가지 참된 말을 하면 돌려보내 주겠다고 했을 때 양은 용기를 내서 진실을 말했습니다. 만약 여우처럼 꾀를 내서 늑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적당히 거짓말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늑대의 밥이 되었을 겁니다. 늑대가 배가 부르기는 하지만, 죽여서 끌고 가 내일 먹으면 되니까요.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늑대를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늑대가 눈이 멀었으면 좋겠다, 늑대가 모조리 비참하게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건 대단한 용기입니다. 늑대가 들어도 이 모든 말은 진실이었습니다. 늑대가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진실한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평온하다.”
영국이 낳은 위대한 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한 말입니다. 거짓과 더불어 사는 사람이 강해 보일 수는 있지만, 정말 강한 사람은 진실과 더불어 사는 사람입니다. 거짓과 친구가 된 사람의 마음은 항상 불안하지만, 진실과 친구가 된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평온합니다.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최강록 원장
(전)의료법인 삼정의료재단 삼정병원 대표원장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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