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평범하다면 평범한 20대 초반 대학생입니다. 친구들은 저에게 엄청 열심히 산다고 말합니다. 한 친구는 저에게 다음 생에는 너처럼 살아 보고 싶다고 얘기한 적도 있을 만큼 나름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왔습니다.

대학도 누구나 다 아는 대학에 입학하여 잘 다니고 있고, 최근에는 작은 스타트업 회사 인턴까지 하며 스펙을 쌓으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리고 연애까지 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저에게 우울감과 무기력함이 찾아왔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하게 저도 잘 모르겠네요.

벼락치기를 싫어하고 계획대로 미리 일을 처리하던 제가 점점 미루게 되었습니다.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머릿속으로 계획은 다 세워 두지만 몸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일어났다가 그냥 주저앉아버리기도 합니다. 물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건 제가 용납할 수 없어 다 해내긴 하지만, 미룬 시간 만큼 밤늦게까지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 벼락치기를 합니다.

그렇다고 쉽사리 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휴학이라도 하려고 생각해보니, 다른 사람보다 뒤쳐지는 것 같아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무언가 열심히 해야 하며, 결과도 좋아야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무리하여 인턴을 준비하고 회사를 다녔습니더. 가만히 있는 게 불안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본가가 지방입니다. 자취를 허락해주시지 않는 부모님이라 휴학을 하면 본가에서 지내야 합니다. 저희 집은 통제를 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집으로 내려가면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갈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힘들다가 괜찮다가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6개월 사이에 상태가 심해진 것 같습니다.

다음 저의 큰 고민은 연애에 대한 태도입니다. 저는 동갑 남자친구를 만나고 있습니다. 예상하셨겠지만 저는 곰신(고무신)입니다. 요즘 연락에 대해서 고민입니다. 남자친구는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휴대폰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저런 일들을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연락할 수 있는 시간은 최대 2시간입니다. 저는 이 시간이 너무 아쉽고 짧고 최대한 활용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군대라는게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라는 거 저도 이해합니다. 연락하다 갑자기 불려 가는 것도, 일이 길어져 연락이 안 되는 것도 다 이해하지만 마음은 점점 힘이 듭니다. 제가 많이 지쳐 있고 여유가 없기에 요즘 들어 더 힘든 거 같기도 합니다.

언제 올지 몰라 그 시간에는 휴대폰만 바라보며 연락을 기다립니다. 다른 일이 손에 잘 잡히지도 않고요. 그러다 보니 제 일을 미루는 건 너무 당연시되어버렸습니다.

제 일을 미루고 마음은 조마조마하다 보니 제가 너무 연락에 집착하는 것 같아 혼란스럽습니다. 저는 남자친구의 입대 이후로 연락으로 사랑을 확인했습니다. 저에게 연락을 해주려는 노력을 보며 사랑받고 있구나를 느껴 왔으니까요. 그래서 연락만을 기다리게 된 것 아닐까 조심스럽게 혼자 생각한 결론입니다. 제 일을 못하며 이렇게까지 되어 버린 상황과 제 자신이 밉고 한심합니다.

저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제 생활을 지켜가야 할까요?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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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글 잘 읽어 봤습니다. 사연자님이 살아온 삶처럼 사연글도 정말 꼼꼼하고 성실하게, 열심히 적어 주셨네요. 가만히 있는 게 불안함을 자극한다는 말씀이 인상이 남습니다. 묵묵히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고,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리는 삶을 살아오신 것 같습니다. 지금의 일상은 아마 사연자님에게 낯선 경험일 것입니다. 계획한 대로 생활이 통제되지 않고, 감정도 잘 조절되지 않고요.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극복하고 싶다’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제일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현재 사연자님이 느끼는 우울과 무기력은‘극복할 감정들’이 아니라 먼저 ‘수용해야 할 감정’이라는 것입니다. 늘 계획적으로 열심히 생활해 온 사연자님은 어느 순간 에너지가 방전되어 많이 지쳐 있는 상황입니다. 그동안 사연자님에게 익숙하고,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한 자아상은 ‘열심히 사는 나’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최근 현실은 열심히 계획대로 못 살고 있습니다. 일을 미루고 비효율적으로 일상을 보내고 우울하고 힘없는 나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사연자님 모습이 마음에 안 들고 거부감이 들 겁니다. 문제라고 생각하고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도 일어날 겁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공감하고 이해하는 작업을 생략하고, ‘빨리’ 극복하고 싶어합니다.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머무르거나, 진심으로 공감해주거나, 잠시 주저앉아 쉴 수 있는 여유조차 주지 않지요. 그렇게 부정적인 정서 경험들은 표면적으로는 ‘인생에서 해결해야 할 목표’로서 취급되면서 우리 삶에서 ‘소외’되고, 더욱 금기시됩니다. 

 

인지행동치료의 새로운 동향인 수용전념치료(ACT) 접근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경험 회피’라고 말합니다. 수용전념치료는 우리가 겪는 많은 증상이나 부적응적 행동이 생각, 감정과 같은 사적 경험을 피하거나 억제하려는 시도에서 생긴다는 관점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고통이라는 경험의 회피는 마치 늪처럼, 빠져나오려고 강하게 저항하고 발버둥 칠수록 더욱 빠져드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그래서 사연자님께는 우울과 무기력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처럼 보지 않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관점은 단순합니다. 경험을 회피하지 않는 태도, 즉 현재 상황을 ‘기꺼이 경험하기’입니다. 사연자님께서 그동안 우울하거나 무기력을 기꺼이 경험할 여유조차 없었던 것 같습니다. 워낙 열심히 바쁘게 해야 할 일들을 완수하는 데 온 에너지를 집중하셨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가만히 있으면 불안할 지경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얼마나 스스로에게 허용해주지 않았으면 가만히 있는 상황이 낯설겠습니까.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을 두고 ‘타인보다 뒤쳐질 수 있는 사람’, ‘성실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해석을 무의식적으로 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열심히 하는 나를 더욱 몰아세우게 되어서 결국 에너지가 방전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열심히, 성실히 사는 것은 굉장한 능력이고 강점입니다. 이걸 변화시키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만 열심히 살지 못할 때, 내 계획과 통제대로 되지 않는 순간을 만날 때, 그런 내 모습을 못마땅하게 보거나 미워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기꺼이 새롭게 만나는 자신의 모습으로 인정해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사연자님이 오랫동안 구축한 정체성이 있겠지만, 그 모습이 사연자님 모습의 전부가 아닙니다. 앞으로도 ‘대체로 열심히 하지만, 힘들 땐 열심히 하지 않고 일을 엄청 미루고 지독히 게으른 사연자님’을 만날 겁니다. 통제하고 계획하는 게 편하고 익숙한 사연자님이지만, 앞으로 ‘어느 순간엔 지쳐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 식으로 또 파업할 수 있는 사연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모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괜찮습니다. 우울과 무기력 자체는 핵심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단 사연자님이 자기 감정을 잘 알아차리고 있고, 감정의 출처도 이해하고 있으며, 일상생활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는 건강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상 생활이 무너질 수준의 우울과 무기력이라면 약물치료와 심리치료가 필요하겠지만, 그러한 상태로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부정적인 정서를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고, 자기 자신에게 보다 수용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만으로도 일상이 좀 더 나아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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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예전처럼 효율적으로 열심히 사는 일상을 되찾아야 한다고 조급해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예전 익숙한 방식으로 일상을 살기엔 지금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지지적인 관계인 남자친구와 소통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외로움과 우울, 불안, 서운함 등 부정적인 정서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즉, 고통감을 해소할 소통 채널이 지금 부재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지금 사연자님에겐 과업이 많습니다. 해야 하는 의무, 목표, 계획이 많다는 것입니다. 에너지가 충전될 기회보다 소진될 기회가 훨씬 더 많은 환경입니다. 우울하고 무기력해지는 것이 참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닐까요.

사연자님께서 자기 일을 못하며 남자친구의 연락에 집착하게 되는 깊은 속사정이 있으실 겁니다. 스스로 충분히 수용해 주셨나요? 기꺼이 경험하기는 감정을 편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읽어 주는 일입니다.

‘아, 내가 사랑을 확인하고 안도하고, 그에게서 위로받고 싶은 욕구가 최근에 많이         커졌구나.’

‘우리 관계에서 오는 불안을 혼자 감당하기 지쳐서 이를 남자친구와 분담하고 싶구나. 그런데 그러지 못해서 정말 답답하고 힘든 마음이 들고, 이는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네.’

이렇게 먼저 수용해보는 습관을 만들어보면 좋겠습니다. 할 일을 미루고 연락에 집착하는 사연자님을 미워하고 한심하게 여기면, 지금 상황이 더 싫어지고 외로워질 뿐입니다. 연락에 대해 어떻게 의미 부여하고 있는지,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남자친구와 진솔하게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비록 비효율적으로 일하고 미룰지언정, 책임감을 가지고 일을 마무리하는 모습은 높게 점수를 주셨으면 합니다. 당연한 일이 아니라 그렇게 하시는 것도 대단한 겁니다. 또한 계획을 세울 때는 현재 에너지 수준을 바탕으로 세운 것인지, 무리가 되는 계획은 아닌지 냉철하게 판단하시고, 언제나 유연하게 계획을 조정하세요. 예전 같은 속도로 빠르게 달릴 수 없는 지금의 자신을 인정해주세요. 천천히 걷고 중간에 쉬었다가 조금씩 걷는 지금의 속도가 사연자님에겐 최선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휴식에 대해서만큼은 자격과 조건을 논하지 않고, 그저 쉬는 시간을 충분히 허락하셨으면 합니다. 가치있고 의미 있게 쉬려고 너무 노력하지 마시고, 흥청망청 의미 없게 충동적, 무계획적으로 쉬어 보세요. 시간을 마음껏 낭비할 자유를 자신에게 허락하셨으면 합니다. 그래도 정말로 괜찮습니다. 어떤 경험이든 충분히 찾아올 만한 타당한 경험이라고 인정해주고 기꺼이 끌어안으십시오.

진심으로 응원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기꺼이 경험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한 구절들을 나누며 답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기꺼이 경험하기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 가냘픈 꽃을 손에 쥐듯이 고통을 쥐는 것

- 우는 아이를 끌어안듯 고통을 끌어안는 것

- 중병에 걸린 사람과 함께 앉아 있듯 고통과 함께 앉아 있는 것

- 훌륭한 그림을 바라보듯이 고통을 바라보는 것

- 흐느껴 우는 아이를 데리고 걷듯이 고통과 함께 걸어가는 것

- 친구의 말을 경청함으로써 그를 예우하듯이 고통을 예우하는 것

- 깊은 숨을 들이쉬듯이 고통을 들이쉬는 것 

- 집으로 돌아가려고 무기를 내려놓는 병사처럼 고통과의 싸움을 내려놓는 것

- 깨끗한 물 한 잔을 마시듯이 고통을 마시는 것

- 지갑에 사진을 넣어 가지고 다니듯이 고통을 지니고 다니는 것

 

[참고] 『마음에서 빠져나와 삶 속으로 들어가라 (수용전념치료)』 학지사.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한양대병원 외래교수, 한양대구리병원 임상강사
(전)성안드레아병원 진료과장, 구리시 치매안심센터 자문의, 저서 <가족의 심리학>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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