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서대문 봄 정신과, 이호선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올해 수능을 보는 수험생입니다.

돌이켜보면 초등학교 끝나갈 무렵부터 증상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사람의 살과 접촉을 하는 게 점점 불편해집니다. 뜨겁고 말랑말랑하고 어쩔 때는 축축하기도 한 게 너무 징그럽게 느껴집니다.

사람 때문에 생긴 건가 싶기도 했지만 전 유치원 때부터 쭉 은따였기 때문에 사람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작년 즈음에는 좀 나아져서 부모님께도 요즘에 뭔가 사람을 만지는 게 꺼려진다. 그런데 또 남이 나를 만지면 그렇게 불쾌하진 않다 이런 식으로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그게 사춘기라 그런 거라며 자신도 어릴 때 그랬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전 너무 걱정이 됩니다. 자퇴하고 나서 좀 나아지는가 싶더니 지금은 예전보다 더 안 좋아진 것 같습니다. 이제는 미디어에서 애정행각을 하는 모습을 보고 살이 닿는 촉감이 상상되어 불쾌해집니다. 친구는 결벽증이라고도 하는데 사춘기가 지나면 어머니 말대로 나아질까요?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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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신체 접촉과 관련된 불편감에 대해 고민 글을 남겨주셨네요.

미디어에서 스킨십하는 장면을 보고 촉감이 ‘상상되면’ 불쾌해진다고 하신 내용,

그리고 누군가가 사연자님을 만지면 그렇게 불쾌하진 않다고 하신 내용을 적어주셨는데요. 현재 어떤 부분이 구체적으로 걱정이 드는지 궁금했습니다.

정작 누군가와 신체 접촉을 했을 때 상상했던 것보다는 덜 불쾌하고 덜 징그럽게 느껴진다면, 크게 문제 될 일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상상했다’는 부분인데요.

사연자님께서 신체 접촉하는 상황에 내내 놓여있는 것이 아닌데도, 이를 너무 걱정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스킨십의 징그러움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 ‘계속해서 떠오르는’ 상황이신가요? 특정 생각과 상황이 의도치 않게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것을 ‘침습적인 사고’ 또는 ‘침투 사고’라고 합니다. 누구에게나 침투 사고는 쉽게 일어납니다. 아침에 들은 노래가 계속 귓가에 맴도는 경우가 대표적이고요. 실수한 일이 있다면, 곱씹으면서 잊지 못하고 계속 떠올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더 생각하지 말아야지’ 마음먹어도, 어느 순간 다시 그 생각을 곱씹고 있는 경우가 일상에 정말 많습니다. 그런데 침투 사고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각하면 안 된다’는 억제적인 기법은 오히려 효과가 없습니다. 사연자님은 ‘사고 억제의 역설적 효과(Ironic process theory’에 대해서 들어보셨을까요?

‘사고 억제의 역설적 효과(Ironic process theory’는 하버드 대학교의 사회심리학자 다니엘 웨그너(Daniel Wegner)가 주장한 이론입니다. 특정 생각이나 욕구를 억누르려 할수록 그것이 더욱 떠오르기 쉽게 된다는 내용인데요. 다니엘 웨그너가 1987년 실시한 실험을 소개합니다.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눠 실험했습니다. 학생 A그룹에게는 백곰을 생각하라 지시했고, 학생 B그룹에게는 백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그 그룹들은 백곰이 떠오를 때마다 종을 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실험 결과, 종을 친 횟수가 많은 그룹은 백곰을 생각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은 B그룹이었습니다. 이 현상을 심리학계에서는 백곰 효과라고 부릅니다. 어쨌든 침투 사고는 아주 흔하게 경험할 수 있고,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진 않습니다. 우리가 치료가 필요한 문제라고 판단하는 중요한 단서는, ‘이 사람이 현재 기능을 잘 유지하는가?’입니다.

치료적인 개입이 필요할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려면, 인지적인 영역이나 사회적, 대인관계적 기능에 손상이 생깁니다. 사연자님께서는 현재 일상을 잘 보내고 있으신가요? 그 부분이 가장 중요합니다. 스킨십과 접촉에 대한 걱정 때문에 수험 공부에 지장이 있거나,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는지 궁금하고요. 현재 말씀한 불편감 때문에 자신이나 타인에게 어떠한 손해가 발생하고 있는지를 잘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 만일 일상생활을 제대로 못할 정도로 걱정이 심화되면, 전문가와 상담을 해보셔도 좋겠습니다. 일상 유지가 잘 되고 있다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부모님이나 친구는 사춘기나, 결벽증의 가능성을 해주셨는데요. 사연자님과 충분히 대화해보지 못하고 확실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결벽증은 청결과 오염에 대한 강박적인 사고와 이를 해소하기 위한 강박적 행동이 이어지는 것인데요. 정확히는 강박 장애의 증상 중 하나입니다. 글에서는 사연자님이 청결과 오염에 대한 염려와 강박 행동이 드러나 있지 않아, 결벽증에 대해서는 말씀드리긴 조심스럽습니다. 다만 지금의 불편감은 충분히 나아질 수 있는 문제 영역이라는 점은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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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사연자님을 치료장면에서 만난다면 두 가지 방향을 언급할 수 있겠습니다.

 

첫 번째는 침투 사고가 사연자님의 핵심 문제인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는 침투 사고의 구체적인 내용을 점검하고, 파국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장 두려워하는지도 탐색합니다. 사고의 흐름을 시각화하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침투 사고를 시각화하고,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알아차림 훈련과 ‘주의 전환’ 그리고 필요하다면 약물치료를 통해 침투 사고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접촉하는 불편감의 감정의 실체가 ‘불안’ 일 경우입니다. 그리고 이 불안감은 단순히 스킨십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수험생활의 환경요인, 개인적 경험 요인이 모여 만들어낸, 오랜 역사를 가진 감정일 수 있습니다.

사연자님의 개인사가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지만, 대인관계에서 소외된 은따 경험도 있고, 어떤 연유에선지 자퇴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현재 수험생활 중이고요. 사연자님과 면담해보지 않아, 아직은 가설에 불과하지만 ‘오래된 스트레스 요인’이 누적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보통 스트레스 상황에서 발생하는 감정들을 제때 잘 정리하고 해소하지 못하면, 이를 처리하기 위해 무의식적인 방어기제를 만들어냅니다. 감정을 억누르거나, 다른 관심사에 몰두함으로써 스트레스와 거리를 두는 식으로 말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사연자님이 신체 접촉과 관련된 주제에 몰두해오신 것 같은데요. 신체 접촉은 눈에도 보이고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구체적인 주제입니다. 하지만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생각은 워낙 빠르게 스치기 때문에 주목하기 쉽지 않고 추상적인 주제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대부분 알기 쉬운 구체적인 주제에 집중하고 걱정하면서, 정말 해결해야 하는 마음의 문제로부터 거리를 두고 회피하는 전략을 택합니다. 이는 보통 무의식적이기 때문에 알아차리긴 어렵습니다.

사연자님께 스킨십보다 더 중요하게 다루고 해결해야 하는 스트레스나 상처가 있을지도 몰라서 가능성을 말씀드렸습니다. 아니라면 침투 사고와 관련된 내용을 중점으로 치료에서 다루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어쨌든 고민하는 문제에 대해 혼자서 결론 내리지 않고, 가족과 친구에게 솔직하게 말씀을 하신 것은 정말 잘하셨습니다. 이곳에도 글을 남겨주셨고요. 사연자님은 자신의 어려움을 다루기 위해 대인관계 자원을 활용하는 건강한 모습도 갖추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솔직하게 개방하는 것으로도 문제 해결의 절반까지 온 것입니다. 사연자님의 고민에 대해 여러 가능성을 말씀드렸으니 이제부터는 사연자님이 선택하셔야 합니다. 지금 고민을 해결해야 하는지, 아니면 잠시 해결을 미뤄두어야 하는지요. 이를 위해서 스스로에게 던져보셔야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나에게 중요한 일들의 순위는 어떻게 되는가?’입니다.

 

아까 증상의 심각도를 평가하려면 현재 일상에서 기능이 잘 유지되는지를 봐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와 연결되는 질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들부터 처리하는 것이 효율적으로 삶의 에너지를 쓰는 태도입니다. 우리의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체력적인 에너지와 심리적인 에너지 모두 한계가 있고, 그 한계 안에서 중요도 있는 일들을 우선으로 처리해야 합니다. 지금 사연자님이 처리해야 하는 일들을 중요도에 맞게 잘 정렬하고, 순서대로 잘 처리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세요. 만일 스킨십 문제가 중요도 1순위라면 정신건강의학과를 가능한 한 빨리 방문하여 불편감의 실체를 보고, 치료를 시작하시면 됩니다. 중요한 문제일수록 괜히 해결을 미뤄두면서 에너지를 낭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문제를 빨리 다루시면 더는 ‘생각하고, 상상하고 걱정하는 에너지’를 안 써도 됩니다. 남는 에너지는 더 필요한 일들에 쓰이게 되겠지요.

만일 지금 고민이 중요도 1순위가 아니라면, 과감하게 특정 시기 이후로 고민을 미뤄두세요. 당장 해결할 것이 아니라면 이에 대해 ‘걱정하는 일정’을 따로 마련해두는 겁니다. 예를 들어, 불쑥 스킨십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면, ‘이 고민은 이번 주 금요일 오전 2시간 동안 실컷 하자.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을 먼저 하겠어.’ 이렇게 고민하는 스케줄을 따로 설정하여, 분리하는 것입니다. 우선순위를 지키며 에너지를 나눠 쓰는 데에는 이러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연자님께서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사연자님의 고민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질 수 있기를, 조만간 해결될 수 있기를 응원하겠습니다.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한양대병원 외래교수, 한양대구리병원 임상강사
(전)성안드레아병원 진료과장, 구리시 치매안심센터 자문의, 저서 <가족의 심리학>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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