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서대문봄 정신과 이호선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어린 시절 끔찍했던 보육원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요즘 아동 학대 뉴스를 보면 그때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라 너무 힘들어요. 그때 생각만 하면 아직도 분노를 참을 수가 없어요. 그동안 꾹 눌러왔던 트라우마가 다시 심해져서 숨이 막히고 너무 괴롭습니다. 당장이라도 그 보육원을 고발해서 법의 심판을 받게 하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공소시효가 지나서 처벌이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이 끔찍한 기억을 누구에게도 말 못 하고 혼자 숨겨왔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이제야 이렇게 털어놓습니다.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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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보내주신 사연 잘 읽어보았습니다. 

먼저 이렇게 큰 트라우마 경험을, 오랫동안 혼자 끌어안고 살아오시느라 마음고생이 심하셨을 것 같습니다. 현재 사연자님은 엄청난 분노감과, 숨도 턱턱 막히는 답답함 때문에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인 듯합니다. 

사연을 읽고 저 또한 화가 많이 났고, 사연자님이 누구에게도 말씀 못하고 숨겨왔던 심정이 정말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사실 아동학대는 한 사람의 자존감의 뿌리를 심하게 훼손하는 경험이기 때문에, 시기가 언제가 되었든 치료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저는 치료의 필요성에 대한 것보다는, 트라우마를 겪는 분들이 스스로 트라우마를 다룰 때 필요한 전략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지금 트라우마를 다룰 충분한 에너지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만일 사연자님의 삶이 이미 여러 스트레스가 많았던 상태라면 트라우마 사건에 더 쉽게 압도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마치 면역력이 떨어져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을 때, 병에 쉽게 걸리는 것처럼요. 예를 들어 내가 부정적인 감정을 처리할 에너지 총량이 100퍼센트가 있어요. 근데 요즘 스트레스가 많아서 이중 70퍼센트를 처리하는 데에 쓰고 있었다면 남은 에너지는 30퍼센트밖에 없겠지요? 그런데 감당하기 어려운 트라우마가 갑자기 덮쳐오면서 90퍼센트의 에너지를 요구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당연히 에너지가 부족해 너무 버겁고, 삶에 엄청 지장이 생기고 휘청거리게 되겠지요. 

더 안타까운 점은, 트라우마에 압도되고 부정적인 감정에 매몰되면 여기서 벗어나려고 오히려 과거 트라우마 사건을 되뇌고 분석하고 이유를 찾으면서 계속 머무는 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현재의 삶을 많이 놓치게 됩니다. 현재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손을 놓게 되면? 당연히 현재 스트레스도 그대로 있고, 부정적인 감정들은 해소가 하나도 안 되지요? 그러면 우리는 그 불만족한 현재의 원인을 오래된 트라우마에 다시 돌리게 됩니다. 이렇게 악순환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사연자님처럼 오래된 트라우마가 갑자기 촉발된다면 먼저 내가 이룰 다룰 에너지가 어느 정도나 있는지 먼저 평가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에너지가 만일 부족하면, 투 트랙으로 가시는 것이 좋습니다. 첫 번째는 당장 직면한 현실의 문제들부터 한 스텝 한 스텝 해결해나가는 겁니다. 직장에서 겪는 것이든, 가정이든, 대인관계이든 해결되지 않아서 마음 쓰고 있는 일이 있다면? 다 에너지 낭비입니다. 빨리 해결하셔서 에너지를 다시 회수하십시오. 그렇게 트라우마 치유에 쓸 에너지를 차근차근 확보하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신경 쓰던 현실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나가면 과거 트라우마 사건을 다루는 데에 에너지를 많이 쓸 수 있게 되겠지요.

덧붙여 우리가 현실 문제에 집중할 때 얻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이점이 있습니다. 트라우마는 이미 종결된 과거이고 개인을 무력하게 만든 끔찍한 사건이지만, 현실 문제의 영역은 실시간으로 개입할 여지가 남아있고, 자신이 아직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점입니다. 트라우마를 겪은 분들이 끔찍하게 겪는 무력감을 조금이나마 회복하려면 현실에서 통제감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을 하는 것이 한편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당장 현실에서 겪는 문제들을 해결하여 부정적인 감정의 소모를 최대한 줄이고, 에너지를 회수합니다. 동시에 언제든지 트라우마 증상에 대응할 수 있도록 약물과 심리상담을 병행해나가면 되겠습니다.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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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트라우마를 다룰 때 필요한 두 번째 전략입니다. ‘내가 트라우마를 다룰 만큼 성장했을 가능성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트라우마 경험을 하면 이에 대해 누구나 심리적인 반응을 합니다.  어떤 분들은 무의식적으로 보호하고자 감정을 아예 묻어버리면서 트라우마의 영향력을 완전히 차단하려고 시도하고요. 또 어떤 분은 당장 온갖 부정적인 감정에 압도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트라우마에 반응하는 ‘방식’도 ‘시점’도, 개인마다 모두 다릅니다. 트라우마 사건이 일어나는 즉시 고통스럽게 반응하는 분들도 있지만, 1주일 후 혹은 사연자님처럼 20년, 30년이 지나 한참 후에 반응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사연자님에겐 수십 년도 더 된 사건이고, 일생동안 묻어두고 살아온 아픔이셨을 텐데요. 사실 아동학대로 인한 사망 사례는 ‘정인이 사건’이 처음이 아니고, 이전에도 여러 차례 되풀이되는 아픔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이 사건이, 사연자님의 오래전 트라우마를 건드려 일상을 뒤흔들게 된 걸까요? 어떻게 보면 ‘뒷북’과 같은 감정이라는 생각에 억울하고 또 매우 화가 날 수 있는 상황이지만, 다른 관점에서도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당시 사연자님이 학대를 당했을 때는, 그저 모든 감정을 억압하고 상처를 덮어두는 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감당하기 어려운 트라우마를 잘 덮어두고, 스스로를 아주 잘 보호해내신 겁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조금씩 조금씩이나마, 단단해지는 삶을 살아오시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사연자님이 트라우마로 인한 고통들을 억압하지 않고도, 그 감정들을 느끼고 소화할 만큼 마음의 그릇이 넓어지고 깊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적어도 그 당시 트라우마 경험에 담긴 감정에 머무르면서, 그 사건에 대한 심리적 반응을 아주 충실히 하는 과정에 있으신 거지요. 그래서 저는 사연자님이 트라우마로 취약해진 심리적 측면도 있겠지만, 고통스러운 감정에 머물 만큼 용기 있는 면도 있는 분으로도 느껴집니다. 당장은 동의하시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피해자의 입장에 머물러 있을 때, 모든 고통이 억울하고 또 아프게만 느껴져 가장 약한 나의 모습과 마주하게 됩니다.  분명 안전한 환경에서 이를 다루고, 오래된 상처에 대해 치유하고 애도하는 작업이 필요하지요. 그러한 작업과 동시에, 사연자님께서 고통을 감내해낸 생존자였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인정하는 과정까지, 나아가셨으면 합니다.

 

수십 년이 지나 오늘 이 순간까지 그 무거운 트라우마의 짐을 짊어지고 묵묵히 버텨온 스스로에 대해 재평가를 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트라우마 사건은 고통으로만 남지 않고, 사연자님의 삶에 깊이와 넓이를 더하는 의미 있는 경험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지금까지 삶을 살아내신 사연자님의 강인한 모습을 앞으로 응원하겠습니다. 

 

 

우경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대구가톨릭대병원 의과대학 학사 , 석사
대구가톨릭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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