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광화문 숲 정신과, 김재옥 전문의] 

 

사연) 

저는 누군가 집안일, 씻기, 등교 등 돌봐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하고 의욕도 없고 그냥 가만히 있어요. 성인이니까 돌봐주는 사람도 아무도 없고 주로 남자 친구들이 그 역할을 하게 되는데 좀 오래 떨어져 있게 되거나 헤어지게 되면 너무 우울해져서 자살시도를 해요. 그래서 항상 헤어질 때쯤에 자살 시도하고 곧 다시 또 새로운 사람 사귀고 그런 식이었어요. 딱히 누군가를 엄청 사랑한다거나 그렇지도 않고 성욕도 별로 없고 연락을 잘하는 타입도 아니고요.

그리고 바람을 계속 피워요. 한 사람이랑 꾸준히 바람피우는 게 아니라 남자 친구가 안 보이게 되면 그 시간 동안에 다른 남자랑 자요. 성욕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딱히 끌려서 그렇지도 않고요. 

저도 제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집도 유복한 편이고 부모님 사랑 많이 받고 자랐고 학벌도 좋고 외모적으로도 예쁜 편이에요. 근데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돈 많은 남자를 몰래 만나서 돈을 얻어낸다든지 연애에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잘생긴 사람을 만나서 몰래 잠자리를 한다든지 이런 것들 전혀 즐기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고 오히려 제가 봉사하는 기분이에요.

 

근데도 이런 일이 자꾸 생겨요. 제가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는 거에 대해서 인식이 없었는데 친구들이나 부모님은 별말 안 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딱히 남한테 피해 주는 것도 아닌 거 같아서 잘못되었다고 생각 안 했는데, 남자 친구들이 거짓말이나 속이는 걸로 지속적으로 화내서 제가 거짓말하나? 하고 생각하게 됐어요. 예를 들면 오늘 집 앞에 친구를 만나고 왔는데 아무도 안 만났다고 한다든지, 별 의도는 없고 그냥 무심결에 대답하는 사소한 것들인데 상대방은 엄청 심각하게 여기고 저한테 배신감을 느껴서 저도 고치려고 해도 너무 습관적으로, 반사적으로 하는 거라서 고쳐지지 않아요.

 

제가 스스로 돌아봤을 때는 병원에서 말한 조울증이나 연극성 장애 설명을 봐도 해당사항이 별로 없고, 일상생활에서 힘든 점은 그냥 혼자 있는 게 너무 힘들고 기분 조절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힘들고요. 성격장애들은 제가 책도 찾아보고 해 봤는데 저는 유년시절이나 가정환경에 문제가 전혀 없었기에 전혀 해당이 안 되는 거 같아요.

그래서 더더욱 답답해요. 지금까지 수많은 병원에 다녀봤지만, 어느 곳 하나 정확하게 저를 알려주는 곳도 없고... 이유도 정확히 말해주지 않으시면서 미안하지만 다른 병원을 가보라고 하는 곳도 많았고요. 나아지는 것도 없고... 사실 병원에 대한 신뢰는 너무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예요. 이런 삶 그만하고 싶고 저도 남들이랑 얘기해도 가치관도 보편적이었으면 좋겠고... 저도 이제 그만 벗어나고 싶어요.

 

사진_픽셀

 

답변)

안녕하세요, 광화문 숲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재옥입니다.

화려한 흑백 영화를 보는 듯한 질문 글이 인상 깊었습니다. 제가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사람 관계에 대한 기준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의 거짓말을 합니다. 타인에게 100%의 진실을 전달하기 어렵기 때문이죠. 진실을 전부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 진실의 배경도 모두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내 인생을 모두 설명해야 하는 경우도 분명히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타인의 배경을 100% 알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내 배경과 진실을 모두 설명한다 한들, 타인이 내 진실을 내가 원하는 만큼의 순도로 받아들이는 것을 장담하지 못합니다. 여기에 더해 내가 설명을 하는 데 투자하는 시간과, 공개하는 내 마음속 생각은 종종 나 자신이나 상대방을 상처 줄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짓말을 합니다. 서로의 관계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줄이는 거죠. 그리고 이 관계가 지속되며, 얼마만큼의 진실을 주고받는지는 서서히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혹 이 차이가 너무 큰 경우 관계는 결국 끝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앞의 타인에게 얼마만큼의 진실을 제공할 것인지 정해 놓습니다. 예를 들어, 내 삶을 잘 알고 있는 나에게 지지적인 이에게는 80%의 진실을, 지금 처음 일 때문에 만난 사람에게는 20%의 진실을 공개합니다.

그렇기에 일 때문에 만난 사람에게 내 깊은 고민을 상담하지 않습니다. 설령 내가 당일 응급실에 갔다 왔더라도, 계약 관련 일로 만난 이에게는 날씨가 어떻냐며 청승을 부리죠. 정작 나는 내일 날씨를 알 수 없는 몸이 됐을 수도 있는데요. 하지만 그 자리에서 중요한 것은 순조로운 계약이기에 이런 거짓말을 나 스스로도, 상대방도 용납하며, 사회적으로도 받아들여집니다.

 

이런 관점으로 질문자분의 거짓을 바라볼까 합니다. 질문자분의 거짓은 스스로의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줄이기 위한 효과는 확실한 듯합니다. 한 번의 거짓으로 본인이 당시 원하는 것들을 얻어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친구나 연인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굉장히 의미 없는 관계일 겁니다. 자신이 전달하는 진실에 비해 너무 터무니없이 낮은 진실을 받고 있기 때문이죠. 그렇게 낮은 진실은 상대방을 낙담시키고, 큰 낙담은 관계를 끊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질문자분은 거짓으로 물질적, 정서적 만족을 얻으시지만, 깊은 관계를 잃고 있습니다. 스스로도 이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반복하신다는 것을 보면, 관계의 깊이가 물질적, 정서적 만족과는 무의미하다는 나름의 확신이 있으신 듯합니다. 관계가 얕아도 또는 깊어도, 물질적/정서적 만족이 큰 차이가 없다면, 관계 유지에 힘이 덜 드는 얕은 관계를 선택하는 것이 수월하니까요. 그리고 관계가 깨질 때마다 사람에 대한 실망을 하게 되고, 사람에 대한 실망은 깊은 관계를 꺼리게 합니다.

 

지금 질문자분을 보편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은, 오래 유지되는 관계 그 자체입니다. 거짓도 말하고 진실도 말하면서 덜컹거리며 오래 유지되는 관계는 질문자분이 깊은 관계를 느낄 수 있게 할 것이고, 이 느낌이 질문자분이 보편적인 가치관을 가질 수 있게 도울 겁니다. 병원이든, 종교든, 무엇이든 건강한 일을 성실히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좋습니다. 그 사람과 깊은 관계를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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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삼성마음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국립공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저서 <정신건강의학과는 처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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