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대한불안의학회 임세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혜정씨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큰 회사의 콜센터에서 일하는 30대의 직장인입니다.

목소리가 큰 사람이 결국엔 이익을 본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된 사람들이 매우 많은 대한민국의 콜센터에서 일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얼굴을 알 수 없는 전화기 건너편의 누군가가 다짜고짜 쏟아붓는 억지, 비아냥, 욕설, 협박이 예측할 수 없게 반복됩니다.

출근을 할 때마다 오늘은 제발 악성고객(소위 말하는 진상)이 없기를 기대하지만, 매일 아침 첫 번째 전화를 받기 전까지 계속 느껴지는 불안과 긴장감은 혜정씨를 늘 지치고 힘들게 만듭니다.

 

형태가 무엇이든 고객을 직접 상대해야 하는 서비스업, 즉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고객을 만나는 것은 악몽과 같은 일입니다.

일을 그만두지 않는 한 끝없이 지속될 것 같은 이러한 상황을 잘 견디어 낼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있을까요?

사진_픽셀

가장 시급하며 효과가 큰 것은 전반적인 국민의식의 개선입니다.

막무가내식의 요구를 하고, 조금이라도 성에 차지 않거나 거절당하면 생떼를 부리며 막말과 욕설을 해대는 것은 고객의 권리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매우 부끄럽고 어리석은, 유치원 수준의 예의조차 갖지 못한 지극히 미개한 행위라는 것에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고객 혹은 소비자의 권익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들도 수화기 건너편의 콜센터 직원 혹은 마트 계산대에 서있는 상대방이 어떤 집의 귀한 자식이며, 귀여운 어떤 어린이의 부모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다른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에 해당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개선이 필수적입니다.

다행히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이러한 인식의 개선이 조금씩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혜정씨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직장에서 그러한 악성고객을 상대하면서 듣게 된 폭언이나 인격모욕이 혜정씨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단지 혜정씨가 수행하고 있는 역할에 대한 것임을 분명히 상기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루의 근무가 끝나면 그러한 사람들을 어쩔 수 없이 상대해야 했던 나의 역할도 끝나게 해야 합니다. 즉, 나의 역할과 나 자신을 분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같은 일에 종사하고 있는 동료들과 그 날 경험했던 어이없고, 황당하고, 때로는 억울했던 상황들에 대해 어느 정도 이야기를 하고 퇴근하는 것도 좋습니다.

비록 그것 자체가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속상한 감정과 떨어진 자존감을 퇴근 후 집으로까지는 가져가지 않을 수 있게 해주는 효과가 좋은 방법입니다.

 

반면에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나쁜 것은, 역할 수행과정에서 자신의 상처받은 마음을 가족이나 동료, 혹은 아랫사람들에게 화풀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가족이나 동료들은 자신의 잘못과는 무관하게, 때로는 아무 영문도 모른 채 감정적 공격을 당하게 됩니다.

자신의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 속상해하는 가족 혹은 동료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 자신이 다시 후회와 자존감 저하, 일에 대한 전반적인 회의를 경험하게 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사진_픽사베이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하다 보면 확률적으로 어쩔 수 없이 이상한 사람들, 도무지 상식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태도로 험한 말이나 무례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정신의학회의 연구보고에 의하면 대략 전체 인구의 최소 0.2%에서 많게는 3.3%가 반사회적 인격장애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즉 1000명의 고객을 상대하게 되면 확률적으로는 최소 2명에서 많게는 33명까지 이러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 한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지 않기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쩔 수 없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면, 일을 그만두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대처방법은 나 자신과 내가 해야 할 역할을 분리하여 스스로의 인격과 자존감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잘 노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많은 직장인들의 생활은 일과 휴식으로만 반복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결코 오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틈틈이 맛집도 찾아가고, 쇼핑도 하고, 여행도 가는 등 자신의 경제력과 휴가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잘 놀아야 합니다.

놀 수 있는 시간도 없고, 돈도 없다는 말을 하는 직장인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으로는 일도 잘 하기 어렵습니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하는 놀이를 생각해봅시다. 여학생들이라면 기다란 까만 고무줄 1개, 남학생들이라면 아무것도 없이 그저 개울가에서 돌멩이로 물수제비를 던지면서도 재미있었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어른이 된다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의 형편에 맞는 즐거움을 스스로 찾아내시길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한민국의 곳곳에서 고객을 마주하고 있을 수많은 혜정씨들의 노고에 감사와 위로, 그리고 응원을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 대한불안의학회

대한불안의학회는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소속 전문학회로, 공황장애, 강박장애, 사회불안장애, 범불안장애, 외상후스트레스장애 등 다양한 불안 및 스트레스 관련 질환에 대한 연구, 교육 및 의학적 진료 모델 구축의 최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다.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