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현재 저는 우울 및 불안 진단을 받고 6개월 휴직 중입니다. 저에 대해서 조금 더 잘 이해하실 수 있도록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 보자면, 강박증 진단을 받고 치료받은 적이 있습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욕설 같은 안 좋은 말들이 떠오를 때가 많았고, 그럴 때마다 어머니께서 괜찮다고 말을 해주셔야 진정되곤 했습니다.

 치료 후에는 평범한 삶을 살았고, 성인이 된 지금은 얼마 전까지 직장생활을 하다가 잠시 휴직 중입니다.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이라서 민원에 시달릴 때도 많았고 격무와 업무분장 관련 스트레스가 심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집에 와서 운 적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만둘 용기도 나지 않았습니다. 퇴사 이야기하기도, 퇴사 과정을 밟는 것도 귀찮고 상사를 마주할 자신도 없었습니다. 죽고 싶다기보다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고 싶었습니다. 

 계속 이런 상태가 이어지다 보니 저만 아니라 가족들도 힘들어지는 것 같아서 병원을 찾았고, 결국 휴직 신청을 했습니다. 제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팀원들이 힘들어질 테고 복직 후 다시 봐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일단 내가 살고 봐야겠다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렇게 휴직한 후 정신건강 관련된 책들도 읽어 보고, 자아 성찰도 하다 보니 저의 문제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많이 의존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소한 것들도 부모님이 챙겨 주실 때가 많았고,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었습니다. 스스로 뭘 하는 것보다는 주변에서 챙겨 주는 것에 익숙했던 것 같습니다. 심리학에서 ‘스키마’라는 개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는데, 이런 행동 패턴이 저의 스키마가 된 것인가 싶기도 합니다. 자기 확신이 부족하고 제가 능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하면 당황하고 불안합니다. 

 학창 시절에는 그런 부담이 적었는데 사회생활을 하며 제가 책임져야 하는 일이 많다 보니 점점 부담이 커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처리할 일도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며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날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것 하나 못 버티는 나약한 인간인가? 하는 생각에 스스로 더 몰아붙이기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어머니에게는 힘든 이야기를 다 하는 편입니다. 한참 우울했을 때 살고 싶지 않다고, 죽겠다고 이야기한 적도 있습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마음속에는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를 사랑하고 제게 주시는 사랑과 희생을 다 아는데도 힘들 때면 자꾸 상처 입히는 말을 합니다. 제가 이만큼 힘들다고 알아달라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어머니를 계속 힘들게 하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이제 곧 복직해야 하는데 잘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습니다. 힘들면 쉴 수도 있는 거고, 때로는 도망칠 수도 있는 거다 생각하면서 마음을 편하게 먹으려고 하는데 팀원들이 저를 어떻게 볼지 신경 쓰입니다. 약해 빠진 사람이라고 보지는 않을지, 바쁠 때 휴직한 저를 이기적이라고 보지는 않을지 염려됩니다. 민원인들을 잘 상대할 수 있을지 자신도 없습니다. 복직 전에 저를 바꾸고 싶습니다. 더 이상 도망치는 나약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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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올려 주신 사연 잘 보았습니다. 우울과 불안으로 휴직 중이시라니 마음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글을 통해 회사생활을 하며 힘드셨을 사연자님의 마음이 잘 느껴졌습니다. 이제 복직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여러 가지 생각과 고민이 많이 드실 것 같습니다. 

 우선 힘드신 중에도 병원을 찾아 치료받고 휴직할 용기를 내고, 실천에 옮기셨다는 점을 칭찬해드리고 싶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퇴사할 힘도 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의 에너지가 소진된 상태에서도 더 나아지기 위한 선택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꾸준히 치료받으시면서 조금씩 좋아지는 모습을 발견하실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사연에서 어렸을 때도 강박으로 치료를 받으셨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어린 시절부터 불안이나 걱정이 많으셨던 편인 것 같습니다. 다행히 조기에 치료를 받으셔서 그 뒤로 일상생활에서 크게 어려움이나 불편함을 느끼지 않으시다가 직장생활에서 다시 불안과 우울이 심해지신 것으로 보입니다. 직장생활에서의 스트레스가 내재되어 있던 불안을 올라오게 하는 방아쇠(trigger)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에 잠깐 나타났던 불안이 갑자기 성인이 된 후 다시 나타난 것일까요? 

 

 사연자님께서 본인의 문제점으로 부모님께 너무 의존적인 면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는데, 이 부분을 불안이나 우울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부모님께서 많은 것들을 챙겨 주시는 것이 익숙하고 편해서 의지한 것도 있겠지만, 사회적 장면에서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독립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 상황에 대한 불편감으로 인해 더 부모님과만 시간을 보냈던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어린 시절 강박증 치료를 받고 난 이후에는 평범한 삶을 살았다고 말씀해 주셨지만, 치료받을 정도로 심각한 불안이나 우울은 아니었을지라도 학창 시절에도 불안이나 우울이 어느 정도 기저해 있었을 가능성도 있겠습니다. 걱정이 많고 최악의 상황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집이나 가족이 아닌 낯선 장소, 낯선 사람들을 피하게 된 것이지요. 이런 생활 패턴이 부모님의 보호 아래 있는 학창 시절까지는 큰 무리 없이 지속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인으로서 온전히 자기 몫을 감당하고 책임지는 직장생활에서는 이런 익숙한 보호막이 사라지면서 큰 부담을 느끼셨을 수 있습니다. 나의 행동과 그 결과를 누군가가 늘 지켜보고 평가받는 상황에서 실수할까 봐 불안해지고 잘하지 못할까 봐 좌절하고 우울한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로 힘들어하는 것이 비단 사연자님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직장생활을 하며 신체적, 감정적 에너지가 고갈되는 것, 동료나 사람들의 사소한 말에도 짜증이 나는 것, 현재 직장이나 직업에 대한 불만족, 직장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고립감 등 ‘직장 우울증’의 증상은 다양합니다.

 직장생활을 하며 우리는 ‘성인’으로서 변모해 갑니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고 다시 일어서기도 하며 나선형으로 전진과 후퇴를 반복합니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직장생활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연자님께 유독 그 무게가 무겁게 느껴진 까닭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 온 불안과 마주하고, 우산 역할을 해 주었던 부모님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는 도전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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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공포증(social phobia)을 위한 인지행동치료에서는 잘못된 핵심 신념(core belief)에 대한 수정과 함께 실제적인 행동 변화를 추구합니다. ‘나는 바보 같아.’, ‘나는 실패할 거야.’, ‘나는 할 수 없어.’와 같은 생각은 비합리적 신념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비합리적 신념과 함께 두려워하는 상황을 피하는 행동을 회피 행동(avoidant behavior), 안정감을 얻기 위해 하는 행동을 안전 추구 행동(safe-seeking behavior)이라고 합니다. 

사연자님의 비합리적 신념과 안전 추구 행동, 회피 행동은 무엇입니까? 의존적인 생활 패턴이 본인의 스키마인 것 같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안에 숨어 있는 핵심 신념은 ‘나는 혼자서는 못해.’, ‘나는 부모님의 도움이 필요해.’와 같은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불안이 올라올 때는 어머님의 ‘괜찮다’는 말, 위로의 말들이 안정제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어머니를 찾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연자님이 힘들 때마다 어머니께 정서적으로 의지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 불안감이나 우울감으로 어머니께 더 예민하게 대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타인에게 표현하지 못하는 사연자님의 다양한 감정들을 안전하게 표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창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사연자님께서 스스로 돌아보고 변화의 의지를 갖고 계신 것은 큰 자원입니다. 모든 치료는 나의 현 상태에 대한 ‘직면’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몸의 병이든 마음의 병이든 자신이 현재 아프다는 ‘병식(病識)’이 없을 때 가장 치료가 어렵습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이미 그 과정을 시작하셨으니 그것만으로도 큰일을 하신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연자님의 말씀처럼 지금까지 사연자님의 스키마는 ‘부모님께 의지하는 것’이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생긴 스키마가 영원히 고정불변인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사연자님께서 하는 생각, 결정, 행동들을 통해 얼마든지 새로운 스키마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한 번에 너무 큰 목표나 기대치를 갖기보다 달성할 수 있는 작은 목표들을 설정하고 성공 경험을 쌓아 가다 보면 스스로에 대한 생각이 바뀔 것입니다. 또, 부모님과만 맺고 있던 관계의 통로를 친구, 동료 등으로 확장해 가는 연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두 사람이라도 고민과 감정을 나누며 소통하다 보면 점차 삶의 재미나 의미를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사연자님의 새로운 도전을 응원합니다.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정정엽 원장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 의과대학 학사석사, 서울고등검찰청 정신건강 자문위원
보건복지부 생명존중정책 민관협의회 위원
한국산림치유포럼 이사, 숲 치유 프로그램 연구위원
저서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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