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게으름과 싸우고 있는 22세 여대생입니다. 사실 싸우고 있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게으름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학교를 빠지는 것부터 시작해서 과제 미루기, 신분증 만들기, 카톡 답장하기 등 모든 것을 미루고 미루다 마감 직전에 해결을 하려고 합니다. 마감을 못할 것 같을 때는 깔끔하게 포기하죠.

저는 이게 무기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저는 하려고 하면 할 수는 있는데 그냥 단순하게 하기가 싫습니다. 모든 것에 쉽게 흥미를 잃고 모든 것을 쉽게 쉽게 하려고 하고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쉬운 길을 가려고 합니다. 이게 좋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게 안전하고 행복하다고 느끼거든요. 스트레스도 없고 평화로운 지금의 시간을 지키고 싶은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약간의 불안이 오긴 합니다. 이렇게 살다 간 나중에 후회할 것 같거든요.

제가 원하는 건 열정 있는 삶보다는 마감에 쫓기지 않는 삶입니다. 해야 할 일만 그때그때 해도 제 인생의 만족감은 두 배 이상 올라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터넷 검색을 통해 게으름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 시도를 해 보았지만 쉽지 않더군요. 재미 없는 것을 붙잡고 있는 훈련이 너무 덜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꾸준하게 무언가를 하는 거에도 훈련이 너무 안 돼 있고요. 꾸준하게 시도와 실패를 하고 드는 생각은 저는 저 혼자서 이걸 하기에는 동기부여가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확실한 목표 의식도 없이 ‘게으름을 극복해 볼까?’라는 단순한 생각 하나로 이를 극복하기에는 제 의지는 너무 부족하더라고요.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디에 도움 요청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과연 저같이 의지가 없는 사람을 이끌어 줄 수 있는 코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더라고요. 정신병원에는 혹시 저 같은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지 궁금해서 게시판에 글을 올려봅니다.

 

사진_ freepik
사진_ freepik

답변) 안녕하세요 광화문 숲 정신건강의학과 정희주입니다. 게으름에 대한 고민을 적어 주셨네요. 일을 미루는 습관 때문에 삶의 만족감이 떨어지고, 개선해 보고자 나름의 노력도 하였지만 잘되지 않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사연을 올릴 수밖에 없었던 글쓴이 분의 답답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먼저 정확한 현실 인식을 위해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 대부분 사람이 사연자 분처럼 일을 미룹니다. 공부든, 과제든, 심지어 놀러 나가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든 간에 전체 업무의 상당 부분은 마감 직전에 이루어집니다. 미루는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해야겠지만 미루는 것 자체로 내가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로, 게으름이라는 용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게으름, 게으름뱅이라는 단어는 보통 부정적으로 쓰이며 부도덕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런 식의 가치판단이 들어가면 정확한 판단이 어렵습니다. 특히 일을 미루는 것에는 여러 원인이 있는데, 단지 개인의 의지력 부족을 탓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실제로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에서는 그보다 ‘지연행동(procrastin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글쓴이 분의 상황도 지연행동으로 개념화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지연행동을 유발하는 여러 병리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우울증이 대표적인데, 우울증에 빠지면 의욕이 저하되고 기력이 쇠하기 때문에 당장에 주어진 일을 하기 쉽지 않습니다. 불안장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이 잘못되면 어떡하지, 실수하면 어쩌지 같은 결과와 평가에 대한 불안감이 심해 정작 일 자체에는 집중하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흔한 원인으로 ADHD가 있습니다. ADHD가 있으면 만족 지연이 어려워 빠른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지루한 일을 할 때 의욕이 떨어지게 됩니다. 업무를 체계화하고 순서를 정하는 능력이 부족하여 일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강박증 혹은 완벽주의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일을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인해 애초에 시작조차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설령 위의 질환이 없더라도 그에 준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지연행동을 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흔히들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인의 의지력은 지연행동을 유발하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 중 작은 일부일 뿐입니다. 

이처럼 지연행동의 원인은 다양하고 복잡하기에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럼에도 공통으로 적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1. 먼저 주어진 과제를 더 작은 단위로 나누어 파악하고 대처해야 합니다.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과제량에 압도당하거나 중간에 쉽게 지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2. 또한 일의 목표를 세우는 것이 필요한데, 목표는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하며 달성 여부를 쉽게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해야 할 일이 여러 개일 때는 중요도와 시급성에 따라 주어진 일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3. 스스로에게 적절한 보상을 주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어떤 일을 달성하면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원하는 물건을 사겠다는 식으로 정해 놓는 것이지요.

4. 경쟁과 협동을 통해 타인과 함께하는 것도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취업 스터디, 시험 스터디를 조직하는 게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아울러 심리적, 체력적으로 지쳐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휴식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이 글에서는 몇 가지 일반론적인 원칙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혹시라도 지연행동으로 인해 대인관계, 학업, 일상생활에 실제적인 어려움이 있다면 정신과를 찾아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앞서 말한 여러 병리적인 원인들을 감별하여 치료할 수 있으며, 정신과적 질병으로 진단되는 게 없더라도 현재 상황을 개선할 만한 다양한 방법들을 같이 논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정희주 원장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울역 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졸업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전)성동구 정신건강복지센터 상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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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육을 키운다는 느낌으로 조금씩 실천해봐야겠어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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