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권순재]

 

사연)

저는 아이가 곧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워킹맘입니다. 지점 업무시간이 길고 출퇴근 거리도 멀다 보니 그동안 육아는 프리랜서인 남편이 좀 더 신경을 써 왔습니다. 남편과 비교했을 때 아이와 함께하는 절대적 시간이 적다 보니 휴무인 평일에 최대한 시간을 내서 함께 한다고는 해도 아이가 엄마보다 아빠를 더 좋아하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보다는 아빠를 먼저 찾고, 남편이랑 둘이서 저만 모르는 이야기를 할 때면 외톨이가 된 것 같은 서운함도 느끼고는 합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제가 아이 입장이라도 당연히 그럴 거 같기는 한데 괜히 질투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걸까요? 아니면 제가 철이 덜 든 걸까요?

출처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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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재의 마음처방전 2)

당신의 정신건강의학과 권순재입니다. 안정적이고 집과 가깝기까지 한 직장을 가질 기회가 많지 않기에 우리는 언제나 직업과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 사이에서 고민합니다. 둘 모두 소중하고 쉽게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는 고민일 것입니다.

조언을 드리기에 앞서 제가 최근에 만났던 두 명의 환자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첫번째 환자는 처음 진료시에 2시간 동안 저와 면담을 했습니다. 저는 그녀의 삶의 온갖 궤적을 들었고, 그녀에게 2시간 동안 공감해주고, 그녀의 갈등을 명료하게 해주고, 약간의 해석과 조언도 해주었습니다. 면담이 끝난 후 그녀는 나에게 크게 고마워했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지만, 다음 진료시간에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두번째 환자는 무척 말수가 적어서 저와 하루에 20분 정도만의 면담을 했습니다. 20분간의 면담으로 저는 많은 것을 알 수는 없었죠. 그렇기에 그가 현실에서 겪는 증상을 먼저 해결해주었습니다. 대신 그는 2주에 한번씩 저를 찾아왔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저는 그가 삶에서 겪고 있는 지속적인 갈등에 대하여 듣게 되었습니다. 서로에게 익숙해지면서 저는 점차 그가 처음에 보였던 모습만이 그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위 두 명의 환자 중에서 어느 환자가 결과가 더 좋았을까요? 예상하셨겠지만 두 번째 환자분에게 저는 훨씬 더 많은 도움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타인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데에 있어서 우리는 한 번의 길고 강렬한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짧고 굵은 커뮤니케이션보다는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교류가 이어질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또 그 사람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2시간짜리 블록버스터보다는 여러 시즌으로 되어있는 짧은 드라마가 우리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치는 셈이죠.

출처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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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삶에서 여러 모습을 보여요. 기분에 따라, 날씨에 따라, 당면하고 있는 일에 따라 한 명의 사람이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할만큼 상반된 모습을 보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아이와의 커뮤니케이션의 질은 한 번에 하는 대화의 양이나 같이 보내는 시간보다는 아이와의 의사소통이 얼마나 안정적이고 지속적이냐에 따라 최종적으로 결정되지요.

단지 대화와 경험만이 아이와의 커뮤니케이션의 전부가 아닙니다. 부모가 평소에 살아왔던 삶의 모든 궤적, 그 사람의 태도, 그 사람의 직업 그 전부가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아이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주고 늘 챙겨주는 부모도 필요하지만 일정하게 시간을 내어 진지한 이야기를 함께 해줄 부모 또한 아이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러니 같이 보내는 시간의 양이 적다고 해서 너무 불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한 가지 조언을 드리자면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일주일에 몇 번으로 정해서 그 시간만큼은 꼭 아이와 성심성의껏 함께해주세요. 그렇게 일정한 시간을 두고 아이와 함께하면 안정적인 애착이 형성되어 엄마가 일을 하러 집을 떠나 아이가 엄마를 기다리는 그 시간까지도 아이와의 교류의 일부가 되기도 합니다.

양보다는 질, 강렬함보다는 지속성.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좋은 관계의 특징입니다. 그러니 단지 함께 보내는 시간의 양이 적다는 것만으로 외톨이처럼 느낄 필요 없습니다. 하루 종일 먼 거리를 출퇴근하고 긴 시간 지점업무를 하면서도 아이와의 관계를 생각하는 엄마를 우리는 ‘충분히 좋은 엄마’,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한 엄마’라고 부릅니다.

 

 

* 본 상담사연은 롯데 하이마트 사보 중 한 코너인 <마음 처방전>에 개재된 글입니다.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신의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분당서울대병원 전임의
(전) 메디플렉스 세종병원 정신건강의학과장 치매전문센터장
저서 <약한 게 아니라 아팠던 것이다>, <이제 독성관계는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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