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보다 진심 (3)

[정신의학신문 : 김재원 서울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나를 지키는 힘, ‘일정의 빈틈’

_ 게으름 vs. 느긋함

 

프란츠 카프카 Franz Kafka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에게 큰 죄가 두 가지 있는데 다른 모든 죄도 모두 여기에서 나온다: 성급함과 게으름이다(There are two main human sins from which all the others derive: impatience and indolence).

어떤 배경에서 이런 말을 하게 되었을까? 어려서부터 카프카와 그의 작품들을 좋아했던 나는 체코 프라하에 갈 때마다 — 그래 봤자 두 번이다 — 프란츠 카프카 박물관을 방문했다. 박물관에는 그의 자필 원고와 일기, 편지, 드로잉 등이 잘 보존된 상태로 전시되어 있다.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고 권위주의적이며 가족 위에 군림하던 아버지는 카프카의 인격 형성과 글쓰기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물관에서 특히 눈에 띈 것도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였다. 41년의 짧은 생애를 매우 부지런하고 치열하게 살았던 그에게 게으름이나 나태함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가치였을 것이다.

 

게으름을 얘기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말은 ‘꾸물거림’이다. 영어로 ‘procrastination’인데 어원인 라틴어 ‘procrastinatus’를 분석하면 ‘pro(forward) + crastinatus(tomorrow)’이다. 말 그대로 ‘내일로 미룬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는 부정적인 결과나 후유증을 초래할 것이 예상됨에도 과제를 시작하거나 끝내는 것을 습관적으로나 의도적으로 지연하는 것을 말한다.

꾸물거림은 우울증이나 죄책감, 자존감 저하, 무능함 등과 관련이 있다. 이 책의 다른 글에 쓴 완벽주의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지적했듯이 꾸물거리는 사람의 내면에는 작은 실패나 실수로 자신이 부족하거나 무능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을지 두려워하는 마음이 숨어 있다. 그래서 최대한 일을 미루고 보는 것이다. 일종의 회피와 부정 반응이다.

 

꾸물거림의 핵심적 특징은 ‘연기(postponement)’와 ‘비합리성(irrationality)’이다. 과제 지연에 합리적인 이유가 있으면 꾸물거림이라고 볼 수 없다. 하지만 합리적 이유인지 합리화(rationalization)인지는 객관적으로 판단해보아야 한다.

게으름을 피우다가 제때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끝내버림으로써 결국 일을 그르치는 유형의 사람들을 나는 많이 알고 있다. 게으름을 느긋함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인 셈인데 이런 사람들과는 같이 일을 하기가 정말 힘들다. 카프카가 성급함과 게으름을 같이 거론한 이유를 알 것만도 같다.

사진_freepik
사진_freepik

 

느긋함의 사전적 정의는 ‘마음에 흡족하여 여유가 있고 넉넉하다’이다. 이것은 앞으로의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자신감에서 비롯되는 감정으로 행동이 굼뜬 걸 의미하지 않는다.

반면 게으름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성미나 버릇이 있다’라고 나와 있다. 얼핏 보기에도 게으름은 부정적, 느긋함은 긍정적인 뜻인데 도 불구하고 게으름과 느긋함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렇게도 많은지 모르겠다.

 

할 일은 쌓여 있고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일 앞에 놓인 상황에서 게으름이나 꾸물거림 또는 성급함이 아닌 느긋함을 유지할 수 있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영화 제작과 기획 일을 했던 친구가 한 말 중에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말이 하나 있다. 유능한 프로젝트 매니저는 타임 라인(timeline) 곳곳에 버퍼(buffer)를 잘 심어놓는다는 것이었다. 프로젝트 관리 방법론에도 버퍼 관리가 중요한 요소로 언급됨을 나중에 알았다.

친구의 말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로는 나의 일정표에도 버퍼를 넣어보기 시작했다. 이후 여러모로 삶이 달라졌다.

 

나의 일정표에는 언제나 버퍼가 들어 있다. 나는 이 버퍼를 느긋함을 보장하는 장치로 쓴다. ‘완충제’라는 말뜻처럼 버퍼는 주위의 사람과 일이 나의 심리적, 체력적 한계를 넘어서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고 삶의 여유와 느긋함을 지켜주는 보루堡壘다. 존경하는 선배인 하지현 교수의 명저 《엄마의 빈틈이 아이를 키운다》라는 제목에서 말만 좀 바꾼다면 ‘일정의 빈틈이 나를 지킨다’고 말할 수 있다.

게으름과 성급함은 고치기 어려운 습관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바쁨과 바쁨 사이 또는 바쁜 일이 지나간 후에 찾아오는 여유와 느긋함을 한 번이라도 맛본다면 게으름과 성급함이 반복되는 삶에서 하루속히 탈출하고 싶은 욕구가 생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두 가지 원칙과 방법을 소개해 본다.

 

첫째, 일정표에 구체적이고 세분화된 계획을 세우는 습관을 들인다.

나는 구글 캘린더를 애용하는데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나의 일정표를 공유한다. 일에 대한 계획이 구체적이려면 최대한 수치화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의뢰받은 주제에 대한 강의를 준비한다면, (1) 자료 조사는 주요 참고문헌 20개까지만 찾는 것으로 정하고, (2) 참고문헌을 검토하면서 인용할 자료나 표, 그림을 10개 이내로 정리하고, (3) 강의에서 전달할 핵심 메시지를 5개로 추리면서 강의 목차를 만들고, (4) 강의 시간 1분당 파워포인트(PPT) 1개 기준으로 강의 자료를 만든다. 이렇게 일련의 과정을 세분화하고 수치화하면서 단계별로 마감을 정해놓으면 일을 보다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

 

둘째,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원칙인데 일정표를 만들 때는 80%만 해야 할 일로 채우고 20%는 숨 쉴 수 있는 공간, 즉 버퍼를 남겨놓는다.

일정표를 꽉꽉 채워놓으면 일을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일에 치여 허둥지둥 대다 보면 오히려 일을 미루게 되고 결과적으로 꾸물거리게 될 수밖에 없다.

앞서도 말했듯이 나는 이 20%의 버퍼를 확보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쓴다. 하지만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은 일과 약속으로 빼곡하게 채워진 일정표를 훈장처럼 여기면서 살아간다.

 

_ <<밥보다 진심>> 중 ‘카프카의 문장이 내게로 왔다’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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