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빛나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26살 여성이고요.

저희 어머니는 친부와 이혼하신 지 약 5년 됐습니다.

친부와는 그 후 연락하지 않고, 어머니와 살다가 정신적으로 힘들어 최근에 독립했습니다.

늘 삶은 즐거운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요즘에는 삶은 고통이라 그냥 안 태어나는 게 편했겠다는 위험한 생각이 들어서 글을 쓰게 됐습니다.

 

어릴 때는 아버지들은 원래 늘 잠만 자는구나, 엄마랑은 애정표현하지 않는구나 하고 그게 당연한 줄 알았어요.

그러다 보니 엄마는 늘 짜증이 많았고 그건 어린 제게로 향했습니다.

제가 잘하면 당연한 거고, 못하면 혼나는 거고.

그래서 저는 공부만 열심히 했고 그러면 화목한 가정이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오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니 아니었어요.

늘 웃고, 칭찬해주고, 예쁜 말 해주는 부모가 많다는 걸 난생처음 알았습니다.

저는 늘 불안해요.

제가 좋아하는 것들, 직업, 취미 등을 어차피 엄마는 이해하지 못할 거란 걸 반복적으로 겪다 보니 힘겹습니다.

제가 한 것 중에 완벽하지 않은걸 세상에 내보내면 안 될 것 같아요.

몇 번 제가 대화를 시도해도 기계적인 반응이라 '엄만 나한테 관심 있는 게 대체 뭐야?' 하면 '너 먹이는 거'라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사진_freepik
사진_freepik

 

압니다. 구시대적이지만 사랑을 그렇게 표현하는 거란 거.

근데 한계가 느껴져요.

늘 뭔가에 불안한 심리가 부모 때문이란 걸 자각하고 나서 화가 너무 많이 나요.

근본적으로 왜 그런 어중간한 각오로 새끼를 낳았으며,

대체 왜 그렇게 멍청하고 의지도 없었을까.

제가 그들이 결혼할 때의 나이가 되어보니 더 화가 나요.

나라면 저렇게 안 할 텐데. 나라면 어떻게든 돈을 벌고, 어떻게든 가정을 지켰을 텐데.

 

알바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사람(제 부모)들이, 부모에게 풍족하게 지원만 받아온 사람들이 내 맘을 알까

알아도 대화가 통할 거란 믿음도 없어요..

왜 애초에 '가족'에 믿음을 깨트린 사람들이 내게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하라고 할까.

왜 그런 사람들이 결혼을 한답시고 애를 낳아서 이렇게 힘들게 할까.

 

왜 이런 얘기를 친구들에게도 말 못 하게 할까, 나는 누구에게 의지하라고.

이런 화가 동시다발적으로 너무 많이 나요...

엄마가 저를 키우느라 본인 인생이 없었다는 걸, 친부도 나름대로의 노력을 했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왜 어린 딸에게 미주알고주알 부부관계를 안 한 지 10년이 넘었네 등등 왜왜왜...

그런 식으로 감정 쓰레기통으로 사용했을까.

이런 식으로 몇 년이 지난 요즘에서야 너무 화가 납니다...

쓰다 보니 대책 없이 길어지네요.

 

제가 가장 혼란스러운 지점은,

1. 친부와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5년이 지난 지금도 모르겠다는 겁니다.

이대로 그냥 연락을 끊고 사는 게 맞는지. 얼굴 볼 자신은 없는데.

왜 그렇게 살까. 왜 그렇게 한심할까. 왜 그렇게 다른 아버지들처럼 삶의 의지가 없을까.

왜 나한테 잘해줬을까, 차라리 아동학대라도 해서 아예 쓰레기로 남아버리지.

그런데 또 저를 찾는 기색이 보이면 무서워서 SNS에 사진도 못 올려요.

엄마가 미울수록 '친부가 이래서 이혼하자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정말.. 스스로 싫습니다.

 

2. 원래 자식들은 부모와 안 맞아도 다 받아들이고 사는 걸까요?

엄마와 좋은 관계로 살고 싶습니다. 엄마는 저를 정말 사랑하세요.

근데 그 사랑이 제가 원하는 방식의 사랑이 아니라 버거워서 독립한 건데도 쉽지 않습니다.

싸우다 보면 못할 말 다 쏟아내면서 엄마에게 상처를 주는데,

정말 잘 살고 싶습니다. 어제보다 더 건강하게 살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 그저께 또 싸웠고 원인은 제 얘기를 흘려들은 것이었는데,

이제 연락도 안 받으시네요. 왜 제가 속상한 건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니 말투만 아니었으면 미안했을 거다'라는 조건부 사과.

제가 정말 싹수없는 불효녀인지, 다른 딸들은 그럼 무논리에도 수긍하며 사는 걸까요?

이러다 보니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만날 때 제가 '잘'해야만 할 것 같고 뭐든지 평가받는 기분입니다.

다른 집단에서의 칭찬과 인정에 과하게 집착하게 되고... 더불어 남도 경쟁상대로 보이고요.

마냥 서러워만 하시는 엄마가 너무 지칩니다..

사진_freepik
사진_freepik

 

답변)

안녕하세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빛나래입니다.

올려주신 사연을 잘 읽어 보았습니다. 사연자님께서는 부모님의 결혼 나이쯤 되면서 분노와 죄책감에 혼란스러워하다 최근 독립을 하신 것 같네요. 스스로 완벽하지 못할 것에 대한 불안, 다른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에 대한 집착이 생긴다 하셨어요.

부모님 사이에는 적절한 소통과 감정표현, 가정을 일궈 나가는 논의, 서로에 대한 신뢰와 책임을 쌓아가는 과정에 뭔가 어려움이 있지 않으셨나 추정이 되네요. 결혼생활의 고민들, 해결되지 않는 감정적 문제가 자녀의 욕구와 감정에 적절히 반응하지 못하게 하고 때로는 짜증이 되어 아이를 향하는 모습은 늘 가슴 아픈 부분입니다.

 

아이에게는 먹이고 입히는 것 다음으로, 감정의 표현에 대한 적절한 반응과 포용, 자신을 드러내도 나쁜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안심이 필요해요. 이게 부족하면 남에게 자신을 맞추거나 방어하느라 관심과 에너지를 지나치게 쏟고, 그러지 못할 때 불안이 뒤따르게 돼요.

엄마는 사연자님에게 애정 표현과 칭찬이 특히 부족했었나 봐요. 어린 사연자님은 내가 노력을 하면 엄마가 좋아할까 애써봤지만 좌절을 겪었던 것 같고요. 무언가를 자신 있게 해 내고 스스로 만족하는 영역이 잘 자라기 어려웠던 환경이었다고 생각돼요.

 

- 부모의 투사, 자녀의 한계

가족관계 내에서의 일들은 우리가 다 아는 사회적 통념에 영향을 받습니다. 자식은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에게 감사해야 하고 보답해야 한다는 것 말이죠. 이건 우리나라 사회에서의 가장 흔하고 강력한 도그마예요. 가족 내의 부정적인 문제들을 어디 가서 얘기하면 안 된다는 폐쇄적 특성, 고립성 또한 같은 맥락에서 생기고요. 이 때문에 개인의 성장을 가로막을 정도의 가족 문제임에도 분리와 극복이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위와 같은 결혼생활을 하느라 엄마 인생이 없었던 것, 아버지도 나름의 노력을 했다는 것, 이것은 그분들의 것이에요. '나는 당신의 무관심 속에 애 키우느라 고생을 했다', '나도 나름 노력을 했고 놀지만은 않았다'와 같은 입장은 부부 사이의 문제이지 내 문제가 아닙니다. 10년 동안 없었던 부부관계도 당연히 부부 사이의 문제이고 아이가 알아야 할 문제가 아니죠.

실제로 많은 가정에서 일어나는 문제가, 이러한 부부 사이의 문제를 자녀에게 투사하는데 자녀는 딱히 어쩔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연자님이 스스로를 감정의 쓰레기통이라고 표현할 정도니 또 한 번 마음 아픈 부분입니다.

 

- 죄책감과 분노

분노를 경험하기 전까지, 아마도 사연자님은 죄책감을 주로 느껴왔던 것 같고, 지금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도 고생한 엄마인데 내가 이해를 해 주고 참아야 해. 그렇게 못하면 나는 부족한 딸이야'와 같은 생각이 있으신지도 모르겠어요.

엄마에 대한 죄책감을 누군가 가져야 한다면 그게 누구일까요? 결혼 생활에 대한 책임을 공유하는 아버지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사연자님, 둘 중에 죄책감이 누구의 몫인지는 사실 자명해요. 하지만 남편 역할의 부재 속에 이러한 죄책감이 무의식적으로 자녀에게 전달되는 것을 볼 수 있고, 이것을 투사적 동일시라고도 불러요. 이렇게 외부로부터 강요된 죄책감은 그 자체로 내 본연의 분노를 느끼고 드러내지 못하게 해요.

 

사연자님이 성인이 되자 부모님은 이혼을 했고, 둘 사이의 문제는 종결된 듯 보이지만 엄마와 사연자님의 분리는 일어나지 못했어요. 이후 지속적으로 고민을 하다 독립에 용기를 내신 거예요. 아마도 독립을 하고 다른 관계와 세상을 경험한 후에야 분노라는 감정이 올라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분노는 처음으로 나 자신의 입장에 서서 느끼는 감정일 수 있어요. 죄책감과 분노 중에 어떤 감정이 나에게 강요된 것이고, 어떤 감정이 나 자신의 것인지를 생각해 보세요. 이 분노는 내부를 향하는 이유모를 죄책감보다는 분명 건강한 것이고, 무기력한 상태를 정상적으로 되돌리는 첫걸음이기도 합니다.

죄책감에 의해 억제되었던 분노가 올라오는 것은 오히려 지금과 같은 상황을 벗어나게 하는 무기가 되기도 해요. 나를 힘들게 하는 대상과 거리를 두게 해 주고, 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변화를 일으킵니다. 원망에 머무르지 않고 실천으로 이어진다면 말이죠.

사진_freepik
사진_freepik

 

- 혼란스러운 지점들

1. 사연자님은 옆에 없는 친부에 대한 어떤 감정으로 혼란스러워하시는 것 같아요. 엄마로부터의 독립 과정에서 그 감정을 다시 한번 떠올리시는 것 같고요. 이 지점에서 도피가 아니라 '정리'라 일컫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실제의 친부와 무언가 꼭 마무리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사연자님의 선택입니다. 안심하세요. 준비되지 않아 만나지 않는 것을 도피라고 하지 않아요. 내 마음속에서 '나는 착하고 순종적인 딸이어야 한다'는 것을 덜어내는 것, 그 자체가 정리라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딸로서 사랑받고, 칭찬받고, 기쁨의 눈빛을 받는 경험이 부족했던 것이 마음 아픈 부분이죠. 마음에 그로 인한 빈 공간이 있다면 여기에 투사된 감정이 자리 잡는 것 같기도 해요. 가장인 남편이 한심하다거나, 사이가 안 좋은 아내가 밉다거나 하는 부모님 각각의 투사된 감정을 사연자님이 느끼시는 것 아닌가 싶어요.

 

2. 사랑은 당연히 서로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뤄질 때에 건강한 것이겠지요. 어느 한쪽만의 죄책감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관계에서의 평가받는 기분, 칭찬과 인정에 대한 집착 또한 엄마와의 관계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연장선으로 외부 관계를 인식할 때 생기는 문제 같아요.

엄마도 본인의 문제에서 벗어나셔야 하고, 혼자서 어렵다면 치료적 도움도 받으셔야 합니다. 하지만 그건 엄마의 몫이에요. 엄마가 바뀌지 않는다면,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구시대적이지만 나름의 사랑 표현 방식이구나'와 같이 주입된 합리화를 가질 필요는 없어요.

나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의 분노를 기반으로 내 길을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독립이라는 첫 단추 이후의 것들에 초점을 두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관계에 대해서도 엄마와의 관계에서 벗어나 다시 바라보는 경험이 필요해 보여요. 결국 두 사람은 분리가 필요한 관계일 수 있습니다. 이미 사연자님이 그것을 본능적으로 시작하는 단계에서 질문을 주신 것 같고요.

 

- 예상되는 문제들

먼저, 지금과 같은 혼란 속의 죄책감이 예상됩니다.

독립하여 엄마를 떠난 것에 대한, 또는 아직도 남아있는 미움에 대한 죄책감 말이죠. 하지만 이것은 투사적 동일시로 덮어씌워진 죄책감과 다르다는 것이 중요해요. 스스로 행동하여 독립하는 과정에서의 죄책감은 지금 하는 행동이 잘못이라는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긍정적인 변화의 증거예요.

 

슬픔과 공허함, 외로움 같은 새로운 감정 문제도 겪으실 수 있습니다.

독립을 했을 때의 자신감 문제, 이제는 내 옆에 가족이 없다는 두려움도 가능하고요. 이것 역시 벗어나는 과정에서 당연한 내 안의 감정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병든 것과 정상적인 성장통을 구분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다 보면 좋아지는 부분입니다.

사실 세상 보통의 다른 관계가 훨씬 더 복잡 미묘하고 어려운 측면도 있지요. 가족을 벗어났다고 꼭 더 좋은 사람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도 다른 관계가 구축되고 나만의 길을 가는 것 만으로 나아지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예를 들면, 새로운 관계에서는 '나는 좋은 딸인가 아닌가'와 같은 흑백논리로 생각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모든 대인관계가 영원한 짐이 아니라는 것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요. 건강한 부분이 자연스레 작동하고 거기서부터 성장하게 되는 과정이죠. 엄마와의 관계는 그다음에 다시 생각하셔도 돼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 주변의 한 관계로서 받아들일지를 선택하시면 됩니다.

 

정리하자면,

사연자님은 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고, 그것을 선택하실 수 있어요.

분노는 그러한 변화의 신호이자 첫걸음이에요.

부모니까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법칙은 없습니다.

다른 관계로, 앞으로 나아가시길 바랄게요.

- 참고: [이제 독성 관계는 정리합니다], 권순재, 도서출판아름다운사람들

 

사연자님의 이야기를 읽으며 참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어떤 말씀을 드릴까에 대해 이만큼 적절한 내용이 없다고 판단되어서, 많은 부분 이 책을 참고하고 인용했어요. 여기 정신의학신문에서도 활발히 활동하시는 권순재 선생님의 책이에요. 책을 직접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고, 독립 이후의 여러 가지 주제들이 힘드시다면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와 상담도 생각해보시면 좋겠어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