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장기중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노벨상 문학상을 수상한 앨리스 먼로의 단편 소설 '곰이 산을 넘어오다 (The bear came over the mountain)'는 치매에 걸린 아내라는 상황을 통해 기억과 사랑에 대한 담론을 우리에게 던진다. 대학교수였던 남편 그랜트와 그의 아내 피오나는 50년을 함께 한 부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랜트는 온 집안 여기저기서 아내가 적은 '식기, 행주, 칼'같은 기억을 상기시키기 위한 메모들을 발견한다. 피오나의 기억력 문제는 악화됐고 점점 그녀 답지 않은 의외의 행동을 보였다. 알츠하이머 병이 심각해지고 있음을 스스로 인식한 피오나는 남편에게 자신을 요양원에 데려다 달라 부탁한다. 

그랜트는 메도레이크라는 요양원에 아내를 입소시키고 그곳 규칙에 따라 한 달간 피오나와 떨어져 지낸다. 첫 방문을 위해 메도레이크에 간 그랜트는 옛날의 진지한 설렘을 다시 느끼며 아내를 찾지만, 피오나는 50년간 같이 산 남편을 알아보지 못한다. 게다가 그녀는 요양원에 같이 입소한 오브리라는 남성과 사랑에 빠져 있다. 그랜트는 아내가 장난을 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외에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할 수 있는 건 둘을 쫒아다니며 기웃거리다 닫힌 방문 뒤의 그들을 상상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요양원에 잠시 머물렀던 오브리가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며 피오나는 상실감에 시름시름 앓는다. 결국 그랜트는 피오나를 위해 오브리의 아내를 찾아가 그를 다시 요양원에 입소시켜 주길 부탁한다. 그리고 다시 아내를 만나러 요양원에 돌아온 날, 놀랍게도 피오나는 다시 그랜트를 기억했다. 

'당신이 와서 기뻐요. 그냥 가버린 줄 알았어요. 나 따윈 신경 쓰지 않고. 버려두고 간 줄 알았어요. 버리고. 나를 잊어버리고' 그랜트는 그녀의 하얀 머리카락, 분홍빛 속살, 사랑스러운 두상에 얼굴을 기대며 말한다. '그런 적은 없어. 단 일 분도.' 

 

사진_freepik
사진_freepik

 

기억하기에 사랑할 수 있다. 

그랜트는 대학교수 시절 외도로 아내 피오나에게 절대 잊히지 않을 마음의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인생의 아이러니는 치매로 인해 피오나와 그랜트의 입장을 뒤바꿔 놓는다. 피오나의 기억에서 그랜트가 사라지자 바로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랜트가 아내의 상처와 회한을 이해하고 자신이 아닌 그녀를 위한 선택을 하자, 피오나는 다시 그랜트를 기억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마 피오나의 기억은 완전히 돌아온 게 아닐지 모른다. 피오나의 기억은 남편에게 상처 받기 전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얼룩을 지울 두 번째 기회를 갖는 것일 수도 있다. 치매가 피오나의 기억을 어디로 데려가는지에 따라 그랜트는 잊지 못할 상처를 준 사람에서 처음 보는 남이 되기도 하고, 다시 그녀 인생에서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이 된다. 다시 재회했다는 것에 해피엔딩 같지만 슬프다. 앞으로 그녀의 기억에 따라 그들의 사랑이 변해갈 것을 알기 때문일지 모른다. 

기억이 사랑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기억을 통해 우리는 '나'라는 존재를 만들고 그다음 의식이 '너'라는 존재를 필요로 할 때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한편으로 마음이 허무하다. 사랑이 이렇게 가벼운 것이었던가? 수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사랑을 노래하는 우리에게 마치 바람에 구르는 낙엽처럼 기억에 따라 쉽게 뒤집히고 쓸려 다니는 것이 사랑인가? 수많은 영화, 드라마, 소설에서 치매로 기억을 잃어버렸을지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결국 다시 사랑하는 사람과 재회하는 건 우리의 바람을 녹여낸 것뿐인가? 빅터 프랑클의 말처럼 가장 극단적인 환경에서 인간 본성에 대해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면 치매는 인간의 사랑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줄지 모른다. 아는 선생님으로부터 한 치매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할머니는 항상 프로그램실에 앉아 두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한 곳을 응시했다. 할아버지와 다른 할머니 한 명이 서로 대화를 하고 있다. 할머니는 옆에 있는 치료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저것이 내 남편을 저렇게 홀릴 줄 알았어. 여우 같은 것.' 

할머니는 다시 입을 다문 채 둘을 지켜봤다. 치료진은 혹시라도 할머니가 뭔 일이라도 칠까 봐 조심스럽게 관찰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단지 둘 사이를 계속 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진_freepik
사진_freepik

 

사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남편이 아니었다. 단지 인사를 나눌 정도의 관계일 뿐 할머니와 어떤 연관도 없었다. 할머니의 마음에 어떤 흐름이 할아버지를 남편으로 각인시켰는지는 알 수 없다. 단순히 치매 증상의 망상적 오인일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셋 사이에 벌어지는 미묘한 관계다. 만약 정말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남편이라면 다른 여자와 노닥이고 있는 할아버지를 그냥 지켜만 보고 있다는 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현실이었다면 가서 상대방 머리채를 쥐어 잡거나 아니면 할아버지에게 소리치며 따지는 게 더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그냥 성격 탓일까? 상대방의 외도를 어느 정도 마음에서 받아들이며 현실을 지키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그 이후 보이는 감정 반응이 있는데 할머니에게 특별히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또는 치매 환자들이 종종 보이는 자신의 경계를 지키고자 하는 반응일 뿐일까. 치매에 영향을 받고 있는 뇌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해석하고 이해하는데 과부하를 받기에 그럴 만한 상황을 미리 피하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또는 단순히 나쁜 치매 증상의 무감동증으로 인한 결과인가? 그렇게 이해하기에 사랑과 질투는 너무 생생한 감정이다. 

앨리스 먼로의 소설처럼 현실에서도 할머니의 치매는 기억의 왜곡을 거쳐 이상한 삼각관계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셋 사이에서 벌어지는 관계를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보자. 치매 환자에게 사랑은 과거 기억에서 흘러나온 오래된 유물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환자의 기억이 어디에 머물고 있느냐 어떤 망상적 세계에 있느냐에 따라 사랑 또한 달라진다고 이해했다. 그런데 할머니는 지금 어떤가. 그녀는 '지금'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하고 있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흔한 삼류 드라마의 삼각관계로 보이고 게다가 망상에 기반하고 있지만, 중요한 건 지금 할머니는 상대방에게 사랑과 질투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혼자 스스로에게 사랑에 빠지면 '자기애', 둘 있으면 '사랑', 셋이 되면 '질투'가 된다. 영화나 드라마, 소설에 나오는 열정적인, 젊음이 가득하고 로맨틱한 사랑은 아닐지라도, 남들이 이해하기 어려울지라도 괜찮다. 원래 사랑은 그런 감정이 아닌가. 

 

사진_freepik
사진_freepik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의미가 아니라 '의미 있다는 느낌'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아직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느낌과 동일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할머니에게 중요한 것은 그 남자를 다시 내 곁으로 데려오거나 질투심에 빠져 상대 할머니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닐 것이다.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지보다 현재 그 감정에 빠져 혼자 곱씹고 있는 그 자체가 중요할지 모른다. 

인간다움을 잃어가는 비극적인 치매 안에서도 인간은 사랑을 추구한다. 그리고 언젠가 그 작은 인간다움조차 사라지게 되면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게 될지 모른다. 마치 물 밖을 나온 물고기가 마지막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입을 뻐끔거리듯, 인간다움이 사그라들기 전까지 멈추기 어려운 것, 그게 사랑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일지 모른다. 그 마음의 틀 안에 어떤 내용물이 채워질지언정, 위에서 아래로 흐르려는 그 욕동은 막을 수 없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사랑이라는 단어가 주듯 아름답고 평온한 모습이 아니라 얼마 남지 않은 인간다움에 대해 거칠게 내뱉는 마지막 한숨 같은 가슴 아픈 행위이다. 

 

치매가 끌고 가는 기억에 따라 '사랑'은 변할 수 있어도 '사랑할 수 있다'는 본능은 마지막까지 남아있다. 그리고 그 인간다운 행위 옆에서 남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지켜봐 주는 것이다. '곰이 산을 넘어온다'에서 자신을 잊고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아내 피오나를 보며 절망에 빠진 그랜트를 보며 간호사가 위로하며 했던 말처럼 말이다. 

그럴 수도 있어요. 오늘은 못 알아봤을 수도 있죠. 그러나 내일은 알 수도 있고요. 정말이지 예측할 수가 없어요. 아시지 않아요? 상태가 계속해서 달라지지만 우리가 그걸 어떻게 할 수는 없어요. 한동안 오가다 보면 그런 상황들을 이해하게 될 거예요.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것도요. 그날그날의 상태를 받아들여야 해요. 

누구나 사랑을 한다. 

'당신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다'는 말을 들었다더라도 그 말을 믿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것이 서툴고, 두려움에 도망가거나, 용기가 없어 잠시 뒤로 물러날지라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사랑은 더 강력한 욕동이다. 치매와 죽음 같은 인간다움을 잃어가는 순간에서조차 말이다. 그렇기에 사랑받는 느낌도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만, 사랑하고 있다는 경험은 그것을 뛰어넘어 그 사람을 확장시킨다. 치매가 말해준 사랑이란 그런 것이었다.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