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꼭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게시판에 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학창 시절에는 학교폭력, 집안에서는 폭언, 폭행에 시달리던 사람으로 중학교 때 시작했던 자해를 아직도 끊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어디선가 소개받았다며 보낸 병원에 잠깐 치료를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제 문제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는 선생님을 만났고, 집에서는 계속되는 가족들의 정신병자라는 말, 세상에 힘든 사람이 너뿐이 아닌데 유난 떨지 말라는 말 등 좋지 않은 말들과 시선을 받았습니다. 남들 다 힘들고 아픈데 네가 나약해서 이겨내지 못하는 문제 가지고 병원에 다니지 말라는 어머니의 통보에 결국 무리하게 병원을 끊고 어찌어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억지로 병원을 끊고 약도 끊었지만 약 없이 너무 힘들 거라는 제 예상보다 괜찮은 것 같았습니다.

잠을 못 자는 주간도 지나서 중간에 많이 깨고 잠들기 어려워도 전처럼 겨우 한두 시간 자고 깨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은 할 수 있을 만큼 자게 되었고, 너무 무기력하여 하루 종일 잠을 자는 날도 분명 있었지만 큰 지장은 주지 않았습니다. 우울감도 바쁘게 생활하면서 한구석에 밀어놓고 가끔 찾아오더라도 저에게 상처 내는 방식으로 제 생활을 이어가는 중입니다.

 

나름대로 일도 해가며 잘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약 반년 전부터 문제가 이전보다 심각하게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좋아하던 책도, 영화도 집중할 수 없고 제대로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며, 어떤 문장을 읽든지 이게 무슨 뜻인지를 한참 고민하고, 글 쓰는 일도 좋아했었지만 읽어보면 읽어볼수록 맥락과 문장이 엉망진창입니다.

잠깐 나가서 산책하는 것도, 이 앞에 슈퍼에 나가는 것도, 볼일이 있어 밖에 나가는 것도 너무 힘들고 지친다는 생각이 듭니다. 악몽을 꾸면 집에 저를 짓누르는 것 같아 새벽에 집 밖으로 뛰쳐나가기도 하고, 심장이 빠르게 뛰고 불안한 감정이 들기도 하며, 쉽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며 잠들더라도 자주 깨고 다시 잠들기가 어렵습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인지 같은 일을 똑같은 방식으로 계속 실수하고, 저를 자책하는 일도 늘었고, 남에게 쉽게 화가 나며, 자주 잊어버리고 멍하게 서 있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금방 들은 말도 잊어버리기 일쑤고, 메모해놓더라도 무엇 때문에 메모를 남겼는지, 어젠 무엇을 했는지 오늘 오전엔, 오늘 오후엔 하다못해 방금까지 무엇을 했는지 잊어버리는 경우도 일상다반사입니다. 어느 날은 숨이 쉬어지지 않고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렁거리며 곧 쓰러질 것 같아 주저앉아 있던 적도 꽤 있었습니다.

이런 저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위장병은 끊이질 않고 항상 날이 서 있고 예민하며, 작은 일에도 쉽게 짜증이 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벼랑 끝에 몰린 것처럼 초조하고 숨이 막히는 날이 반복되다 보니 몰려오는 우울감도 이제 이겨낼 수 있는 자신이 없고, 잠을 자다 이대로 죽었으면, 외출했다 사고라도 났으면.. 하는 등의 저 자신의 인생을 끝내고 싶다는 마음만 저를 짓누릅니다. 제 감정 하나 이겨내지 못하고 휘둘리는 것도, 이런 저 자신이 싫은 이 상태도 너무 지칩니다. 다시 병원을 찾기엔 또 상처와 스트레스로 남을 것 같고 가지 않고 버티자니 정말 이대로 무너져버릴 것만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쯤 되니 정말 가족들과 남들의 말대로 제가 문제인 것 같고 별 것 아닌 일에 유난 떠는 사람 같으며 남들보다 편한 삶을 살면서 그것 하나 이겨내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대로 죽자 생각하면 만에 하나라도 살아나서 듣게 될 가족들의 폭언과 날 선 말이 너무나도 두렵고 아파서 그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앞에는 낭떠러지, 뒤에는 굶주린 맹수라도 있는 기분입니다.

정말 다른 사람들 말처럼 제가 잠시 우울하고 힘든 이 제가 느끼는 감정 하나 이겨내지 못하는 그런 나약한 사람이라서 마음먹기 나름인 문제 가지고 유난 떨며 멈춰 서있는 상태인 걸까요?

저는 지금도 충분히 지치고 힘들다고 느끼고 있으며 이 상태로 멈춰 선 채 앞으로 나아갈 자신이 없는데 남들은 저보고 계속 나아가라고 합니다.

저는 이 상황을 벗어나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 시간에 갇혀 기약 없는 시간을 계속 멈춰 서있게 될까요?

 

사진_픽셀
사진_픽셀

 

답변)

안녕하세요. 정신과 의사 이두형입니다. 주신 사연을 아픈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누구라도 힘들 만한 시간들을 보냈음에도 그 아픔을 충분히 공감받을 만한 곳, 깊이 털어놓을 만한 곳 한 곳 없이 홀로 온전히 이를 안고 지내오셨을 마음에 대해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우선 드립니다.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슬픔과 좌절 앞에서 우리의 마음은 차라리 감정들을 느끼지 않는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마음의 깊이는 끝이 없을 정도로 깊고, 그중에는 평소의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공간들도 많습니다. 처리되지 않는 아픔, 감당하기 힘든 불안 같은 감정에 압도당할 때면 우리는 이러한 감정들을 보이지 않는 마음속 공간으로 밀어놓곤 합니다. 이는 미처 치우지 못한 방에 손님이 찾아왔을 때, 이불 밑으로 급히 지저분한 짐들을 밀어 덮어 놓는 것과 같습니다. 기쁨도, 슬픔도, 아팠던 기억도 우선은 보이지 않는 마음 한구석으로 밀어둔 채 당면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들과 기억들이 보이지 않는 마음의 공간으로 밀어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모든 순간과 그때의 감정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나는 힘들 만한 자격이 없어, 다른 사람들도 다 이만큼 힘들게 살아, 과거에 사로잡혀 힘겨워하는 것은 마음이 나약하기 때문이야.'라는 생각에 그러한 마음을 외면하다 보면, 그 힘들었던 마음들은 내가 모르는 무의식의 공간에 쌓여 불안과 두려움, 알 수 없는 공허감, 신체적인 불편함으로 표현되곤 합니다.

 

자기 자신보다 스스로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장 깊은 이해와 위로를 건넬 수 있는 존재 역시 자기 자신입니다. 어떠한 마음에도 늘 이유가 있습니다. 부적절한 슬픔, 옳지 않은 아픔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록 타인들은 자신의 기준으로 나의 아픔을 부정할 수 있으나 나 자신은 알고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내 삶을 아끼고 소중히 하려 노력해 왔는지. 지금의 나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그 마음에 대한 깊은 공감과 이해, 위로입니다.

지금의 내가 만약, 그토록 힘들었던 과거로 돌아가 그때의 나를 만난다면 어떤 말을 건넬까요. 너는 왜 그렇게 살았니, 왜 그렇게밖에 살지 못했니 라며 질책하고 다그칠까요. 아마 그보다는 외롭고 막막한 마음을 안고 울고 있는 그 아이의 어깨를 감싸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이어가 주어서 고맙다고, 너무 고생이 많다고, 그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다독여주진 않을까요. 비록 지금의 나 역시 힘들 때가 많지만, 그 덕분에 나름대로의 삶을 이어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진 않을까요. 그러한 말을 지금의 내게, 내 마음에게 건넬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증상적인 측면으로 보자면, 심한 우울과 불안은 되려 무감동, 무기력, 무의미한 마음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울과 불안은 과도한 걱정과 생각의 반추로 이어져 전반적인 집중력과 인지기능의 저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사연자분이 적어주신 말씀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사연자분의 마음에는 충분히 처리되고 해소되지 않는 우울과 불안이 잔존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타인들이 인정해 주지 않는 것으로 인해 나는 힘들 자격이 없다, 모든 것은 내 의지의 부족으로 인한 것이라고 단정을 지으시기보다는 조금 더 내 깊은 마음속에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아픔을 이해하고 이를 다루기 위해 가까운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한 가지 첨언을 드리자면, 타인과 세상은 나의 아픔에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해 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다들 나름대로의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고 소중한 사람이 힘겨워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곁에 있는 이들에게도 힘든 일이 될 수 있기에 그러한 아픔들을, 그가 마음만 먹으면 극복할 수 있는 당사자의 의지 문제로 돌리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스스로는 알고 있습니다. 그 힘든 과정에서도 내가 얼마나 진심을 다해 살아왔는지, 얼마나 행복과 평안을 원했는지.. 지금의 내 삶이 얼마나 괜찮은지, 얼마나 인정해 줄 만한 것인지의 영역을 넘어, 그간의 나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시고 보듬어 주시기를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사연자분의 평안과 안식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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