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록의 [마음속 우물 하나] (10)

[정신의학신문 : 사당 숲 정신과, 최강록 전문의] 

 

새해가 밝았다. 하지만 여느 해처럼 새로운 태양을 맞이하기 위해 동해로 달려갈 수가 없었다. 해는 바뀌었으나 코로나 사태는 계속되기 때문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바이러스의 기세는 갈수록 거세다. 올해도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코로나로 시작해 코로나로 일관될 가능성이 크다. 2020년을 상징하는 장면 중 가슴을 울렸던 몇 가지 장면이 있다.

 

# 장면 1: 대구 동산의료원에서 코로나 진단검사를 하고 확진 판정을 받은 환자들을 간호하느라 밤낮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격무에 시달리던 한 간호장교가 잠깐 쉬는 틈을 이용해 마스크를 벗자 코에 덕지덕지 반창고를 붙인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오랫동안 마스크를 쓴 채 업무에 임하느라 코가 다 헐어버려 계속해서 반창고를 붙이고 또 붙인 때문이었다.
 

# 장면 2: 청주 흥덕보건소 선별진료소에 투입된 의료진이 폭염 속에 쉴 새 없이 일하다가 잠깐 휴식 시간이 주어지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거나 의자에 기대거나 복도 가장자리에 웅크리고 누워 쪽잠을 자면서 지친 몸을 달랬다. 감염을 막기 위해 레벨D 방호복을 착용하면 보호 장비로 온몸을 꽁꽁 싸매야 해서 땀이 비 오듯 흐르고 탈진 상태에 이르게 된다.
 

# 장면 3: 고양시 한 요양병원에서 확진된 환자를 확진된 요양보호사가 돌보는 모습이 공개되어 충격을 줬다. 요양보호사 A씨는 코로나 진단검사에서 양성 판정을 받았으나 그를 대체할 인력이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확진 환자를 돌보는 일에 투입되었다. 그는 서 있지도 못할 만큼 힘들지만, 어르신들을 돌볼 사람이 없어 수발을 들고 있는 형편이라고 하소연했다.

 

해를 넘기며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코로나 업무에 투입된 의료진의 피로감과 스트레스는 한계점에 도달했다. 언제 끝날지 모를 이 참혹한 전쟁에서 최전선을 지키는 전사인 의료진에게 기약 없이 애국심과 사명감만을 강요하며 인내를 기대할 수는 없다. 이들이 무너진다면 코로나 사태는 의료 붕괴를 넘어 국가적 대재앙으로 이어질 것이다.

간호사, 의사, 요양보호사를 비롯해 사회복지사, 보육교사, 교사, 심리상담사, 언어치료사, 재활치료사 등 다른 사람, 특히 병자나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고 치료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날 수 있는 증세가 바로 조력자 증후군(Helper Syndrome)이다. 남다른 직업 정신과 사명감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돕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감이 생겨, 남의 일에는 온갖 정성을 기울이며 많은 신경을 쓰면서도 정작 자신의 어려움이나 괴로운 문제는 남에게 털어놓거나 도움받을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이타적인 삶을 사느라 자기 자신이 소진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업무의 과중함과 심적인 부담감이 쌓이다 보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우울증으로 이어지고 심각한 경우 자살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사진_픽사베이
사진_픽사베이

 

신약성경 누가복음 10장에는 그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 놓고 떠났다.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또 어떤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그냥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마침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다음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십시오. 만약에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오는 길에 갚아드리겠습니다.”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낯 모르는 사람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선행을 베푸는 사람을 상징한다. 사제나 레위 사람은 당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많이 배우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던 특권층이다. 그들은 가엾은 이웃의 친구가 되어주지 못했다. 반면 천대받고 괄시받던 계급이었던 사마리아인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해 불행한 이웃을 돌봐주는 친구가 되었다.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해 진정으로 이타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강도 만난 사람의 참 이웃은 사제나 레위 사람이 아닌 낮은 신분의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조력자 증후군이 있는 사람은 주변으로부터 칭송을 받는다. 흔히 그들 두고 천사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개중에는 환자나 약자를 돌보면서 마치 자기 일처럼 감정이입을 하면서 돌보던 사람이 불행을 당하거나 사망할 경우,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힘든 사람을 보면 돕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것이 바로 맹자가 이야기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그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말했다.

하지만 자신을 극도로 몰아붙이고 지나치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남을 도와주려고 하는 경우는 좀 예외적이라 할 수 있다. 소명 의식이 충만해져서 종교적 신념을 좇느라 전력을 다하는 사람에게서도 이런 상황이 발생한다. 이들은 남을 극도로 도와주는 행위로써 자기만족을 느끼며,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한다. 어쩌면 남을 돕는 행위를 통해서 자기만족을 실현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공익적 성취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이런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많이 발생한다. 미련하게 보일 정도로 남을 도와주려는 사람들 이야기다.

 

해마다 연말이면 거리마다 자선냄비가 등장한다. 구세군 봉사자의 종소리를 듣고 ‘아, 벌써 연말이구나.’, ‘오, 이번 겨울에도 어려운 사람들이 많겠지?’, ‘나도 힘들지만, 더 곤란한 사람들도 많을 거야.’ 생각하면서 작은 돈이나마 온정을 더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곤 한다.

그런데 이번 겨울에는 그렇지가 못한 것 같다. 살기가 너무도 힘든 까닭이다. 코로나 사태의 장기화로 기업은 기업대로, 개인은 개인대로, 가장은 가장대로, 청년은 청년대로 지난한 괴로움 속에 여유가 없어진 탓이다. 온종일 은종을 흔들어대는 구세군 봉사자의 팔이 더욱 버거워 보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모은 거금이나 어렵사리 일해서 모은 소중한 돈을 몰래 쾌척하는 선행이 이어지는 건 가슴 짠한 감동적인 일이다.

 

점점 살기 힘들어지고, 양극화가 심해지는 데다 코로나 사태까지 오랫동안 이어지면서 이타적 삶을 산다는 게 너무 힘들게 되었다. 나와 내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챙기기도 버겁다.

그러나 세월이 아무리 험해도 이를 극복하고 더 나은 세상, 희망찬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이타적으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그들에 의해 이 세상이 유지되고 발전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제풀에 쓰러지지 않도록, 조력자 증후군에 신음하지 않도록 둘러보고 챙겨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건네는 것으로 새해를 시작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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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한양대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의료법인 삼정의료재단 삼정병원 대표원장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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