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장원의 ‘직장 남녀를 위한 오피스 119’ <16>

[정신의학신문 : 민트 정신과, 조장원 전문의] 

 

이 대리는 요즘 박 대리 생각만 하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동안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흉금을 털어놓고 지내는 사이라 해도 이건 좀 심하다 싶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업무와 관련된 건 그렇다 치고 개인적인 것까지 서슴없이 부탁하는 걸 보면 정말 어이가 없다.

“이 대리, 나 내일부터 휴가거든? 나 없는 동안 이 일 좀 대신 처리해줘. 부탁해.”

어제는 버럭 화까지 낼 뻔했다. 박 대리가 휴가를 가면서 자기 일을 이 대리한테 떠맡긴 것이다. 대체업무 지정자가 따로 있는데도 굳이 자신에게 일을 넘기고 가는 심사가 뭔지 궁금했다.

‘내가 그렇게 만만한가? 아니면 우스운가?’
 

박 대리와의 사이가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입사 동기인 박 대리와 이 대리는 소문난 단짝이었다. 어떨 때는 친형제처럼 보일 정도였다. 눈빛만 봐도 속마음을 알아챌 만큼 잘 맞았다.

‘박 대리를 보면 마치 또 다른 나를 대하는 것 같아.’

심지어 이런 생각까지 한 적도 있었다. 일이 너무 많아 지칠 때도, 힘든 일을 맡아 버거울 때도, 난관에 봉착해 어려움을 겪을 때도 항상 옆에서 박 대리가 힘이 돼주었다. 고민이 생겼을 때 퇴근 후 함께 식사하면서 속내를 털어놓으면 언제나 잘 듣고 위로해주던 게 바로 박 대리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런 박 대리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지나칠 만큼 친하게 지내다 보니 두 사람 사이에 경계가 무너져버린 것이다. 박 대리는 이 대리에게 아무거나 다 부탁하며 떠맡겼다. 그러면서도 미안해하지 않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 대리는 박 대리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공과 사를 분명히 하면서 서로 지킬 건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 대리가 박 대리에게 정색하고 선을 지켜달라 말했다면 박 대리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부탁을 거절하면서 안 되는 이유를 설명했다면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대리는 박 대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하는 순간, 두 사람 관계가 깨지거나 멀어질 것 같아 두려웠던 까닭이다. 속으로는 불만이 가득하면서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은 채 박 대리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면서 그렇게 지냈다. 그러는 사이 이 대리 마음속에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응어리가 켜켜이 쌓여갔다. 점점 회사 가기도 싫어졌다. 박 대리를 대면하는 게 껄끄러운 것이었다.

이 대리의 학창 시절 모습도 지금과 비슷했다. 평생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베프가 생기길 원했다. 그러다가 막상 좋은 친구를 사귀게 되면 무조건 잘해주려다가 스스로 상처를 입곤 했다. 결국은 힘에 겨워 떨어져 나간 건 이 대리 자신이었다. 홀로 있으면 외로워서 견딜 수 없으면서도 친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상처 받고 제풀에 지쳐버리는 스타일. 이 대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사진_픽사베이

 

염세주의자로 잘 알려진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쓴 책 『소품과 단편집(Parerga und Paralipomena)』에는 고슴도치 이야기가 등장한다. 몹시 추운 어느 겨울 고슴도치들이 얼어 죽지 않으려고 서로에게 다가갔다. 온기를 나누면 추위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몸에 돋아난 날카로운 가시 때문에 서로를 찌르게 된 것이다. 온기를 나누기는커녕 아파서 피가 날 지경이었다. 고슴도치들은 놀라서 떨어져 앉았다. 추웠지만 아픈 것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조금 지나다 보니 너무 추웠다. 가시가 돋지 않은 머리와 배 부분으로 온기를 나누면 되겠지 하고 다시 한데 모였다. 이번에도 가시가 서로에게 상처를 냈고, 이를 견디기가 너무 고통스러웠다. 또다시 떨어졌다. 고슴도치들은 겨우내 이런 식으로 뭉쳤다 흩어지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 같은 상황을 고슴도치의 딜레마라고 한다. 과연 고슴도치에게는 어느 정도의 거리가 필요한 걸까? 모였다 헤어지기를 거듭하던 고슴도치는 마침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서로 공존할 수 있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요즘 말로 하면 거리 두기다.

 

가까이하면 아프고 멀리하면 외로운 딱한 처지는 고슴도치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관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너무 가까우면 상처를 받아 아프고 너무 떨어지면 춥고 외로워서 힘들다. 고슴도치처럼 서로를 찔러 아프게 하지 않으려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필요하다.

이 세상에 가시 없는 사람은 없다.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저마다 뾰족한 가시 하나쯤 품고 산다. 어쩌면 수많은 가시가 내 등 뒤에 돋아 있을 수도 있다. 따라서 내 딴에는 온기를 주기 위해 다가갔지만, 그것이 상대방에게는 가시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다. 갈등 없는 인간관계는 불가능하기에 드러나지 않는 갈등이 있다면 한쪽이 다른 한쪽을 계속 찌를 수도 있다. 본의 아니게 내가 가진 가시 때문에 다른 사람이 상처 받고 아파할 수 있다는 생각, 모든 인간관계에서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하며 상대방을 배려한다면 외롭거나 상처 받는 일이 많이 줄어들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가시에 찔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거리를 둬야 한다. 아프지 않기 위해서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다. 일단 살아남기 위해서다. 연락하는 횟수를 줄인다거나, 회사 밖에서는 만나지 않는다거나, 꼭 필요한 일 외에는 접촉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다가가면 찔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적정 거리가 관계 유지 거리다.

상대방에게 내가 찔려서 아프다는 사실, 내가 상처 받아서 힘들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도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위 사례에서 박 대리가 이 대리에게 한 행동은 의도적인 게 아닐 수 있다. 이 대리를 힘들게 하려고, 찌르려고, 상처 주려고 한 행동이 아닐 수 있다. 그러므로 박 대리는 이 대리가 상처를 받았다거나 아파한다거나 하는 사실을 모른다. 이 대리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았기에 알 수가 없다. 알게 된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다만 이를 알릴 때, 그 의도가 불만을 표현하거나 지난 일에 대해 항의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좋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다시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이를 만들려고, 서로 공존하면서 더 나은 관계를 구축할 목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임을 친절히 설명해야 한다.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집단 심리학과 자아의 분석(Group Psychology and the Analysis of the Ego)』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슴도치의 딜레마가 없는 관계는 어머니와 아들 관계밖에 없다.”

어머니와 아들 관계 외에 세상 모든 인간관계에는 다 고슴도치의 딜레마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일정한 선을 넘지 않도록 하는 적당한 거리 두기가 필요하고, 아무리 어렵고 힘든 사이라도 언젠가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마지노선을 설정해두는 지혜가 필요하다.

가장 좋은 인간관계는 중용의 철학이 적용된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다. 차와 차 사이에도 안전거리가 반드시 지켜져야 하듯, 인간관계에도 안전거리가 있어야만 사고가 나지 않는다.

 

※ 본 기사에 등장하는 사례는 이해를 돕기 위해 가공된 것으로 실제 사례가 아닙니다.

 

 

*  *  *
 

정신의학신문 마인드허브에서 마음건강검사를 받아보세요.
(20만원 상당의 검사와 결과지 제공)
▶ 자세히보기

 

조장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민트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저서 <나를 지키는 심리학>
전문의 홈 가기

관련기사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