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저는 40대 남자이며 평범하게 살아가던 중 이혼을 겪으며 인생이라는 여정의 어느 지점에서 갈피를 못 잡고 머물러 있는 것 같아요. 우선 저는 아이가 있고 앞서 말했듯 그냥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평범한 가장으로 가족만 알고 영원할 것만 같이 살았습니다. 물론 아내와도 사소한 일로 다투기도 하고 때 다정할 때도 있고 평범했습니다.

그런데 권태기가 찾아온 걸까요... 자세한 얘기는 끝도 없고 점점 사이가 멀어지고 급기야는 선이 넘는 일들이 벌어지고 제가 가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협의가 안 되어 소송으로 이어졌고 사실 객관적으로 봐도 제가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아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은 진즉 헤어질 것을 저의 순진함과 착함 고지식함이 계속 힘들게 한쪽 끈을 놓지 않고 계속 잡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소송에서는 억울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어려서 엄마가 유리했고 결국 양육권도 엄마 쪽에.. 그리고 재산 분할도 저희 쪽이 아내 쪽보다 월등히 돈이 많았으므로 상당 부분 빼앗긴 부분이 있습니다. 왜 제가 이혼을 원하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도 잘못한 게 아니라 아내를 계속 참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설득하고 마음이 아파서 속이 다 타버렸는데 왜 제가 아이들도 빼앗기고 재산도 빼앗기고 소송 진행 중에서도 연기와 거짓말 말주변 그리고 여자라는 이유로 중립적이기보다 불합리한 대우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잊어야지, 잊어야지, 하면서 좋은 동영상, 좋은 글, 좋은 명상, 종교활동, 취미활동, 공감대가 형성되는 사람들과의 만남, 정신의학과 병원 상담 및 약물 복용 등 나름 노력했지만 억울함이 지워지지 않아요. 왜 내가 잘못을 하지 않았음에도 나만 불행하고 그 사람은 행복을 다 누리고 살아야 하는지.. 제가 어떻게 이 방황을 끝낼 수 있을까요?
 

사진_픽사베이


답변) 

안녕하세요, 정신의학신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재옥입니다. 

어떤 사연으로 이혼을 하게 되셨는지 적어주시진 않았지만, 가슴 아프지 않은 이혼은 없는 듯합니다. 

 

길에 핀 꽃을 마주쳤을 때 어떤 이는 꽃의 화사함을 주로 보고, 또 다른 이는 꽃의 향기를 느끼려 하고, 어떤 사람은 꽃의 효능을 보려고 합니다. 이혼도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지만, 지금 질문자분에게 가장 적합한 관점은 '트라우마'인 것 같습니다. 

트라우마는 세월호 사건이나 포항 지진 사건을 기점으로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용어입니다. 쉽게 말하면 어떤 사건으로 인해서 강력한 정신적 충격을 받게 되는 것을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라고 표현합니다. 

대형 재난 사건 희생자나 그 가족들이 주로 트라우마를 경험하며, 살인사건이나 강도사건 등 강력범죄 피해자들도 트라우마를 경험하고, 사건 현장을 자주 접하게 되는 경찰이나 소방관도 겪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약한 강도의 트라우마를 겪을 수 있습니다. 

가족의 사망이나, 실직, 공개적인 망신 등을 경험하고 그 경험이 계속 악영향을 줘 내 삶을 망가뜨리고 있다면, 역시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셈입니다.

 

질문자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 나만 불행하다.'라는 표현은 트라우마를 겪는 많은 분들이 호소하는 증상이기도 합니다. 또, 내가 원치 않는 사건이 내 잘못 없이 일어나 내 인생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우울함보다는 억울함을 강하게 호소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문제는 억울함이라는 감정은 사람의 인생을 과거에 묶여 앞으로 흐르지 못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새로운 즐거움을 찾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작은 실패나 좌절은 필연적으로 동반됩니다. 하지만 억울함이라는 감정은 이런 사소한 실패나 좌절이 일어날 때마다, 그 원인을 과거의 특정 사건으로 지목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목공방에 가서 가구를 만드는 취미를 가져 즐겁게 생활하던 중에, 사소한 실수로 의자가 제대로 서 있지 못하게 된다면 그냥 바보 의자를 만들었다며 웃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억울함이 있다면 '내가 이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취미를 가지려 하지도 않았을 거고 그러면 이렇게 실수하지도 않았을 텐데...' 하며 다시 트라우마를 겪은 과거로 돌아가 버리게 되는 거죠. 

 

정리하면 이혼이라는 트라우마가 현재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억울하다는 감정이 마음속에 늘 있을 것이고, 이 상태에서는 어떤 활동을 해도 쉽게 회복하기가 어려우실 겁니다. 

다행히 이미 정신건강의학과 상담 및 약물 복용을 하고 계시고,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는 다른 활동들도 잘하고 계신 듯합니다. 정신과 상담 치료의 종류가 다양한데, 이런 경우는 트라우마나 부부 가족치료 경험이 있는 분들의 상담을 받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두 가지를 동시에 하실 수 있는 분이라면 더 좋겠죠. 또 10분 내외의 상담보다는 40분 정도, 주 1회 이상의 상담을 반복하시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치료 외적으로는,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는 40대 남성이 억울함을 느끼는 부분이 다양하겠지만, 생활 자체에서 오는 고통도 큰 영향을 줍니다. 기존에는 하지 않아 익숙하지 않은 청소, 빨래, 요리 같은 일들을 익혀야 하니까요. 이런 가사 노동에 대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분을 찾거나, 경제적 여력이 되신다면 도와주시는 분을 고용하는 것도 회복에 도움이 됩니다. 

이혼 전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혼 후 평범한 삶은 앞으로 다시 만들어나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삶을 토대로 행복을 찾으시기를 빕니다.

 

*  *  *
 

정신의학신문 마인드허브에서 마음건강검사를 받아보세요.
(20만원 상당의 검사와 결과지 제공)
▶ 자세히보기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삼성마음숲 정신건강의학과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국립공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저서 <정신건강의학과는 처음이에요>
전문의 홈 가기
  • 애독자 응원 한 마디
  • "선생님 경험까지 알려주셔서 더 와닿아요. 재옥쌤 짱!"
    "정말 도움됩니다. 조언 들으며 자유를 느꼈어요. 실제로 적용해볼게요."
    "늘 따뜻하게 사람을 감싸주십니다."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