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강남 푸른 정신과, 신재현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가족의 문제들 때문에 힘들어서 질문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대학 입학 전 부모님께서 당하신 사기 때문에 하루에 아르바이트를 세 개나 해보기도 하고, 아르바이트를 쉰 적이 없었던 대학 생활을 보내다 번듯한 직장을 가진 지금도 직장을 포함하여 두 개의 아르바이트를 더 하고 있습니다.

오랜 재판 동안 그토록 강해 보였던 부모님께서도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보았고 이제 저도 성인인 데다가 맏이이다 보니, 부모님의 짐을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부모님이 실수하신 부분이고 부모님 몫이라는 걸 알지만, 부모님께서 저를 이만큼 키워주셨기에 제가 할 도리라고 생각하고 대리인으로서 여러 재판을 다니고 그랬습니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제가 착한 일을 하면 저한테 직접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제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누군가의 도움은 받을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을 가지며 살아왔고 최소한의 인간성은 지키고 살고 싶었는데 부모님께 사기 친 사람을 만나니 제 신념을 지키기가 어려워지더라고요.

저희 부모님께 사기 친 돈을 다 써버려서 빚 갚을 돈이 없으면 조금씩이라도 모아서 갚으라고 얘기하니 어쩜 말을 그딴 식으로 하냐며 되레 저에게 화를 내고, 자기를 들들 볶아봐야 자긴 그냥 파산 신청하겠다고 되려 협박을 하고.. 그 뻔뻔함에 결국 합의는 되지 않았고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냥 불쑥불쑥 너무 억울하고 서러워서 눈물이 납니다. 일을 하기 위한 책상 앞에 앉아서도 눈물이 나고요. 저는 제 일을 너무 사랑하고 집중하고 싶은데, 아르바이트니, 집안일이니 해서 제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게 너무 슬픕니다.

밥 먹다가도 울컥하고, 잠자기 전에도 어떻게 복수할까 생각이 많아져 잠이 못 드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그래도 옆에 누군가가 있을 때에는 잠깐 울고 다시 즐겁게 놀고, 떠드는데 혼자 있게 되면 다시 제자리입니다. 청소를 하거나 큰 가구를 옮기면서 정신없이 지내보기도 하는데 잠깐이더라고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는 우울한 사람이었던 건가 싶기도 하고.. 치료를 받아볼까 싶다가도 의료진에게 툭 터놓고 우울한 얘기를 하게 되면 우울해도 괜찮구나 하는 생각에 그 우울에 저를 잠식시키거나 제가 피해의식에 빠져 그래도 열심히 살아야지, 라는 생각을 안 하게 되거나 못하게 될까 봐 걱정됩니다.

 

고등학생 때에는 성추행을 당했는데, 밖에 알리면 징계를 주겠다는 선생님들의 협박과 진학에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냐는 친구들의 하소연에 부모님께 말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저 혼자 덮고 넘어갔고, 지금은 아파하기보다 공부해야 할 때라는 담임선생님의 말에 충분히 슬퍼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러고 부모님이 사기를 당하셔서 대학 생활 내내 바쁘게 지내다 대학 졸업 직전에는 동생이 형사사건 관련해 고소하겠다는 협박을 받고 있다는 걸 알고 변호사를 선임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동생이 범죄자가 되면 나는 그동안 원했던 직업을 부끄러움 없이 이어나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취업 준비와 맞물리며 혼자서는 잠을 못 자 친구들이 돌아가며 같이 지내주는 생활을 며칠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원하던 전공을 살려 직장인이 되었지만, 왜 이렇게 넘어야 할 산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죽고 싶지는 않은데,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없습니다. 부모님이 당하신 사기와 관련해서도 내 돈이 아니니 내려놓기만 하면 되는데, 그 돈 때문에 힘들어하시는 부모님을 보니 저 돈을 내가 언제 마련해드리나 하는 생각에 엄두가 안 납니다.

부모님 일은 부모님 일이고, 내 일은 내 일이라고 생각하고 부모님과의 감정 분리가 필요하다는 것도 아는데, 쉽게 되지 않습니다. 부모님도 우울감을 보이시고 어머니는 그냥 뛰어내려서 죽어버릴까 했다는 생각을 하셨다고도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부모님 돌아가시는 것보다 돈 따위 없는 게 낫지 하면서 마음을 다잡아도 며칠뿐, 다시 재판 얘기를 듣거나 변호사의 연락을 받으면 피하고만 싶습니다.

결국, 이제는 제 감정 하나 제어하지 못하는 저 자신이 너무 견디기 힘들어요.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진_픽셀


답변) 

안녕하세요, 강남 푸른 정신건강의학과 대표원장 신재현입니다. 

질문자님의 최근 몇 년이 얼마나 힘드셨을까, 질문자님의 글을 보면서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질문자님의 어깨에 놓인 짐의 무게를 감히 가늠하기도 힘들어 보입니다. 부디 힘내시길 바랍니다. 

 

질문을 보며 제가 느꼈던 건, 질문자님이 가지신 자기희생의 태도입니다. 누군가를 위한 이타심은 인간의 삶에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타심과 자기희생은 인류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서 꼭 필요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인의 삶에서 자기희생이 다른 삶이 영역을 침범할 정도로 크다면, 그래서 삶의 균형이 무너지게 된다면 자신에게는 위험한 것이 되겠지요.

부모님과 형제의 문제들을 떠안으려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나, 이에 대해서 너무 과도하게 책임감을 느끼고 계신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들어요. 이러한 과도한 자기희생과 이타심은 압박감으로 이어지고, 어깨에 놓인 짐들의 무게가 점차 늘어남에 따라 우울감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질문자님처럼요.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감정의 분리가 필요할 것 같아요. 스스로 인지하고 계시는 것처럼, 자기희생의 덫이 만들어 낸 필요 이상의 책임감은 앞으로도 이런 문제가 지속될 것이고, 내 삶은 희망이 없을 것이라는 절망감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지금은 가족들의 문제로 인해 나에게 쌓인 짐 때문에 내 문제마저 온전히 들여다볼 수 없는, 말하자면 주객이 뒤바뀌어 있는 상태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감정과 인식의 패턴을 곰곰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자기희생의 덫, 그 이면에는 외로움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타인에게 온전히 이해받고 싶은 마음, 내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타인에게 과도한 친절로 나타나곤 합니다.

질문자님의 성장 과정이 자세히 나와 있진 않지만, 고등학교 시절 있었던 사건을 볼 때 나의 마음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기보다 덮어놓고, 수동적으로 표현하는 습관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타고난 기질과 성장 과정에서 여러 이들과의 상호작용이 만나 만들어진 패턴일 겁니다.

타인에게 이해받고 싶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기보다 타인이 나에게 다가와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과잉 친절, 과도한 이타심을 만들어내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합니다. 하지만 어긋난 과잉 친절은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이럴 경우 자신을 좀 더 드러내고, 욕구를 표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감정을 표현하는 데도 연습이 필요해요. 다양한 감정들을 인식하고 연습하는 데 있어 매일 일기를 쓰고, 가까운 이들과 대화를 좀 더 나누거나, 다양한 정서적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영화, 책, 음악 등을 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요. 자신의 욕구를 인식하고, 이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심리상담 또한 좋은 방법일 수 있습니다. 이미 누군가를 상담하는 일을 하고 계시니 더 잘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또, 현재의 문제의 크기를 조금씩 줄일 필요가 있어요. 부모님의 좌절감과 나의 감정을 동일시하지 않으셔야 해요. 부모님의 문제에 대해 감정적 지지나 자식으로서 할 수 있는 부분을 도와주는 것은 좋지만, 그 결정에 있어서는 부모님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합니다. 결과가 어떻게 나든, 그 결과 또한 어느 정도는 감정적 거리를 두고 받아들이셔야 하고요. 그렇게 고민의 덩어리의 부피를 조금씩 줄여나가야 해요. 

그리고 나 자신의 문제에 좀 더 집중을 하셨으면 합니다. 질문자님께서 꽤 오랜 시간 동안 시달렸던 문제들이 우울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면, 이에 대한 적절한 평가와 도움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문제의 덩어리가 줄어들 수 있다면, 내 삶의 영역은 좀 더 넓어집니다. 그 여유 공간을 건강한 취미활동, 운동 등으로 채워나가실 수 있을 겁니다.

지금까지는 타인을 위한 노력을 하셨다면, 이제는 스스로 즐거움, 성취감과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허락하셨으면 합니다. 이타심과 자기희생이 나쁜 감정은 결코 아니지만, 자신의 삶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말이겠지요. 

질문자님의 고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답변이 늦어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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