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치인들은 그다지 믿을만하지가 않다. 거짓말을 일삼는다. 그럴듯한 약속들로 허언을 늘어놓고, 진심 어린 악수로 위선을 계획한다. 국민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호언장담하지만 결국 그들이 쫓아가는 것은 개인의 욕망이다. 자신의 지위와 명예, 금전과 권력만을 좇는다. 

지나친 매도라 말할 수 있겠만, 객관적으로는 분명 슬픈 현실을 반영하는 부분이 있다. 이번에 KBS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과 함께 조사한 지난 20대 국회의 4년간 공약 이행실적은 불과 10% 내외에 그쳤다. 심지어 이행되지 않은 공약 가운데 절반 가까이는 애초에 이행하고자 하는 노력과 의지조차 전혀 없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비단 20대 국회만의 사정이 아니다. 국민을 위해 분골쇄신하겠노라 약속하며 국회에 입성한 정치인들이 결국 정당의 당리당략만을 위해 분투하는 광경을 우리는 오랫동안 보아왔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제임스 뷰캐넌(James M. Buchanan, 1919~2013)은 '정치인들이란 공익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들'이라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정치는 경제를 교란시키는 위험요소라고 경고한 바 있다.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그의 신자유주의적 입장을 감안하더라도 뷰캐넌의 해석은 분명 어느 정도 진실을 담고 있다. 정치인들은 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이러나저러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는 결국 투표소에 들어가야 한다. 정치인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아예 정치를 무시하는 것은 더더욱 어리석은 행위이다. 무시는 곧 방관이고, 방관은 곧 방종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치가 공공의 해악을 불러일으킨다는 이 거대한 흐름 앞에 우리는 어떻게 맞서야 하는 것일까. 기껏해야 연필 한 자루만 한 자그마한 투표 도장 하나밖에 손에 쥐지 못한 우리가 어떻게 그 앞에 맞서야 하는 것일까. 

방법은 바로 그들의 '말'이 아닌, '욕망'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들이 결국 대의(大義)나 약속이 아니라 개인의 욕망만을 위해 움직이는 존재들이라고 한다면, 그들을 선택하는 우리의 시선 또한 그들의 입이 아니라 그들의 욕망을 향해야 한다. 그들이 무엇을 욕망하는가, 그들이 욕망하는 바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을 이해해야만 우리도 그들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욕망의 철학자라는 별명을 가진 정신과 의사 라캉(Jacques M.E. Lacan, 1901~1981)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사람들이 욕망하는 바가 결국은 타인의 욕망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야기이다.

고등학생이 명문대 입학을 욕망하는 이유는 그의 부모가 그것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직장인이 월급을 욕망하는 이유는 그가 부양할 가족이 그것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비싼 옷, 좋은 차를 욕망하는 이유는 그것을 부러워해주는 사람들이 그것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예쁘고 멋진 몸매를 욕망하는 이유는, 그것에 유혹되는 사람들이 그것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욕망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욕망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욕망이다. 라캉은 개인이 현실과 맺고 있는 구조상 원천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했다. 우리의 욕망은 타인이 만들어 둔 세계의 질서 속에서만 발현될 수 있으며, 그 세계는 곧 타인의 욕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이라는 거대한 바닷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정치인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들도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그러면 그 타자는 누구인가. 정치인이 자신의 욕망을 쫓아가기 위해 일차적으로 실현시켜야 하는 사회적 구조는 다름 아닌 선거이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표를 얻어야만 한다. 때문에 당연히 정치인은 표를 욕망한다. 표는 곧 유권자, 바로 우리들의 욕망을 상징하는 기표(記標)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인이 욕망하는 그 타인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인 것이다. 정치인은 유권자의 욕망을 욕망할 수밖에 없다. 

사진_픽셀


사실 제임스 뷰캐넌의 이야기도 결국은 정치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유권자-대중에 대한 이야기이다. 애초에, 정치인이 공익이 아닌 사익을 위해 행동한다는 사실 자체는 그다지 놀랍거나 새로운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수천 년간 인류의 역사가 이미 보여주고 있다. 위정자들 중엔 언제나 공익보다 사익을 우선하는 자들이 많았다.

뷰캐넌이 경제학자로서 정말로 지적했던 바는 그런 진부한 사실이 아니다. 그가 이야기하고자 한 바는, '그 사실이 어떻게 공동체의 해악으로 이어지는가'에 대한 분석이다. 모든 정치인이 사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행동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면, 그렇다면 현실에서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이야기한 것이다.

그는 정치인들이 그저 표를 얻기 위해 사람들이 좋아할 법한 환심성 정책들을 펼칠 것이고, 그러한 환심성 정책들이 결국 국가 경제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단순히 사람들이 좋아하기 때문에 진행되는 정책은 근시안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로 그때그때 방향 없이 뒤바뀌는 정책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뷰캐넌은 경고한 바는 결국, 유권자-대중의 욕망이 언제나 근시안적이며 혼란스럽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정치인이 말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그들의 욕망을 좇아 행동한다. 그들은 우리의 욕망을 욕망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욕망하는가. 바로 이 지점으로 돌아오게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가 명확히 이해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우리 자신의 욕망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욕망하며 투표소로 들어가는가. 그것을 명확히 이해하고 들여다보지 못할 때, 우리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흔들리는 욕망의 뒤엉킴은 근시안적일 수밖에 없다.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라캉은 개인이 성숙하기 위해서는 주체성을 확립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욕망이 뒤얽힌 바닷속에서 '나'를 되찾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곧 "타자의 욕망이 되고 싶다"라는 원시적이고 미성숙한 열망에서, "타자의 욕망을 '내가' 성취하고 싶다"로 나아가는 진일보적인 변화이다. 조금 말장난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라캉은 평소 자신의 철학을 언어학에 빗대 표현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 차이는 무척 근원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명문대 입학을 욕망하는 고3 학생을 생각해보자. 사실 그 학생이 욕망하는 명문대 입학은 부모의 욕망이다. 그 사실은 관계의 구조가 빚어낸 필연적인 결과이다. 모든 인간이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하지만 만약 여기서, 학생 자신이 본인의 마음을 분명하게 들여다보지 못한다면 그 욕망은 그저 "명문대에 가고 싶다"라는 모호한 열망 덩어리로만 남는다. 부모의 자신이 구분되지 못한 채 융합되어 있기 때문에 모호하다. 무엇을 욕망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그저 자신이 욕망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라캉이 말하는 성숙은 바로 이 모호한 열망이, "'나'는 명문대에 가고 싶다" 주체적인 욕망으로 진화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 순간부터 '내가' 왜 명문대에 가고 싶은지, '내가' 명문대에 가서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 그러기 위해 '내가' 어떤 노력을 할 것인지가 파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명문대 입학' 자체가 애초에 결국 부모의 욕망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더라도, 그 욕망을 바라보는 '자신', 나의 자아를 건져 올릴 수 있을 때에 개인이 성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거판에 수많은 욕망이 넘실거린다. 모두가 누군가의 욕망을 욕망하며 소용돌이치고 있다. 뷰캐넌이 경고하였듯 이 욕망의 소용돌이에는 눈이 없다. 욕망의 주체 없이 욕망 그 자체가 다른 욕망을 집어삼키며 끝없이 순환하기만 하는 관계는 결국 혼돈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 모두 한 자루 도장이라는 가냘픈 무기를 들고 외로이 기표소 천막을 젖히며 그 욕망에 몸을 던진다. 각자 많은 것을 욕망하며 도장을 찍는다. 누군가는 세금을 위해, 누군가는 교육비를 위해, 집값을 위해, 월급을 위해, 정의를 위해, 안보를 위해 욕망을 표로 던진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반드시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그러한 욕망을 갖는다는 것, 그리고 그 욕망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투표에 담는 욕망은 무엇인지, 그것은 과연 누구의 욕망인지, 왜 나는 그것을 붙들게 되었는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욕망을 통해 '내가' 그리는 사회의 이상향은 무엇인가. '내가' 그리는 내일의 청사진은 어떤 모습인가를 특정할 수 있어야 한다.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연일 뉴스가 뜨겁다. 어떤 후보자가 어떤 막말을 했는지, 어떤 공약을 외쳤는지 뉴스가 끊이질 않는다. 어떤 정당들이 어떻게 이합집산하는지, 어떤 대의명분을 내세우는지 기사가 매일 갱신된다. 피로하게 혼란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투표해야 한다. 투표로 우리의 존재를 그들의 욕망에 각인시켜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혼란스러운 이야기들에 귀 기울이려 애쓰는 것만큼, 기표소에 들어가는 나 스스로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보는 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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