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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주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킹덤] 시즌 1,2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두말없이 시즌 2, 2화의 마지막 장면일 것이다. 조학주의 뜯어진 살점을 문 채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안현의 기세는 가히 충격적이다. 좀비 분장 탓에 눈동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형형한 안광을 뿜어내는 배우의 연기가 카메라마저 집어삼킬 듯하다. 프레임을 가득 메워오는 그 경악스러운 장면 덕분에,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인 채 다음화로 따라가야만 했다.

 

# 안현 대감.

안현도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켰던 전력이 있다. 물론 조학주의 꾐에 넘어간 것이라고는 하지만 분명 그도 수망촌의 비극에 직접 참여했다. 수망촌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좀비로 만든 뒤, 왜구와 싸우게 만들었다. 조학주나 중전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이다. 어쩌면 그런 씻을 수 없는 과오가 그를 인과응보의 결말로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그 자신도 비참한 좀비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드러나는 안현의 인간관은 결코 조학주의 그것과 같지 않다. 물론 마을 하나를 도륙해버렸지만, [킹덤]이 그려내는 안현의 전반적인 서사는 결코 조학주처럼 비인간적이지 않다. 배우의 표정은 좀 더 무서워 보일지 몰라도, 안현이라는 캐릭터의 인간관에서는 분명 따뜻함이 묻어 나온다.

그는 언제나 목숨 바쳐 사람을 구하려 한다. 왜구와의 전쟁 때뿐이 아니다. 동래에 역병이 퍼졌을 때에도 그는 가장 먼저 나서서 칼을 뽑아 들고 위험천만한 좀비 무리에 뛰어든다. 도망치는 사람들 등 뒤를 지키며 좀비들을 온몸으로 막아낸다. 길이 끊겨 사람들이 굶어 죽게 생기자 창고를 열어 구휼미를 푼다. 또, 세자 이창의 모습에서도 간접적으로 안현의 됨됨이를 느낄 수 있다. 안현은 이창이 아버지처럼 모시는 스승이다. 그런 스승 밑에서 자라난 이창이, 백성을 위해 권위를 내던지고 헌신하는 인물이 된 것을 보며 우리는 안현의 사람됨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인물이 전달하는 가치관은 어떤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일련의 서사에서 나온다. 비록 안현의 잘못된 과거가 명백하게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여전히 따뜻함이 느껴지는 이유이다. 안현에게는 분명 백성에 대한 긍휼히, 사람에 대한 연민이 있다.
 

사진_넷플릭스


안현은 자발적으로 좀비가 되었다. 최후의 순간 이창에게 자신을 좀비로 되살려 달라고 부탁했다. 사람들에게 역병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는 자신이 좀비가 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좀비가 된 그는 넝마가 된 수의를 입고, 몸통에 깃발을 꽂힌 채, 신경을 긁는 신음 소리와 함께 비틀비틀 걸으며 등장한다. 언제나 엄숙하고 강직하기 그지없던 대감마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저 끔찍한 좀비가 그 위엄 있던 안현 대감이라는 역설 때문에 기괴한 충격이 더해진다.

안현은 좀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좀비가 되면 자신의 얼마나 끔찍한 모습으로 변모할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목이 잘리고 불태워질 것을 안현이 몰랐을 리 없다.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며 시신의 존엄마저 귀중히 여기던 그 시대에 안현이 그런 상상을 하며 마음이 편했을 리 없다. 이미 모두에게 존경받고 있던 경상 땅의 정신적 지주, 대감마님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는 비극을 자처했다. 그것은 그의 가치관이 외적인 대상(對象)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현이 진정으로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그 우러름과 존경의 시선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그런 것쯤 얼마든지 내던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진실을 알리고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평판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의 가치관은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닌, 사람이 사람과 이어지는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시즌 2의 2화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좀비가 된 안현이 조학주의 뺨을 물어뜯는 그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저릿저릿한 아우라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장면 자체의 그로테스크함도 있다. 배경음악이 주는 긴장감도 있다. 배우의 연기력도 있다. 서서히 반전을 드러내다가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치닫는 카메라 효과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모두 이해하기 어려운 강렬한 감정의 일렁임이 있다. 그 카타르시스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영상예술에서는 어떤 한 장면을 감독이 열심히 힘줘 표현한다고 해서, 관객에게 그 에너지가 모두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연출은 결국 서사를 통해 쌓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면 하나에서의 잘 짜인 구도나 연기만으로는 부족하다. 연출과 구도 하나하나를 무척 정교하게 설계하는 것으로 유명한 천재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도 "이야기가 훌륭해야 연출이 자연스럽게 따라올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다. 극이 오랫동안 서사를 통해 쌓아 온 인물의 에토스(Ethos)가 묻어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연출이 폭발할 수 있다. 

[킹덤]의 연출은 좀비가 된 안현을 담는 순간 그야말로 폭발한다. 그 힘은 안현이라는 캐릭터가 보여준 강인한 의지와 진실된 마음에서 나온다. 이성을 잃고 좀비가 된 순간까지도 이어지는 굳센 의지가 관객에게 전달된다. 그 장면이 보여주는 울림이 그토록 강렬할 수 있는 것은, 사람과 사람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안현의 진심이 분명하게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 중전좀비vs안현좀비

좀비는 몰개성의 상징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좀비는 그냥 냅다 뛰는 존재, 괴성을 지르며 피를 쫓아 마구 내달리는 존재다. 열 명이건 백 명이건 그냥 다 '좀비'다. 그들 모두 각자의 드라마가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일단 물리고 나면 사람이 남자였건 여자였건, 양반이었건 상놈이었건, 악당이었건 착한 사람이었건 그냥 '좀비'가 된다. 좀비는 인간성 상실의 상징이다. 인간의 도구화를 나타내는 심벌이다.

중전은 좀비가 됨으로써 완벽한 도구가 된다. 좀비가 된 중전의 마지막 모습은 좀비 떼가 주인공 일행을 쫓아가는 장면에서 잠깐 비친다. 수많은 좀비 무리 가운데 하나로 흘끗 스쳐 지나갈 따름이다. 그나마도 그 좀비가 중전임을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피에 젖은 왕비 혼인 의상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그 눈에 띄는 옷 이외에는 다른 좀비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하지만 그 짧은 장면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사실 살아생전부터도 중전의 정체성은 외면적으로 드러나는 대상적 자기감뿐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왕비 옷을 입은 좀비야말로 중전이 살아온 공허한 자기애적 삶의 극단적 완성일지 모른다.

반면 안현좀비는 화려한 옷을 입고 있지 않다. 그러나 카리스마가 넘친다. 좀비가 되어 눈동자가 없음에도 형형한 안광을 번뜩인다. 중전이 생전 그토록 갖고 싶어 하던 카리스마를 안현은 좀비가 되어서마저도 뿜어낸다. 가장 끔찍한 존재, 몰개성의 상징인 좀비가 되어서도 존재감이 넘친다. 

 

# 인간이고자 하는 두려움; 자기애

결국 이 드라마는 좀비물이며, 인간과 좀비의 싸움이다. 모두 좀비가 되지 않으려 분투한다. 죽더라도 차라리 인간으로 죽고 싶어 하지 좀비가 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된다는 두려움이 모두를 지배한다. 드라마가 그려내는 이야기는 결국 그 두려움과의 투쟁이다.

그러나 한 꺼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암투와 분쟁에서도 놀랍도록 똑같은 형태의 두려움을 발견할 수 있다. 

그건 바로 서로가 서로에게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린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인격과 가치를 가진 내면적 존재, '인간'으로서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모두를 지배하고 있다. 상대방의 권력이나 지위를 위한 도구로 대상화(對象化)되어 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모든 다툼의 수면 밑에서 넘실거리고 있다.

그것은 근원적인 공포이다.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곧,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분투한다. 살아남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먼저 도구로 이용하려 암투를 펼친다. 상대방의 존재 의미란 그저 자신의 자존감을 확인시켜줄 대상(Object)에 그치고 만다.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자기애만이 살아남는다.

드라마가 끝나고 가장 마음속에 남았던 인물은 결국 세자도, 조학주도 아닌 안현과 중전이었다. 아마 그 이유는 좀비가 된 그 둘의 삶이,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잘 드러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극명한 차이만큼이나 둘의 최후가 같으면서도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코헛은 자기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수용(Containing) 받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자신의 모든 불완전함을 온전히 껴안으면서 수용해주는 누군가와의 관계를 경험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것은 곧, 자신의 가치가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달려있지 않다는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가 불완전하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평가만으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두려울 수밖에 없다.

사람에 대한 연민과 사랑. 진부하지만 진실된 그 마음이야말로 대상(Object)을 넘어 누군가의 내면에 닿을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좀비가 된 안현의 모습에서 뭉클함을 느꼈다면 아마 당신의 내면에도 그 울림이 닿았던 것일지 모르겠다.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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