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정신의학신문

 

가족 중 유일한 의사인 나는 종종 일가친척들의 이런저런 의학적 궁금증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곤 한다. 얼마 전에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 “병원에서 터널 증후군이라는데 수술 받아야 하는 거니?” 한창 바쁘게 일을 하고 있던 나는 “일단 약 먹어보다가 안 나으면 수술을 고려해 보는 거지 뭐.”라며 조금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굳이 의사가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말이잖아(아울러, 자식이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말이고)’

 

어쩐지 불효자가 된 것 같은 느낌에 어머니에게 어떤 치료가 알맞은 것일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간단한 수술임에도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일단 나는 어머니가 얼마나 불편한 상태인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사 맞는 것도 겁내는 분이기에 수술할 때의 심리적, 신체적 고통을 기꺼이 감당하실 의향이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본인의 일에 대한 고집이 있는 분이시라 수술 후 충분히 일을 쉬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고, 이는 수술 후 부작용을 초래할 수 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어머니는 약물로 증상이 호전되어 더 이상 복잡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환자로서 의학적 선택의 어려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암이나 심근경색처럼 심각한 질환들은 명확한 치료방침을 따르면 되기 때문에 도리어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경우처럼 많은 질환과 치료법들은 어떤 선택이 옳은 것이지 의사도, 환자 자신도 완벽하게는 알지 못한다.

 

‘듣지 않는 의사 믿지 않는 환자’는 이와 같은 현실적 고민에 응답하는 책이다. 저자인 제롬 그루프먼과 패멀라 하트밴드는 진료실에서 행해지는 의사결정과정의 여러 사례들을 분석하여 어떻게 하면 올바른 의학적 선택을 할 수 있을지 탐구한다. 그 내용의 상당수는 인지심리학에 빚지고 있다(이 책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어 제목보다 your medical mind라는 간단한 영어제목에 주목하는 것이 좋다). 책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도 대니얼 캐너먼이나 대니얼 길버트 같은 유명한 심리학자들의 연구결과이다. 말하자면, 진료실 버전의 ‘생각에 관한 생각‘이나 ’넛지’와 같은 책인 셈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오로지 의학적 지식에만 의존하여 치료를 선택하지 않는다. 환자 뿐 아니라 의사조차도 기존에 형성된 인지적 틀에 영향을 받아 특정 치료에 대한 개인적인 선호도를 가지기 때문이다. 대체 요법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자연주의자가 있는 반면 새로운 약과 기술의 혁신에 열광하는 기술주의자가 있다. 가능한 적극적인 예방과 치료를 원하는 최대주의자가 있고, 다른 방법이 있다면 치료를 피하려는 최소주의자가 있다. 저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의사 자신의 가치관을 환자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의사의 역할은 환자 스스로 어떤 치료가 적절하고 자신의 가치관에 맞는지를 깨닫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한다.

 

의학적 결정에 미치는 각종 인지적 편향들의 중요성도 강조된다. 대표적인 것이 ‘가용성 편향’이다. 극적이고 특이한 이야기는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어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할 때 쉽게 떠오르는 경향이 있다. 어떠한 약이 엄밀한 실험을 통해 매우 안전한 약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더라도, 주변에서 그 약을 먹고 부작용을 경험한 사례가 있다면 그 약은 위험한 약으로 인식된다. 약을 보는 순간 실험 데이터 보다는 부작용에 대한 ‘이야기’가 훨씬 빠르고 강렬하게 머릿속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초점의 오류‘ 역시 사고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인지적 편향이다. 환자들은 치료를 받은 후의 삶을 예측할 때 치료가 미치는 부정적인 변화에만 초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 대장암 수술을 하고나서 인공항문을 달아야 한다면 우리는 그로 인해 바뀌는 삶의 모습, 예컨대 수차례 화장실에서 변을 비워내는 것이나, 격한 운동을 하지 못하는 것들을 생각한다. 하지만 삶 전체를 조망해본다면 변하는 것보다 변하지 않는 것들이 훨씬 많음을 알 수 있다. 인공항문을 달았다고 해도 친구와 수다를 떤다거나, 가벼운 조깅을 하거나, 가족들과 여행을 떠나는 등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많은 것들을 여전히 할 수 있는 것이다.(실제로 인공항문 수술 후 행복도를 측정해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수술 이전의 행복도와 근접해진다)

 

이처럼 의학적 선택이 어렵고 복잡한 이유는 결국 임상의학이 불확실성이 높은 분야이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결정분석에 기본이 되는 베르누이 이론, 즉 (기대효용) = (수익확률) × (수익 효용성) 공식을 예로 든다. 여기서 수익 효용성은 치료율, 부작용 발생 확률에 해당하기에 어느 정도 계산할 수 있지만, 수익 효용성은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수익 효용이란 결국 치료가 삶에 미치는 영향인데, 이는 환자의 성향이나 상황에 따라 매우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유방암 치료를 위해 유방절제 수술을 받은 여성의 상실감은 어느 정도일까? 고령의 관절염 환자가 인공관절치환수술을 받게 된 후 고통 없이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느끼는 행복감은 얼마나 큰 것일까? 어떠한 계산도 이러한 삶의 다양한 풍경들을 하나의 숫자로 환원시킬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의 내용들은 한 편으로 진료상담의 실용적 지침서로서 사용될 수 있다. 가용성편향을 고려하는 의사는 환자에게 치료를 설명할 때 통계 수치보다는 다른 환자의 사례를 이야기함으로써 더 나은 결정을 하도록 도울 것이다. 초점의 오류를 인지하는 환자는 그렇지 않은 환자보다 수술의 부작용을 과대평가하지 않고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책은 의학을 바라보는 가치관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의사들에게 익숙한 용어로 표현하자면, 저자들의 주장은 나에게 근거중심의학(evidence based medicine)의 한계를 지적하고 환자중심의료(patient centered care)로의 전환을 촉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객관적 연구결과에 의한 표준화된 진료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근거중심의학은 현대의학의 기본 토대이다. 그렇지만 일반화된 진료는 자칫 환자 개개인의 특성을 무시할 수 있다는 단점을 지닌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치료결정에 환자의 요구와 선호를 반영하는 환자중심의료라는 것이다.

 

(특히 의료계종사자라면) 근거중심의학의 시대에 진정한 환자중심의료가 가능한 것일까라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책을 읽으며 그와 같은 생각을 하였다. 이때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각각의 개념에서 ‘중심’을 뜻하는 영어단어인 base와 center였다. 서로 다른 ‘중심’은 양립할 수 없겠지만 그것이 기반base과 중심center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두 개념은 충분히 공존할 수 있는 것이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울역 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졸업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전)성동구 정신건강복지센터 상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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