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신재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직업에 대한 문제로 항상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작년에는 직장을 그만두고 허무함에 자살 기도를 했는데 결국에는 살아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네요. 그때 죽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저는 고졸에, 20대에 2년 정도 계약직 근무한 것 말고는 별 경험이 없습니다. 20대 중반에 4년 정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가 계속 낙방해서 그만두었고요. 시험을 접고 너무나 힘들어서 정신건강의학과에 내원해 우울증 진단을 받고 계속 치료받는 중입니다. 핑계라면 핑계일 수도 있겠지만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던 4년간의 공백기가 너무나 급소를 때린 결정타라고 생각합니다. 고등학교 과목이면 모를까, 합격하지 못하면 정말 쓸데없는 지식이거든요.

모든 연령대가 다 중요하긴 하지만 20대 시간을 허투루 보내면 정말 30대에는 답이 안 나오는 망한 인생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이력서도 이곳저곳 100군데 넘게 넣어보고 면접도 보았는데 연락이 오질 않네요. 의사 선생님처럼 고학력을 요구하는 병원에 넣는 것도 아니고, 고졸이면 가능한 회사에 넣는데도 이러니 참 노답 인생입니다.

특정 직업을 평가절하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 상황이 아무래도 진입장벽이 낮은 일밖에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요리 보조, 하역, 택배, 배달 등등 말이죠. 남의 시선은 둘째 치고, 위의 일들을 하게 된다면 저 자신이 너무나 못난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에 병이 더 악화되어 상태만 안 좋아질 거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주치의 선생님께서는 입원 권유를 하셨는데 폐쇄 병동에 입원 5일 정도 해보니까 사람이 정말 더 미쳐간다고 느껴졌습니다. 더 이상 못 참고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입퇴원을 반복하면 목숨은 붙어 있을지 몰라도 이럴 바엔 죽는 게 낫겠구나 하는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못해도 최소 하루에 8시간 이상 일을 한다고 가정했을 때, 하기 싫은 일, 괴로운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 바에는 죽겠다는 생각이 이상한 것일까요?

선생님들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보잘것없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_픽셀


답변) 

안녕하세요, 강남푸른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신재현입니다. 

직업에 대한 고민을 나누어 주셨네요. 글 곳곳에 질문자님의 고민과 힘듦이 느껴져 마음이 참 안타깝습니다. 부디 힘내시라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어요.

 

글쎄요, 질문자님의 인식처럼 직업은 삶에서 분명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특정 시점에 직업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여기며, 직업을 통해 삶의 풍성함과 보람 또한 느끼게 되죠. 하지만, 꼭 기억해야 할 건 직업 그 자체가 우리의 삶 전체는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직업이란 건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무수히 많은 가지 중 하나일 뿐이에요. 숭고한 일을 하는 직업, 돈을 많이 버는 직업, 보람이 있는 직업 등 여러 직업이 있지만 우리는 그 일을 할 때 잠시 그 직업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질 뿐이에요.

참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서는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그 사람의 전체를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직업, 외모 등 그 사람에게 드러나는 것이 그 사람의 가치를 나타낸다고 여기지요. 이런 분위기가 질문자님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많은 압박을 느끼게 만들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직업을 갖지 않고 있다는 것’과 ‘가치가 없는 것’을 동일 선상에 놓게 만들어버립니다. 

 

하지만, 직업을 갖고 있지 않다는 말이 자신의 가치가 없다는 말과 동의어는 결코 아닙니다. 가지가 흔들린다 해서, 그 나무의 본모습 전체가 부정되는 건 아닌 것처럼요. 아마 그렇게 여기게 된 데는 질문자님의 20대의 경험과 이로 인한 감정의 변화가 한몫했을 거라 봅니다.

불안정하고 우울한 감정은 우리가 가진 시각을 쉽게 왜곡시켜요. 시야는 좁아지고, 이전에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낼 수 있었던 말들을 곡해하게 만들지요. 이전에는 별 다를 것 없이 느꼈던 상황들도 어느샌가 과한 압박으로 다가옵니다. 어느샌가 4년 간의 수험생활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을 테고, 그에 대한 감정은 좌절과 우울감으로 나타났을 것 같아요.

질문자님의 고민 전체를 관통하는 감정은 ‘우울감’으로 보입니다. 치료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자세히 나와있진 않지만, 우선적으로 우울감과 우울증에 대해 적극적인 상담치료, 약물치료가 필요합니다. 적절한 수준의 감정을 유지하는 것이 현 상황을 좀 더 건강하게 바라볼 수 있게 만드니까요. 

 

또,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주의할 점은 현 상황에 과도하게 왜곡된 평가와 감정을 싣지는 말아야 해요. 이를테면, 현재 상황은 ‘절망스럽고 끔찍하며, 더 나아질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 단지 ‘직업을 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앞으로의 일은 아무도 알 수 없어요. 101번째 원서를 넣은 곳이 나를 마음에 들어할지, 또 그렇게 들어간 직장이 나에게 소중한 보금자리가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거지요.

하지만 질문자님께서 습관처럼 ‘절망스럽고 끔찍하게’ 여기는 상황들은, 내 마음속에서 미래를 어둡게만 보게 만들어요. 인간이 쉽게 저지르는 오류 중 하나인 ‘재앙화 사고(catastrophizing)’입니다. 질문자님의 현 상황을 담백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해야 할 것들과 할 수 있는 것들이 순차적으로 보일 겁니다. 이를테면 구직 사이트에 가입하고, 짧은 자기소개서를 등록하고, 기다리는 과정들이지요. 그러면서 한 과정 한 과정에서 작은 성취를 쌓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현실적인 면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직업에 대한 주변의 시선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일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자신이 처한 상황에 나름의 의미부여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를 ‘정신 승리’, 혹은 ‘합리화’라 폄하하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자신이 처한 절망적 상황을 이러한 과정을 통해 벗어나는 능력이 있어요. 과거 끔찍한 사건을 겪은 이들도, 힘든 시간을 겪은 자신이 ‘무너지지 않았음’에, ‘잘 견뎌 냈음’에 긍정적인 의미부여를 할 수 있는 것처럼요. 

질문자님께서 경험했던 4년의 수험 생활, 우울증 치료 과정, 꽤 많은 구직 활동 또한 다르게 여길 수 있는 측면이 존재할 수 있어요. 현재 자신이 부정적으로 바라봐 왔던 것들에 대해 새롭고 건강한 시각을 바라볼 수 있다면,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자신의 가치에 대해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겁니다. 이 또한 치료의 장기적인 목표이기도 합니다. 

 

진부한 비유를 잠깐 들어 볼게요. 컵에 담긴 물이 반쯤 남아 있을 때 누군가는 ‘반 밖에 없다’, 다른 누군가는 ‘반이나 남아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상황을 꼭 긍정적으로 보라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두 사람 모두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더 중요한 건 모든 상황에는 분명 여러 측면이 존재한다는 거죠. 질문자님께서 조금 더 힘을 내서 필요한 도움을 받으시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좀 더 건강하게 바라보실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부디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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