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요즘 치료를 잘 받으면서 우울증이 호전되어 재진 간격도 점점 길어지고, 상담도 간단히 하는 등 긍정적인 변화에 내심 기뻐하고 있었어요. 근데 다시 악화되는 건지, 자살사고가 계속 머리에서 맴돌고 있네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이전에 10년 지기 친구들에게 일방적으로 연락두절당한 적이 있는데, 당시에는 제 증상이 너무나 심했던지라(경계선 특징) 이해합니다. 그런데 친구 중 한 명이 저에게 연락도 없이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고, 이전처럼 자동적으로 '그래, 내가 너 때문에 죽었어~ 라고 유서를 쓰고 자살해버리면 평생 결혼생활이 불행해지겠지?'라는 생각을 하다가, 이제는 정말 실행하고 싶다는 게 큰 문제입니다.

직장도 그만두면서 정리할 궁리만 하고 있고, 자살 방법에 대해서도 계획을 마쳤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외래 주기가 10주로 늘어났으니 약도 많겠다, 차 트렁크에는 번개탄도 있겠다, 이제 실행만 하면 되는 상황입니다.

굳이 힘들게 살아가야 하나 싶던 찰나에 이런 촉발사건이 발생하니 이전처럼 자살을 계획하고 있고, 이러다가 충동적으로 실행해버린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고요. 이 상황을 어쩌면 좋을까요?

외래 다녀온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시간에 일어난 사건이라서, 굳이 또 병원에 가야 하나 싶기도 해요. 이렇게 적어 놓고는 언제 실행할지 저도 몰라요. 적다 보니 그 친구가 더 괘씸하고 나의 죽음으로 그 친구가 평생 불행했으면 좋겠네요. 요즘 너무나 공허해져 폭식이나 자해, 분노의 질주(운전)를 하고 있습니다. '친구와 갈등을 해결하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겠지만 연락이 끊긴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어떡하면 좋을까요?
 

사진_픽셀


답변)

안녕하세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김총기입니다.

자살사고에 몰두해 계신 모습이 보여 무척 걱정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이러다간 정말 충동적으로 자살 기도를 하게 되는 일이 생기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일단은 다니시던 외래를 방문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진료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이후에 생긴 사건으로 인한 심한 자살사고가 있다면 얼마든지 진료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질문자님의 담당의께서도 이런 상황에서 진료를 당겨 방문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실 겁니다.

 

위급한 상황에 질문게시판의 답변만으로는 큰 도움을 드리기 어려울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제가 드릴 수 있는 조언은 지금 질문자님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자살생각'과 질문자님 '본인' 사이에 여유 공간을 좀 만들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친구와의 관계는 잠시 뒤로 하고 일단은 자살생각에 집중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죽고 싶은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일단 지금은 이미 발동이 걸려버린 자살생각의 힘이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각은 나 자신이 아닙니다. [나는 죽고 싶다]라는 명제와 [나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라는 명제의 차이에서, 우리는 후자로 옮겨갈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질문자님께서는 난폭운전, 폭식, 자해처럼 스스로를 해치는 행동과 스스로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에 몰두해 있다고 말씀 주셨습니다. 심지어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우고 계신다니 더욱 걱정됩니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여기 게시판에 이렇게 글을 올려주고 계십니다. "실행하고 싶다는 게 큰 문제입니다" "어떡하면 좋을까요?"라고 말씀 주시고 계십니다. 즉, 한편에서는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지금의 생각들 때문에 괴로워하는 마음도 있어 보입니다. 분명 질문자님의 마음속에는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만큼이나 '그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있어 보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꾸준히 약도 드시면서 치료를 받고, 또 이렇게 해결을 찾기 위해 글을 올리고 계신 것 아닐까요. 

 

나의 마음속에 이런 또 다른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내가 '죽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지만, 또 동시에 '그러고 싶지 않아'라는 생각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은 [자살생각]을 나의 여러 가지 '생각'들 중의 하나로 바라볼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말장난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은 무척 중요한 전환입니다.

우리가 충동적으로 스스로를 파괴하거나 다른 사람을 파괴하는 행동을 할 때는 보통 나의 생각들 중 어느 하나에 완전히 끌려 가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 '나'는 나의 어떤 생각들 중 하나를 고민해서 선택하고 행동을 결정하지 못합니다. 생각에 그저 이끌려 가버립니다. 이끌려가서 내가 그 생각 그 자체가 되어버립니다. 생각이 나를 행동으로 메다꽂아버립니다. 그 생각이 자살생각이라고 한다면, '죽고 싶다.'라는 생각에서 곧바로 약을 잔뜩 준비해서 한 움큼 집어삼키는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 과정 속에 '나'는 온데간데없습니다. '나'는 그저 자살사고에 이끌리는 대로 행동하는 자동적인 실행 기계가 될 뿐입니다. 글에서 질문자님 스스로도 자동적이라고 표현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생각'과 '나' 사이의 거리를 좀 벌릴 필요가 있습니다. 나와 나의 생각 사이에 여유를 둘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의 생각을 바라보고 판단할 수 있을 만한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생각을 합리적으로 바라보고 선택하고 계획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나의 행동의 주체가 '나'가 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생각'이 아닌 진정한 '나' 말이지요.

 

'진정한 나'라고 이야기한다면 뭔가 거창하고 어려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나는 언제나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한 '나'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에 살아서 존재하는 나의 가장 명확한 근거는 바로 호흡입니다. 살아있는 한 멈추지 않고 언제나 이루어지고 있는 호흡. 그 호흡에서 우리는 진정한 나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생각에 몰두하여 끌려가는 마음을 붙잡고 호흡에 집중해보는 것입니다. 

숨이 코로 들어가고 폐를 채우는 느낌. 가슴이 내려가고 숨이 다시 코로 빠져나오는 느낌. 그 느낌에 집중해보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단순히 심호흡하며 마음을 고르세요, 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호흡합니다. 그렇지만 평소에는 잊고 살아갑니다. 자동적으로 호흡합니다. 마찬가지로, 자동적으로 호흡하는 것처럼 우리는 '생각'에 자동적으로 끌려갑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마음을 모아 호흡에 집중해보자는 것입니다. 자동적으로 호흡하던 숨을 나의 마음 한가운데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끌려가던 생각에서 '나'를 분리해내야 합니다.

호흡에 집중하고 있으면 '나'의 존재를 매번의 들숨과 날숨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나'를 붙잡고 있을 수 있습니다. '나'를 붙잡은 채 나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들이 떠오르는지 지켜볼 수 있게 됩니다. 나의 생각과 거리를 둔 채 온전한 '나'로 서 나의 생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 친구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 친구에 대한 분노. 친구에게 무시받았다는 수치심. 수없이 많은 감정과 생각이 나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을 바라보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안에서 내가 과도하게 몰두했던 부분, 내가 과도하게 치우쳤던 부분들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에 끌려가지 않고 그 생각을 보내 줄 수 있습니다.

글로 쓴 것처럼 쉬운 작업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질문자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마음의 여유'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여유는 거창하지 않습니다. 하루에 잠깐잠깐씩이라도 그저 호흡에 집중하는 시간을 내어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큰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장황한 글을 쓰면서 막상 질문자님께서 갖고 계신 고민-'친구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섣불리 짐작하여 이야기할 수도 없는 일일뿐더러, 그 일 때문에 질문자님께서 갖게 되신 분노에 어떤 숨은 배경들이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궁극적으로는 그 문제에 집착해서는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질문자님 스스로도 연락이 두절된 상황이라고 말씀 주셨지만요.

질문자님의 마음속에 폭풍이 불어온 이유가 친구의 연락 없는 결혼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친구의 배신이 아닌, 마음속의 폭풍이 아닐까 싶습니다.

질문자님께서 모쪼록 마음의 평화를 되찾고, 안정적으로 치료받으시길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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