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대한정신건강의학과 봉직의협회 신예니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그림_haerin

■ 진료실 풍경

아들 내외, 손자 손녀 없이 홀로 적적하던 할머니가 아들이 좋아하던 도넛을 한 봉지 사 들고 오셨다. 할머니에 따르면, 그는 “사내아”인지라 도통 말이 없고, 되레 왜 왔냐며 쏘아붙이고는 병실로 가버려, 환영받기는커녕 “도나쓰” 하나 권할 여유도 없이 뒤통수만 바라보다 왔단다.

그냥 가려다가, (직접은 못 들은) 아들 얘기라도 들을 겸, “이사 슨생님” 찾아 외래진료실로 내려오신 할머니. 구부정하게 먼 길을 아들 생각하며 타박타박 걸어오셨단다. 엄마의 시선으로 해석되고 보존되어 온 아들의 과거와 현재 이야기에 경청하며, 말더듬 중에도 한마디 한마디를 꾹꾹 눌러쓰듯 말하는 할머니에게서 80 평생 무르익은 모성애가 느껴졌다. 그 가녀린 풍채에 스며있는 무언의 외로움도 읽혔고.

“내가 인정이 없어서, 내가!” 

자책하는 할머니의 손은 속 타는 마음 고스란히 담겨 뜨겁고 떨렸다.

오랜 세월 가슴에 맺혀 응어리진 타래를 말로 풀어낸 할머니는, 시각화했더라면 아마 라푼젤의 머리보다도 더 길었을 이야기를 한아름 풀어내고, 우울의 성벽을 이제 막 탈출한 듯 어리둥절하나 미소 머금은 얼굴로 진료실을 나섰다.

“아이고, 이사 슨생님, 도나쓰 하나 자실랑교~?”
(“아이고, 의사 선생님, 도넛 하나 드실래요?”의 경상도 방언)

그리하여 남겨진 쭈글쭈글 동그란 도넛 하나. 기름진 고소함은 이미 진료실을 가득 메웠고, 그 형상은 햇빛에 그은 둥그스름한 얼굴, 깊이 팬 주름 타고 내리던 할머니의 눈물과 웃음과 닮아있어 적잖이 놀랐다. 엄마와 아들, 부모와 자녀, 그 많은 “관계”들로 세워진 복된 가정 그리고 병든 가정, 상처 입은 관계 속 사람과 사람들. 눈물 맺힌 흐린 두 눈에 담긴 간절한 미소. 이 모든 시간과 소망, 그리고 기도를 담은 이 “동그라미의 신비”.

 

도넛의 추억

 

■ “둥글게 둥글게”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추는 원만한 관계이면 좋겠지만 늘 그렇기란 쉽지가 않다. 부모의 혹독함에 상처 입은 자녀의 이야기도 아프고, 내가 낳은 자녀에게 매 맞고 불안으로 밤잠을 설치는 부모의 사연도 아프다. 대인관계에 울고 웃는 것이 사람인지라 과연(UCLA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인 대니얼 시겔의 표현대로) “마음은 관계에서 나온다,”는 말에 동의가 된다. 가시 돋고 깨어진 관계를 둥글고 건강한 관계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수잔 포워드의 『독이 되는 부모가 되지 마라: 독이 되는 부모의 대물림을 끊고 진정한 부모로 거듭나기』는 어린 시절의 상처를 극복하고 치유하는 지침서이다. 상처 입은 과거, 피폐해진 현재의 삶을 돌아보면서 내 안에 쌓인 독을 깨달아, 대물림된 상처를 치유하고 건강한 미래와 건전한 부모상을 정립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다. 여기에는 여섯 종류의 독이 되는 부모가 등장하는데, 신처럼 군림하는 부모, 의무를 다하지 않는 무능한 부모, 자식을 조종하는 부모, 술이나 물질에 중독된 부모, 잔인한 말로 상처를 주는 부모, 신체적·성적으로 학대하는 부모가 그러하다. 병든 가족 체계의 씨앗은 뽑아내고, 자존감을 회복해 그 자신의 삶을 살아가도록 도움을 준다. 

신처럼 군림하는 부모는 경직되고 엄격하여, 아이가 독립을 주장하는 시기나 변화가 있는 시기, (가령 대소변 가리기, 사춘기, 청소년기, 결혼 시기 등) 부모로부터 분리되는 과정이 극에 달할 때마다 자녀의 행동을 “자신에 대한 반항, 인격 모독 행위”로 여겨 자녀를 위협한다. 그래서 자녀가 부모에게 의존하고 깊은 절망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방어한다. 아이는 자존감에 상처 입고, 독립을 방해받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는 부모를 신격화해 이 악순환을 이어간다.

부모의 미성숙함과 불안·공포의 혼돈 상태가 자녀를 조종하고 간섭하기도 한다. “내가 낳았으니 넌 내 거야”, “공부해. 이게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라는 식의 합리화가 흔하다. 혼란한 부모에게 자식은 경쟁자이다. 자식의 결혼은 중대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자식의 배우자를 경쟁자로 여겨서 “사랑과 보살핌이라는 미명”으로 자식을 조종하기도 한다. 자녀들은 어떻게 해서든 사랑받고 싶게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평생 심리적인 탯줄을 끊지 못하고 인격적인 성숙과 발전의 기회를 박탈당한다. 부모의 정신 불건강 상태가 “독”이 되어 자녀에게, 또 그 자녀의 자녀에게 대물림되는 것이다. 자신과 스스로 삶에 만족하는 부모는 자식을 조종하거나 군림하지 않는다. 

과거의 “나”는 어리고 나약해서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고,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었지만 좌절했다. 그 과거의 결핍과 상처는 보듬어주고 달래주어야 한다. 그러나 잘못된 관계를 굳이 지금까지도 재현함으로써, 자기 계발과 대인관계의 기회를 상처와 후회로 대치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고 조치를 취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부모가 뿌린 감정의 씨앗이 사랑, 존경, 독립심의 형태로 뿌려지도록, 그래서 그 씨앗이 자라 자녀의, 또 그 자녀의 자녀에게 자존감, 직업, 대인관계 면에서 긍정적 영향을 끼치도록 훈련이 필요하다. 이것은 부모를 탓하는 말이 아니다. 독성이 있는 부모 또한 그들의 부모에게서 공포, 속박, 죄책감, 수치심과 같은 감정의 씨앗을 물려받아 싹 틔운 까닭이다. 따라서 자신을 통찰하고 용서와 화해로 회복하고 변화하려는 노력은 우리가 경주할 바이다. 

 

■ 5가지 대인관계의 양식

밀란 여코비치와 케이 여코비치는 『사랑의 양식(How We Love: Discover Your Love Style, Enhance Your Marriage)』이라는 그들의 저서에서 어린 시절이 성격과 행동 패턴을 형성하고, 성장 환경에 따라 사랑의 양식, 즉 연인에게 반응하는 성향이 달라진다고 보았다. 이것은 비단 사랑의 양식뿐 아니라 일반적인 대인관계에도 적용된다. 

▎The Pleaser (비위꾼, 남을 기쁘게 해 주려는 사람)

과잉보호, 잦은 화, 비판적인 환경과 같은 안정적이지 않은 부모 슬하의 자녀들은 부모 눈에 거슬리지 않고, 상황을 좋게 하고자 순종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살피기보다는 부모에게 안정감을 주는 데 시간과 노력을 쏟는다. 갈등 상황이 불편해 이를 만회하고자 먼저 사과하고, 거절에 서툴고, 갈등을 최소화하고자 한다. 그렇다 보니 어려서부터 눈치가 발달해 타인의 감정을 빨리 알아차리고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기도 하다. 혹여나 타인을 실망시키기라도 하면 우울해지고 그 관계에서 도망치기도 한다. 

▎The Victim (피해자)

이들은 무언가 피해를 입은 듯이 수줍고, 자존감이 낮고, 우울과 불안 증상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 화가 나 있고 폭력적인 부모에게서 무사히 살아남기 위해 눈에 띄는 언행을 삼가고 순응하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숨거나 조용히 있어야 하는 그 현실이 고통스러워 마음속 상상의 세계를 안전기지 삼아 위험을 견딘다. 오랜 세월 스트레스와 혼란에 적응했기 때문에 편안함이 오히려 불안하고, 편안한 상황에서는 그다음에 불어닥칠 폭발에 미리 앞서 걱정하고 초조해한다. 

▎The Controller (조종자)

부모나 양육자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환경에서, 아이는 어려서부터 스스로 돌보고 강해져야 했다. 적절한 시기에 그 결핍이 해결되지 않은 채 성장한다면, 성인이 되어서도 어릴 적 취약함을 숨기고자 항상 지배하는 느낌을 받고 싶어 한다. 공포와 굴욕, 무력감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피할 때 자기가 지배한다고 여겨, 분노를 상처의 수단보다는 오히려 힘을 유지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한다. 조종자는 융통성 없이 경직되어 있으면서도 예측 불가의 혼란스러운 면도 보인다. 이들은 보호받지 못한다고 느껴 안전한 곳으로 나오기를 꺼리고, 자기 방식대로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미숙함을 드러내다 해결이 제대로 안 되면 분노한다.

▎The Vacillator (동요자, 흔들리는 사람)

예측 불가능한 부모로부터 한결같은 보살핌을 받지 못한 경우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어릴 적, 자신이 원하는 것은 부모의 우선순위가 아님을 이미 학습했다.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다 정작 부모가 관심을 줄 때면 이들은 대부분 화가 나 있거나 이미 지쳐 그 관심을 받지 않는다. 부모와 서로 타이밍이 맞지 않은 것이다. 성인이 되어서는 어릴 적에 받지 못한 일관된 사랑을 찾으려 해서, 새로운 관계에서 상대를 이상화했다가도 실망하면 낙담하고 의심하는 불안정한 관계 패턴을 보이고, 내면적 갈등과 정서적인 문제로 힘들어한다. 

▎The Avoider (회피자)

경직된 가정에서, 애정을 주지 않고 자립을 추구하는 환경에서 자란 경우는 어린 나이에 자립하여 스스로를 돌본다. 부모에게서 편안함과 안전감을 느끼지 못해 그 불안에 대처하고자 자신의 감정이나 필요는 늘 차선이다. 이들은 감정보다는 논리나 객관성에 의존하고, 감정 기복이 있는 사람들 곁에 있는 것을 불편하게 여겨 회피한다.

 

■ “나와 우리(Me & WE)”, 연결되고 균형 잡힌 관계

상술한 시겔의 『마음을 여는 기술』의 원제는 마인드사이트(Mindsight)이다. 마음의 눈 즉, 심안(心眼)으로 자신(Me)을 통찰하고 상대방을 공감함으로써 우리(We)를 이루는 관계에 이르게 됨을 일컫는다. 나 자신을 통찰한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과 감각, 마음과 정신과 전신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이해하며 연결 및 통합되는 것이다. 그 마음의 눈으로 타인을 보고 공감한다는 것은, 관계 속에서 타인과 조율하며 연결 짓고, 서로 공명할 수 있는 상태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즉, 관계와 소통은 나 자신을 이해함에서 시작되며, 여러 통합의 상태를 이룸으로써 “나와 우리”라는 연결된 존재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100세 정신과 의사 할머니의 마음 처방전”이라는 부제의 『백 살에는 되려나 균형 잡힌 마음』이라는 책의 제목은, 균형 잡힌 마음과 거기서 비롯되는 바른 결정과 행동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반증해준다. 자신을 살피고 타인과 연결되어 살아가는 균형 잡힌 삶은 그만큼 값진 것이고, “단 1밀리미터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라는 노년의 고백이 그래서 더욱 와 닿는다. 

 

■ 할머니의 도넛과 구스타프 클림트

할머니의 도넛은 따뜻하고 달콤했다. 도넛이 지닌 주름, 황갈색으로 그은 다양한 명암이 80여 년 인생의 굴곡을 담아내고 있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여성의 세 시기(The Three Ages of Woman」(한 여성의 세 시기, 혹은 3대의 이야기를 적용해볼 수도 있는 작품이겠다)에 등장하는 할머니처럼 딸과 또 그 딸의 딸이 봄처럼 꽃 피운 삶을 살도록 다 쏟아붓고 앙상한 가지로 남은 이 땅의 어머니들. 이것은 세상 풍파에 그을고, 주름과 상처를 입고, 고운 아름다움은 잊고 또 잃고, 얼굴조차 가리운 노인이 되어 구부정하게 지탱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명절을 맞아 나와 가족, 그리고 관계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서로의 독성을 해독하고 건강한 정서와 관계의 씨앗을 뿌리자. 노년에 마주한 거울에, 나와 후손의 안정과 행복이 아름답게 비출 수 있도록.

 

The Three Ages of Woman_구스타프 클림트

 

■ 참고문헌

다카하시 사치에 지음, 정미애 옮김. 『백 살에는 되려나 균형 잡힌 마음: 100세 정신과 의사 할머니의 마음 처방전』 서울:바다출판사, 2018.

대니얼 J 시겔 지음, 오혜경 옮김. 『마음을 여는 기술: 심리학이 알려주는 소통의 지도』 서울:21세기북스, 2011.

수잔 포워드 지음, 김형섭, 지성학, 황태연 옮김. 『독이 되는 부모가 되지 마라: 독이 되는 부모의 대물림을 끊고 진정한 부모로 거듭나기』 서울:푸른육아 2015.

Milan & Kay Yerkovich. 『How We Love: Discover Your Love Style, Enhance Your Marriage』 NY: Waterbrook, 1995.

 

* 대한정신건강의학과 봉직의협회는 정신건강의학과 봉직의들로 구성된 비영리단체로, 일선 정신건강의학과 진료현장의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하고 정신건강의학과 봉직의들의 권익과 처우를 증진시키며 이를 통해 환자의 치료받을 권리 보호와 정신 건강 향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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