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신예니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그림_haerin

■ 진료실 풍경

그가 다녀갔다. J.R.R.톨킨이 묘사했던 후오른(Huorn,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움직이는 숲과 나무들을 일컬음) 같으나, 철저히 가지 쳐진 모습으로 걷고 말하는 고목(古木) 같은 그가. 여전히 길쭉하고 깡마른 체형에, 근육도 수분도 메마른 얼굴에는 목피 같은 각질이 바싹 마른 이끼처럼 하얗게 번져있다. 하얀 부스러기들이 유난히 은빛을 발하는 것은 아마 “술이 좀 드가서” 뽈또그리~해진 낯빛과 대비되어서일 게다.

찜통-더위를 온몸으로 꿉꿉하게 담아내는 그는 뜨거운 사막 고목(孤木)처럼 서 있다. 병동에 가서 좀 말끔히 씻고 제대로 먹고 쉬면 좋으련만 입원은 안 한단다.

“곧... 또...... 오...께...예...에!”

술기운 사이로 겨우 내뱉는 숨결에는 나지막이 읊조리는 취한 음성이 실려있다. 『주토피아』에서 플래쉬(Flash, 참으로 대단한 모순어법이지 않은가!)로 분했던 나무늘보처럼 말...하고... 움...지..이..기..는 그...는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선보였다. 며칠 술만 먹고 씻진 못한 듯 남루한 행색이나 머리만은 발랄하고 ‘괴랄’하기까지 하다. 예쁘게 떡졌다.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지만, 여전히 진료실엔 그가 남긴 여름의 체취가 며칠간 묵히고 삭히고 여전히 진행형이기도 한, 멀티-시제의 술 냄새와 어우러져 진동한다. 후각에 압도되어 그의 모습이 아른거리고, 만화주인공 같았던 그의 모습을 잠시 끄적여 두었다.
 

 

■ 중독과 의존: DSM-‘IV에서 5로’의 변화와 시사점

중독이라는 표현은 강렬한 인상을 준다. 중독(addiction)은 ‘특정 물질에 신체적으로 의존하는 상태’를 일컬으며 비공식적으로는 ‘특정 관심이나 활동에 전념하는 상태’를 의미해왔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따르면 그 어원은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제는 폐어(廢語)가 되었지만 ‘~에 얽매인’이라는 형용사 ‘addict’가 있었고, ‘부여하다, 지정하다’라는 ‘assign’의 라틴어 addicere와 ‘~에’를 의미하는 ad-, 그리고 ‘말하다’를 뜻하는 adicere를 합성한 ‘~에 얽매임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말’이 곧 중독이었다. 그러나 환자를 물질에 지배받는 수동적이고 나약한 존재로 비하할 소지가 있다 하여 2013년 DSM-5(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 개정판)에서는 ‘물질 사용 장애’로 그 표현을 달리하게 되었다. 

더불어 DSM-IV에서 5로 개정되면서 진단기준상에 물질 사용과 관련하여 되풀이되는 범법행위 조항은 삭제되고 음주 갈망 조항이 추가되었다. 물질 사용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 항상 범법행위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근거한 것인데, 달리 표현하면 ‘행위의 결과’보다는 ‘행동의 원인’에 더 무게를 싣고 있다. 즉, 행위의 부정적인 결과가 진단에 영향을 미치기보다는 뇌의 조절 이상처럼, 중독 행동을 시작하도록 자극하고 결국 그 행동을 멈출 수 없게 만드는 원인을 뇌의 문제에서 찾고자 하는 노력이 반영된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여기에는 중독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려는 시도인 ‘뇌 모델’과 ‘뇌질환모델’ 둘 다가 포함되겠다. 그만큼 중독 행위를 뇌의 작용과 관련지으려는 것인데, 이는 치료를 위한 공공정책을 이끌고 환자들의 도덕적 책임을 덜어주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중독과 뇌, 그리고 책임의 문제에 관해 재고할 여지가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 중독의 이해: 뇌 모델 vs. 뇌질환모델

다니엘 부크먼 등은 「중독 신경과학의 역설」이라는 글에서 중독을 뇌질환으로 규정함으로써 파생되는 문제들을 짚어내고 있다. 중독을 뇌질환으로 귀속시키면 환자의 도덕적 책임이나 통제력 상실 같은 비난과 오명을 덜 수 있고, 생물사회공동체의 관심을 끌어 거국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환자들의 책임 감소가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것이, 병식(病識, insight, 자신이 병에 걸려 있다는 자각으로, 정신장애인의 진단과 치료에 중요) 없음이나 부족으로 인해 치료가 어렵고 재발 가능성이 높은 중독을 ‘뇌 탓하기’로 부채질할 소지가 있으며, 중독환자를 ‘뇌가 병든 사람’, 그래서 일반인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새로운 규정으로 ‘또 다른 타자화나 오명’을 씌워 결국 사회·심리적 거리를 벌릴 우려가 있다. 

뇌 모델은 중독과 약물 의존의 뇌기전을 설명하는 것으로 음주 갈망, 보상, 의존, 금단을 주로 도파민 회로의 이상을 중심으로 해석한다. 이는 환자와 대중의 이해를 도왔고, 인식 변화를 가져왔으며, 중독 질환과 관련된 공공 정책과 치료법을 개발하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중독의 생물학적, 뇌과학적 기전 자체가 중독은 아니라는 비난도 있었다. 중독의 다양한 원인들의 “교향악적 인과관계”를 고려할 때 뇌 기능은 그들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뇌 모델이 중독을 설명해주고 이해를 돕는 것이었다면, 뇌 질환 모델은 “병든 뇌” 따라서/그러나 “치료 가능한” 뇌의 개념을 제시했다. 중독을 병으로 규정하는 중독의 신경과학이 가진 역설은 환자의 책임을 감소시키고 도덕적 혐오감을 높인 것이었다. 진단에는 판단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정신과 진단이 해당 환자를 바라보는 프리즘과 낙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는 뇌 모델과 뇌질환모델이 의도하지 않은 폐해이다. 

중독을 뇌의 문제로 끌어들임으로써 환자들이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비난도 있다. 중독자들이 자유의지로 선택하였던 중독 행위가 과거에는 죄악시되거나 사회규범을 어긴 것, 그래서 치료를 요하는 행동으로 여겨져 책임을 부여했지만, 뇌의 문제로 귀속되는 순간 그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이다. 중독의 진단기준에는 ‘음주 갈망’이 포함되어 ‘중독=뇌 질환’이라는 공식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중독을 뇌의 작용으로 설명하면 질병을 객관화시켜 환자의 책임을 덜고, 환자나 일반인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뇌의 문제를 진단기준으로 명시함으로써 환자를 아웃사이더로 규정지을 소지가 있다. 따라서 중독의 진단은 신중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자칫, 정상적으로 이해 가능한 행동이나 반응을 병적인 것으로 치부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이 바로 진단과 책임, 그리고 관계의 문제이다.

 

사진_픽사베이

 

■ 관계와 책임의 문제

뇌 모델과 뇌질환모델은 중독 혹은 물질의존의 책임을 상당 부분 뇌에 전가시키고 있다. 그러나 치료에 중요한 것이 정확한 진단과 적절한 치료방법의 선택, 그리고 의사-환자의 치료적 관계 형성이라는 점에서 개개인의 내적인(intra-personal) 책임과 대인관계에서의 외적인(inter-personal) 책임이 중요하다. 스캇 펙은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신경증인 사람들은 너무 책임을 지려 하고, 성격장애인 사람들은 응당 져야 할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한다. 신경증인 환자들은 세상과의 갈등이 생겼을 때 자기들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격장애의 사람들은 세상과 대결할 때 세상이 잘못됐다고 치부해 버린다.”라고 적고 있다. ‘나’는 어느 경향이 짙은지, 신경증과 성격장애 사이 어디쯤 위치하는지 스스로 돌아보고 중용의 자세를 회복할 필요가 있겠다.

음주와 중독에는 그 행동의 원인과 시작, 과정, 그리고 결과 어느 단계에서든 (비)자발적 회피와 무책임의 순간이 존재한다. 직면하기 어려운 현실, 갈등, 상처, 기억 등을 잊거나 피하고자 “술의 힘”을 빌리는 경우를 종종 본다. “맨 정신으로 살기에는 너무나 각박한 세상이라” 반주(飯酒)를 한잔씩 걸친다는 환우도 있었다. 그러나 다양한 상처의 “특효약” 혹은 “알딸딸한 마취제” 같았던 술이 조절력을 상실함으로써 결국 자신과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고, 관계를 깨뜨린다. “뇌가 아파”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멈추는 것은 오히려 환자의 환자 됨 혹은 환자 역할이나 이차 이득을 조장·강화할 우려가 있어 환우들과 보호자, 의료인, 일반인 모두의 지속적인 관심과 조력이 필요하다.

책임에 대한 성찰은 중요하다. 알프레드 토버는 『어느 의사의 고백』에서 현대 의료체계에 대한 윤리적 성찰과 철학적 고찰을 담고 있는데, 그 자신이 의사로서 “과학자라는 이유로 환자에게서 (환자를 진단하고 판단하는) 이런 권위와 권력을 부여받았다”라고 고백한다. “타자가 존재함으로써 나는 윤리적 책임을 갖고 살아갈 수 있다”는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주장도 같은 맥락에서 일리가 있다. 의사도 환자가 있음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독을 비롯한 질환의 문제에서 타인은 쌍방 간의 타인이어야 한다. 의사는 스스로 실력을 갖추고 환자에 대한 역할과 책임을 다하고, 환자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의식을 갖고 치료적으로 협조하는 상태, 즉 의사는 의사의 책임을 다하고, 환자는 환자의 책임을 다하는 상태로 마주하는 “의사-환자 관계”가 치료적 힘을 발휘한다. 뇌의 기전이나 뇌 질환 같은 설명이 이해를 도울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병증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어서 중독의 문제를 거론할 때에는 환자 입장, 의사 입장, 그리고 이들이 함께 이루어내는 치료적 관계를 함께 고려한다. 

더불어 내면의 관계 정립이나 관계 정리도 치료에 도움이 된다. 약물중독이나 의존으로 진단받는 환자들에게는 해결되지 않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관계 문제가 내재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성격, 행동, 태도의 문제와 같은 스스로와의 갈등, 타인과의 갈등 문제가 상처로 굳어지고 그러한 이유로 현재의 중독 행동과 문제가 유지 혹은 반복된다. 자타의 과거와 관계를 회복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통합함으로써 현 문제의 실마리를 찾고, 치유에 이르는 사례도 있다. 따라서 스스로 과거와 현재를 돌보는 내적인 관계 회복, 타인과의 외적인 관계 회복, 그리고 의사와의 치료 관계 회복이 중독의 이해와 해결을 위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중독의 진단에는 정치적·사회적·역사적인 맥락이 스며 있다. 그러나 중독환자를 대하고, 진단하고, 치료하기 위한 의료인으로서는 타인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그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치료적 관계를 형성함으로 교정적 정서 경험을 이루어가는 것이 중요하겠다. 무엇보다도 환자로 규정함으로 새로운 경계선을 긋는 것이 아니라 “의료에서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관계”를 형성하고 회복해나가는 것이 중독의 해결을 돕는 출발점이 아닌가 한다.

 

사진_픽사베이

 

■ 은빛 희망, 은색 빛줄기(silver lining)

“Every cloud has a silver lining”이라는 영어 표현이 있다. 직역하자면 “모든 구름에는 은색 빛줄기가 있다”라는 것으로, 이는 짙은 구름 사이로 빛줄기가 뿜어져 나오며 은색 테두리를 형성하는 모습을 일컫는다. 의역하면, “아무리 불행한 상황이라도 한 가지 희망은 있다,” 혹은 “쥐구멍에도 볕 들 날 있다”라는 의미이다. 대낮에 다녀간 그 환우도 지금은 떡진 머리처럼 술로 뒤범벅된 시간을 겪고 있지만, 그 인생에도 은색 빛줄기가 드리워지기를 소망해본다. 고목 같던 아저씨가 어느 순간 발랄한 머리를 하고서 은빛 미소를 날리며, 술맛보다 더 감칠맛 나는 인생의 맛을 보았노라 고백하고 자랑할 날이 오기를, 소망하며 고대해본다.

 

■ 참고자료

강영안,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 (서울:문학과지성사, 2005).

스캇 펙, 『아직도 가야할 길』 (서울:열음사, 2007).

알프레드 토버 지음, 김숙진 옮김. 『어느 의사의 고백』 (서울:지호, 2003).

에마뉘엘 레비나스

Daniel Z. Buchman, Judy Illes, Peter B. Reiner. "The paradox of addiction neuroscience." Neuroethics 4(2), 2011.

Darrel Regier, Emily Kuhl, David Kupfer. “The DSM-5: classification and criteria changes”. World Psychiatry 12(2), 2013.

Nora D. Volkow, George F. Koob, A.Thomas McLellan. “Neurobiologic advances from the brain disease model of addiction.” N Engl J Med 274, 2016.

 

* 대한정신건강의학과 봉직의협회는 정신건강의학과 봉직의들로 구성된 비영리단체로, 일선 정신건강의학과 진료현장의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하고 정신건강의학과 봉직의들의 권익과 처우를 증진시키며 이를 통해 환자의 치료받을 권리 보호와 정신 건강 향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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