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건대하늘 정신과 박지웅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는 계속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지요. 끊임없이 새로운 과제를 내놓습니다. 그것은 이전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과제들이고 혹독한 겨울처럼 견디기 힘든 것들도 있죠.

물론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습니다. 우리가 겪은 첫 번째 세상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안락한 곳이었으니까요. 엄마의 체온이 늘 우릴 감싸고 있었고 영양은 탯줄을 통해 절로 공급되었습니다. 네, 우리가 겪었던 첫 번째 세상, 엄마의 뱃속은 지고지순의 안락함 그 자체이었습니다.

하지만 완벽하기만 한 그곳에서 언제까지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엄마 몸에서 세상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세상은 우리에게 수많은 과제들을 안겨줍니다. 이제는 스스로 찬 공기를 들이마셔야 했고 열심히 우유를 빨아야 했으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목청껏 울어야 했습니다. 이런 환경이 아기로서는 얼마나 짜증 나고 힘들었을까요?

 

이런 식으로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새로운 환경에 노출되었고 그것을 적응해내면 세상은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운 환경을 펼쳐놓습니다. 마치 끊임없이 시험대에 오르는 것처럼요. 게다가 거기에 맞춰서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도 냉정해지지요.

아기는 어느새 어려운 수저질을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꼬마가 되어 있고, 이전처럼 편하게 손으로 주워 먹었다간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이 나죠. 이전엔 뭘 해도 이쁨 받았는데 점차 내가 해야 하는 책무라는 게 생깁니다. 어떡하겠어요? 적응해야죠. 더욱 자라니 이제는 엄마 품을 벗어나서 학교란 곳을 가라고 합니다. 새 학기 특유의 긴장감이 기억나시죠? 환경이 바뀌는 것은 그만큼 스트레스였습니다.

물론 우리는 울음을 참는 힘도 같이 길렀습니다. 그렇게 체급을 키워가면서 여기 오기까지 여러분은 수많은 적응 과정을 거쳐온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갓난아이 시절 세상이 떠나라 울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겪은 수많은 적응 과정들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할 뿐인 것이죠. 다들 지금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학교나 직장, 또는 인간관계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마음이 드시나요? 안타깝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겠고 ‘왜 저 사람은 유별나게 힘들어하지?’라며 냉정한 시선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후자라면 그때의 고생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적어도 그 분야에서 아직까진(?) 성공적으로 적응해온 분들일 수도 있습니다. 성취는 여러모로 유익한 경험이지만 공감 능력을 약화시키는 부작용이 있거든요.

반대로 그 고충을 겪어본 사람은 그 힘듦을 더욱 잘 공감할 것입니다. 전학생의 고충은 전학을 해본 사람이 더 잘 이해할 것이고, 이별을 당한 사람의 고충은 비슷한 경험을 해본 사람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요. 남들은 유난, 배부른 소리로 치부를 하더라도 ‘나는 그 마음이 뭔지 잘 알아. 참 많이 힘들지’라고 진심으로 공감해줄 수 있겠죠.

 

사진_픽셀

 

하지만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해서 꼭 잘 공감해주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더 냉담한 경우도 많지요.

이등병 시절을 거쳤으니 선임은 당연히 이등병의 고충을 공감해줄까요? 그렇다면 좋겠습니다만 자신의 고충을 기억하기보다는 부정하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군대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군대 얘기를 할 때면 어리바리했던 시절은 쏙 빼놓은 채 허풍스러워지거나 오히려 후임에게 가혹해지기도 하죠. 이런 분들은 요즘 군대 참 편해졌단 말을 빼놓지 않죠. 그런 분에게 공감을 구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마치 강력한 유교 가치관 속에서는 며느리의 고충이 시어머니의 공감의 대상이라기보단 부정의 대상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군대나 시집살이처럼 아주 견고한 모범 답안이 그 세상과 구성원의 삶을 지배하고 있을 때 이런 경향은 두드러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모범 답안대로 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마땅히 주어야 할 공감의 기회를 앗아가 버립니다. 부적응은 공감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수치나 비난의 대상이 됩니다. 그 시대에 못난 며느리로 낙인찍힌다는 것은 죽기보다도 끔찍한 선고나 다름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중립적인 용어였던 관심병사란 말이 이제는 경멸과 수치심을 일으키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옛날 군대나 시집살이만큼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모범답안의 압력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겪는 과정이니 얼른 적응해라!’라는 분위기. 그리하여 잘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쉽사리 터놓고 이야기하기가 어려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안 그래도 훌륭하고 성공적인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 같은데 이 정도도 못 해내면 나의 가치는 추락할 것만 같습니다. 학교든, 직장이든, 군대든 잘 적응해내지 못하면 마치 내 인생 전체가 결격 사유가 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누구에게도 말 못 하고 버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침내 극복해내면 다행이지만 때때로는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해 망가지기도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러니 단순히 다수가 현재 적응하고 있다고 해서 적응 과정의 어려움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모두가 젓가락질을 잘하고 있다고 해서 울면서 배우던 아이의 마음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모두가 학교를 졸업했다고 해서 처음 입학할 때의 스트레스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운전을 잘한다고 해서 초보운전 시절 울고 싶었던 그 감정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때로는 실패를 선언하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환경에 적응해야 건강하고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사실 모든 환경에 적응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지요.

아무리 수영을 잘하는 펭귄이라도 뻐꾸기를 따라 숲에서 적응하려 한다면 젬병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상처 받고 좌절하는 펭귄을 본다면, 여러분은 어떤 말을 해주고 싶나요. 펭귄이 포기하고 물속으로 돌아간다는 결정을 하였을 때, 우리는 오히려 응원해주고 참 잘 결정했다고 칭찬해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숲에서의 적응 실패는 더 나은 환경을 찾고 적응하는데 소중한 경험이 되었을 것입니다.

특정 환경에서의 적응 실패는 삶 전체의 실패가 아닙니다. 삶에서 펼쳐지는 여러 가지 게임 중 한 가지가 나와 맞지 않음을 발견한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거기서 좌절감을 피할 순 없더라도 나와 세상을 이해하는 좋은 깨달음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실패 선언인 것입니다.

 

적응은 힘든 거예요. 새로운 환경, 새로운 역할,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중에는 신생아가 엄마 몸 밖으로 나와야 하는 것처럼 반드시 거쳐야 할 것도 있지만, 펭귄에게 숲에서 적응하라고 하는 것처럼 부적절한 것도 있을 것입니다. 각자 가진 몸과 정신, 그리고 주변 환경이 다르니 각자 다른 성장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유달리 오래 걸릴 수도 있고, 끝끝내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적응과정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며 성장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을 수도 있고, 나와 맞지 않는 곳을 과감히 떠나는 지혜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힘들다고 해서 내가 문제가 있는 것이라 자책하지는 마세요. 다만 우리는 배워가고 있는 과정일 뿐입니다. 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그리하여 더 용감하게 더 지혜롭게 우리는 성장해갈 것입니다. 그리고 먼 훗날 힘들어하는 우리의 후배에게 그 배움의 과정이 참 어렵고 괴로웠지만 의미 있는 과정이었다고 진심으로 공감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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