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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박지웅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승인 2017.01.13 08:28
사진 피로사회(한병철 저)


보고, 보고 또 보고 세 번을 연달아 읽은 책은 피로사회가 처음일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책이 독일에서 그리 큰 반향을 일으켰냐는 점이 참 의아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한병철 교수가 제시한 피로사회의 메커니즘은 아주 한국적인데, 서구인의 삶도 이런가? 그런 의문이 들 정도로 한국 사람들이야말로 이 책, 피로사회를 통해 얻는 통찰의 충격이 가장 클 것 같다. 이 책은 한국계 독일인 한병철 교수의 독일어 철학책이다.

 


<성과사회의 긍정성이 일으키는 현대의 병, 우울>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질병이 있다"라는 첫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과거에 신, 왕, 또는 이념의 형태였던 규율사회 속 절대자의 주권이, 현대 성취사회에 와서 개인에게 이양되면서 현대의 사회병리가 발생한다고 본다. 기회, 평등, 인권, 자유 그리고 ‘Yes, you can’이라는 달콤한 긍정의 말이 현시대의 병들을 배양한다는 한병철 교수의 진단은 기발하고 발칙하다. 그에 따르면 우울증으로 대변되는 현시대의 병리는 과잉긍정성에 의한 소진, 비만, 경색의 병리다.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가? 나는 자기 간을 푸아그라로 승격시키기 위해 고영양 물질들을 목구멍으로 쏟아붓는 현대인의 모습이 그려졌다. 과잉긍정성 세상의 주권자인 개인은 어느새 자기폭력/착취의 주체가 되어있다.

 

 

<규율사회의 생리와 병리>


한병철 교수는 현대 성과사회의 개인을 이해하기 위해 과거의 규율사회와 대조한다. 주권이 절대자에게 있던 과거 규율사회에서는 명령/금지 등의 부정성에 의한 공포가 핵심 병리였다. 부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개인과 사회의 대처방식은 내부적으로는 규율/복종, 외부적으로는 검역/배척이었다. 부정성의 폭력/착취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반대로 쓰러지지 않는 저항력의 원천이기도 했다. 한병철 교수는 ‘면역학적 시대’라는 기막힌 비유로 과거 규율사회의 핵심생리를 아주 보기좋게 드러낸다. 타자와의 접촉은 박테리아 감염의 위험이 되므로 면역학적 저항의 대상이 된다. 사회 내부의 감염된 자 또한, 호모 사케르로 규정되어 추방 당한다. 그렇게 규율사회는 타자를 배척하며 결속되고 보존된다. 흥선대원군과 북한이 떠오른다.

 

사진_픽셀


<규율사회 착취의 서사성과 만족감, 그리고 성과사회 착취의 탈서사성과 피로감>


규율사회에서의 개인은 주권자가 부여한 역할에 복종하고, 면역학적 타자와 투쟁하며 산다. 비록 처벌과 패배의 두려움 속에서 주권자와 타자에 의해 착취되겠지만 그의 삶은 결연하다. 천국을 간다거나 하는 등의 종교적 의미나 숭고한 공동체적 가치가 부여되는 서사가 덧칠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 성과사회에 다다르며 개인의 삶에서 서사는 벗겨진다. 삶의 종교적, 이념적, 정신적 의미는 증발하고 개인의 삶은 벌거벗겨진 채 '전시'된다. 성과사회에서는 더이상 나를 명령하고 금지하는 타자는 없지만, 마네킹과 셀럽들의 위대한 나체들이 나를 유혹하고 압박한다. “Yes, I can,” 이제 유혹 당한 자신을 착취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성과사회는 결국 도핑사회로까지 진화한다. 하지만 그 추구, 또는 자기착취의 끝은 피로사회이며 소진과 우울이 기다리고 있다.

 


<초라한 내 삶은 누구의 탓인가?>


과거 규율사회에서 규율에 충실한 한, 개인은 스스로를 탓할 필요가 없었다. 주권은 개인이 아니라 신, 왕, 이념 등의 주권자에게 있었다. 평화, 평등, 자유 등이 보장되지 않는 대신에 우리는 결속감을 느끼며 내부에 충성하고 외부의 적과 싸웠다. 그 삶의 누추함이나 고통은 서사가 덧대어져 숭상될 뿐만 아니라, 애초에 나는 그 책임에서 면제될 수 있었다. 내 고통의 발원이자 분노의 대상은 기본적으로 타자이며, 그 책임은 내가 아니라 차라리 주권자가 져야했다. 결국 규율사회의 주권자도 종국에는 처절한 면역반응의 대상이 되어 궐위되지 않았던가. 민주 정부가 들어서며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인종, 종교, 신분 등의 차별은 척결되었다. 그렇게 개인은 마침내 삶의 주권을 쟁취했고 돈과 정보가 넘쳐나 기술, 교육, 물자 등에 접근을 막는 장벽은 허물어졌다. 정말 모든 것이 가능한 긍정의 사회가 도래했다. 하지만 기회와 평화는 전쟁/배척과는 다른 새로운 고통을 가져왔다. 문제는 개인은 더이상 누굴 탓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주권자가 된 자신이 오롯이 그 책임을 져야한다. 자신과의 싸움, 착취는 여기서 기인한다.

사진_픽셀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의 우울>


우울증과 자살이 선진국에 훨씬 많고 전쟁시기에는 오히려 줄어든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p28)라는 한병철 교수의 통찰은 발전한 사회의 개인이 우울한 이유에 신선하지만 불편한 진실을 제시한다. 그렇다고 무능한 개인에게 책임을 돌려 꼰대질을 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는다. 그보단 시스템 폭력으로서 성과사회의 긍정성의 폭력을 강조했다. 이길 수 없는 레이스를 전력질주하는 개인 덕에 자본주의 성과사회는 계속해서 살을 찌운다. 그럼 지금 레이스가 끝이 없음을 깨달은 우리는 어떡해야하나? 진단은 훌륭하지만 '피로의 치유효과'를 제시한 한병철 교수의 처방은 다소 막연하고 싱겁기까지 하다. 오히려 역자가 역자후기에 제시한 "끝없는 성공을 향한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개개인의 반성과 자각"(p127)이 더 나은 방법 같다. 아니 어쩌면 개인의 처방은 스스로 찾아나서야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목격한 한국사회의 전개, 긍정착취-힐링-긍정혐오>


오늘날 한국사회는 긍정에 대한 거부반응이 어느 때보다 뜨겁다. “Yes, you can" 은 열정페이, 노오오력, 꼰대질로 몰려 공격 당한다. '모든 것이 가능한 사회'라고 진단한 한병철 교수도 어쩜 모국에선 조롱거리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략 15년전, 2000년대초만해도 사회분위기는 지금과 완전히 딴판이었다. 내가 대입수험생이었던 그 시절, 긍정성의 치세는 말 그대로 하늘을 찔렀다. '하면 된다', '네 운명은 네가 만드는거야', '간절히 소망하면 이루어진다”의 긍정 문화가 서점가와 TV를 점령하고 있었다. 지금의 열정페이, 노오오력, 꼰대질은 그땐 열정, 노력, 멘토로 우리를 가슴 뛰게 한 연료였다. 그런데 그 긍정성 정권이 전복되어 역적선고를 받은지가, 긍정혐오의 시대가 들어선지가 대략 5년쯤 된 것 같다. 그 직전에 또 대략 5년 정도의 '힐링' 타임이 있었던 것 같다. 힐링이 유행한 그 시기 사람들이 사랑했던 '아프니까 청춘이다’ 류의 사회적 위로도 지금은 긍정성 못지 않게 조롱 당하는 신세로 추락했다. 즉, 내가 사회를 접하기 시작한 10대후반부터 목격한 15년간의 한국사회는 순서대로 5년씩의 긍정착취의 시대-힐링의 시대-긍정혐오의 시대 순으로 전개된 것 같다. 그렇다, 지금 현재 한국사회는 긍정성을 혐오한다. 분노가 우울을 넘어선 것 같다. 자, 그런데 혐오와 분노는 부정성이다. 헬조선이라는 탁월한 명명은 현대사회의 긍정성을 애써 무시하며 과거시대의 부정성을 소환하기에 손색이 없다. 한병철 교수가 전망한 피로사회의 궤도는 적어도 현재 한국에서는 틀린 것일까? (포용과 평등, 이민자를 거부하고 차별/추방/장벽을 상징하는 트럼프를 선출한 앵그리 아메리카는?)

사진_픽셀


<부정성이 그리운 긍정사회>


이 책의 대전제는 현대사회가 '모든 것이 가능한 사회'라는 것이다. 하지만 부정성이 다시 유행하며 이 대전제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빠르게 늘고 있다. 양극화, 저성장, 고부채, 고액과외, 입시비리, 취업청탁, 국정농단 등등의 부정적 요소 때문에 사회가 병들고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일정부분 타당하고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그 원인제공자로 지목된 주체(정부, 부유층, 이민자, 외세 등등 다양할 수 있다)는 타자화되어 면역학적 거부반응의 공격대상이 되는 분위기다. 오랜만에 열병 같다. 이런 분위기에 병균 같은 면역학적 타자가 나쁜 놈이지 개인은 무고하다. 하지만 부정성/긍정성의 관찰기간을 최근 10년이 아닌, 100년, 1000년으로 잡아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개인주의가 자리잡기 전인 수백년전 (한국의 경우 수십년전) 규율사회에는 더 심각한 양극화, 저성장, 세습, 부패가 있었다. 신분사회였으므로 태어날 때 부여된 운명 외에 가능한 게 없었다. 즉, 현재 체감되는 부정성은 과거의 것과 비교하면 0으로 수렴한다. 반면에 직업, 교육, 소비, 정치, 연애의 자유 등 긍정성은 현존한다. 아무도 서울대 입학을 막지 않고 스타나 부자가 되는 것을 막지 않는다. 고액과외는 커녕, 대학을 가지 않아도 인터넷만 있으면 공부를 하고 스타나 부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이다. 싫겠지만 과잉긍정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의식적으로 부정하더라도, 혹은 부정하고 싶더라도 ‘Yes, you can, ’ 내 삶의 주권자는 여전히 나 자신이다. 이 반갑기까지한 열병의 시기 동안 타자를 욕하며 잠시 주의를 돌릴 순 있겠지만 오래지않아 다시 긍정성의 자기폭력/착취가 본격화될지도 모르겠다. 아주 조심스러운 생각이지만, 지금의 헬조선의 분노는 과잉긍정성의 폭력에 의한 우울의 또 다른 형태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박지웅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neuroplastic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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