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박지웅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1979년 퓰리처 수상작 <인간 본성에 대하여>_사이언스북스


저는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나'라는 배를 가지고 미지로 떠나는 여정. 각자 갖고 있는 배도 다르고 목적지도 다르니 그 여정은, 그러니까 우리 각자의 인생은 얼마나 다채롭고 가치로울까요? 그 항해에, 그 인생에 우리는 자신만의 가사와 멜로디를 입히며 노래해왔습니다.

그런데 거기다 대고 ‘그 배랑 항해, 사실 DNA를 전달하려는 목적뿐이야’라고 내뱉는다면 낭만 없는 이과 말종 취급을 받을 것입니다. 이 책이 일으킨 뜨거운 논란과 날 선 비판은 바로 이런 비인간적인 느낌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닭은 달걀이 더 많은 달걀을 생산하기 위해 잠시 만들어 낸 매개체에 불과하다.(p10)"

하지만 이 책은 인생이라는 항해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에 '나'라는 배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나아가 내 배를 잘 조종해야 가장 좋은 항해를 할 수 있다는 매우 현실적인 도움을 제공하려는 목적에 더 가깝습니다. 저자 에드워드 윌슨은 과학적 지식과 통찰을 통해 "우리가 생물학적 ‘특성’에 바탕을 둔 자동 제어로부터, 생물학적 ‘지식’에 바탕을 둔 정교한 조종으로 이행해야 한다(p30)”고 그리 강조했지만 이미 빈정 상한 이들이 그 메시지를 포착하기는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어쩌면 그 또한 인간 본성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의 표현대로 우리의 선조들은 사실 DNA 전달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위해 진화된 자동 제어 인생을 살아왔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세대에 이르러 드디어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오해와 달리 과학 혁명은 인문학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에게 새로운 통찰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그 누구도 몰랐던 배의 구조와 원리는 점차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침내 우리는 그 누구도 도달할 수 없었던 정교한 조종을 통해 우리의 인생 항로를 제대로 개척할 행운을 얻게 된 것일까요? 그렇다면, 현시대의 인류는 단순히 DNA만 전달하는 종(種)의 매개체를 벗어나 진정한 인생이란 것을 사는 최초의 생물 개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조들의 희생과 현시대에 태어난 행운에 무한한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마치 개미 도감처럼 이 책은 인간 개인과 군집을 관찰하고 분석하였습니다. 개미가 ‘자유의지’로 산다고 스스로 생각하더라도 실제로는 무의식적으로 여왕개미, 병정개미, 일개미처럼 '자동 제어’된 삶을 사는 것처럼 인간 개체 및 군집의 자동 제어 프로그래밍으로서의 학습, 문화, 공격성, 성, 이타주의, 종교 등이 분석되었습니다. 모두 논란을 일으킬만하겠죠? 특히 현시대에 더욱 유행하는 분열과 제노포비아의 인간 본성에 관한 내용은 더욱 재미있는데요, 갈등과 배척의 행동들이 타고난 인간 본성에 기인한다는 깨달음은 우리가 현사회에서 방향키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숙지해야 할 우리란 배의 주요한 특징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언급을 아래에 열거해보았습니다.
 


“모든 인간들이 구성원 대 비구성원, 친족 대 비친족, 동료 대 적으로 표시될 수 있을 때에만 완벽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 같다.(p98)"

“문명은 자기애를 고급문화의 지위로 끌어올리고, 자기 자신을 신성하다고 격상시키고, 허구로 기술된 정교한 역사를 통해 남을 격하시켜 왔다.(p123)”

“오늘 가장 평화를 애호하는 부족은 어제의 파괴자였기 일쑤이고, 미래에 다시 군대를 조직하고 살인자들을 배출할 것이다.(p130)”

“원시인들은 세계를 두 가지 가시적인 영역으로 즉, 집(중략…)과 적(중략…)으로 나눈다. 이 초보적인 지형학은 공격하고 살해할 수 있는 적과 그럴 수 없는 동료로 더 쉽게 구분하게 해 준다. 이런 대비는 적을 끔찍한 존재로, 나아가 인간 이하의 존재로 격하시킴으로써 더 선명해진다.(p142)”

“우리는 사람들을 동료와 이방인으로 구분하는 성향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방인들의 행동에 매우 두려움을 느끼고 공격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려는 성향이 있다.(p151)"
 

사진_혹성탈출:종의전쟁


적이 존재함으로써 역설적인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저자의 통찰은 현세태의 갈등과 대결 국면에 대한 색다른 시각을 가지게 해 줍니다. 어쩌면 적이 있어야 하고, 만약 적이 없다면 무고한 대상이라도 적으로 규정해야 하는 본능이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내적 갈등을 처리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기똥찬 묘약인가요? 복잡하고 미성숙한 우리의 내적 세계는 대결 상대를 만나며 놀라울 정도로 단결되고 응집되며 뜨겁게 작동합니다. 그 촉매 작용을 통해 공격성의 에너지를 내뿜으면 우리는 살아있음을, 튼튼한 자기감을 느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채호 선생의 말처럼 아(我)는 투쟁할 피아(彼我)가 반드시 필요했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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