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눈을 뜨면 한숨이 나온다. 하루의 시작이 무겁다. 씻어야 하는데 이불 밖을 나서기조차 싫다. 출근할 생각을 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한숨이 나온다. 언제부터 이렇게 표정이 어두웠었는지, 세수를 하다 문득 바라본 거울 속의 모습이 퍽 늙었다. 지하철에서도 일 걱정, 사람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잘하고 있는 걸까. 며칠 전 질책받았던 생각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또다시 실수하면 어쩌지. 그러고 보니 동료들의 시선도 신경 쓰인다. 앞에선 웃는데 뒤로는 욕을 할 것만 같다.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만 아프다. 문득 생각이 든다. 이 회사, 계속 다닐 수 있을 까, 나중엔 뭐 먹고살까. 나는, 괜찮을까.

 

갑자기 자기 자신이 무능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긴 시간 살아온 세상이지만, 유독 가혹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름의 열정으로 그려오던 미래가 흐려지는 느낌이다. 삶을 쫓아 바쁘게 살다 보니 의식하지 못했는데, 어느새인가 자기 자신, 자신이 속한 세상,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온도가 싸늘해져 있었음을 발견한다. 이것저것 떠나서 그냥 마음이 지치고 불편하다. 한숨이 늘고 어깨가 처진다.

우리는 모두 같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을 인식하고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제각각이다. 마음에는 창문이 있다. 유리 색이 붉다면 세상은 붉은빛으로 보일 것이고, 푸르다면 푸르게 보일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보는 세상이 타인이 보는 세상과 같을 것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암묵적으로 그럴 것이라 생각하고 살아갈 뿐이다. 하지만, 사실 세상은 저마다의 시선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각자의 마음속에 그려진다. 자기 나름대로의 상으로 마음속에 세상을 그리는 것을 '인지', 마음속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틀의 형태를 '인지 구조'라 한다.
 

사진_픽사베이


인지와 인지 구조는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이다. 쉬운 예로, 어릴 적 바라보던 세상의 질감은 지금 느끼는 것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살아가며 경험한 것들, 느낀 점들, 생각, 감정들이 얽혀 인지의 틀을 만든다. 또 형성된 인지 구조는 다시,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에 영향을 준다. 감동적인 일, 기쁜 경험들만으로 삶을 채운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아름답기 그지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만은 없는 것이 삶이기에, 가슴 아픈 일을 경험하며 삶을 보는 시각이 슬픈 빛으로 채색되기도 한다. 달리 말하면 슬픔의 방향으로 인지 구조가 뒤틀리는데, 이를 '인지 왜곡'이라 한다.

힘들고 지친 마음을 경험한 적이 있는지. 있다면 그때의 생각과 느낌을 떠올려 보자. 어두운 안경을 쓴 것처럼 삶의 색이 바래 보인다. 기분도 산뜻하지 못하고 눅눅해진다. 자기 자신도 못나 보여 거울을 보기조차 싫다. 조금 더 좋은 날이 올 거야, 꾸역꾸역 버티다가도 문득 생각이 든다. 어제처럼 오늘이 지났고, 오늘 같은 불편한 내일이 반복될 뿐인데, 아름다운 미래가 올까? 희망을 기대하는 것마저 지친다.

 

우울증 환자의 인지를 들여다보면, 예시와 같이 세 가지 방향의 왜곡이 종종 관찰된다. 즉, 자기 자신, 세상,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경향의 인지 변화가 일어난다.

조금 더 풀어써보자. 반복된 실패에 자신의 능력, 소질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다. 행복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떠오른다.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두렵고 자신이 없어진다. 결과를 내지 못하면 도태될 것 같다. 직장은 호시탐탐 서로의 자리를 노리는 제로섬 게임의 장소 같다. 인간관계도 목적을 위한 것만 같다. 자격, 취업, 소득... 사회의 요구치는 만족시키기엔 높아만 보인다. 때로는 한 사람으로서 존중받는 것조차 요원해 보인다. 삶의 기쁨과 충만함은 점점 사라진다. 평범한 하루는 쫓아가고 버텨내는 것이 된다. 미래가 기대되기보다는 두렵다 보니, 차라리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한다.

심한 인지의 왜곡을 극복하는 것은 쉽지 않다. 부정적으로 편향된 인식으로 인해, 대인관계나 업무 같은 일상에서 힘든 일을 경험하기 쉽기 때문이다.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대화를 이어가는 연인 관계는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다. 추가적으로 경험하는 절망적인 경험들은 인지를 더욱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간혹 찾아드는 멋진 일들도, 스스로의 부정적인 인식관들에 반하기 때문에 단순한 우연의 결과로 치부된다. '나는 무능력한 사람인데, 이렇게 좋은 결과는 이번에 운이 좋았기 때문이야.'라는 식이다. 주위에서 건네는 따뜻한 말들도, 왜곡된 인지 구조를 거치면 지적질, 훈수로 인식되어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면담할 때 항상 강조했다. 왜곡된 인지를 다루는 것은, '억지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와는 다르다는 것을.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하기 힘든 일들도 분명히 삶에서 일어난다. 좌절이 아예 없다면야 가장 좋겠지만 삶은 동화가 아니다. 진심으로 절망한 이에게 '당신이 힘든 이유는 전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곡된 시각을 고치시면 됩니다.'라고 하는 것이 마음에 와 닿을 리 없다. 그래서 이야기하곤 했다. '억지로 좋게 생각하려 하시지 마세요. 대신 억지로 나쁘게 생각하려고도 하시진 마세요.'
 

사진_픽사베이


삶은 희극도 비극도 아니다. 삶은 그저 삶이다. 때로 기쁘고, 슬프고, 때로 절망하고, 행복하다. 그리고 특별한 감흥이 없는 일상들이 그 사이사이를 채운다.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좌절과 절망으로 인해 소소한 삶의 다른 조각들조차 어두운 빛깔로 함께 덮여 버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지친 그날에도 구름은 아름다웠고, 노을은 아련했고, 반가운 누군가는 나를 떠올렸을 것이다. 다만 마음이 무너지면, 그런 작은 고마움들을 오롯이 느끼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기 쉽다. 마치 슬픔만 더 잘 보이는 렌즈를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아픔과, 그 아픔을 상기시킬 만한 일들만 또렷이 잘 보인다. 마음의 안식을 가져다 줄 조그만 행복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힘들수록 잘 보이지 않는다.

마치 어느 날 갑자기, 원래 그랬던 것처럼 자기 자신이 못나 보이고, 세상이 두려우며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하지만 찬찬히 돌이켜 보면 (아주 어린 시절도 좋다) 따뜻한 마음과 희망, 열정이 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마음에 세상을 보는 틀이 있구나, 힘들다 보면 그 틀이 슬프게 뒤틀릴 수도 있겠구나, 삶이 꼭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지만, 굳이 어둡게 바라봤을 수도 있겠구나,라고 한 번만 떠올려 보자. 어쩌면 진정한 삶의 본질일지도 모르는, 작지만 소중한 일상들이 발견되지 않은 채 흘러가고 있을 수 있다. 마음속에 세상을 바라보고, 또 때로는 왜곡하는 틀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

그리고 모든 것에 앞서, 그렇게 힘들었음에도 지금까지 묵묵히, 이를 악물기도 하며 버텨온 자신을 안아주자. 때론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절망도 넘어 다시 일어선 자신을 보듬어 주자. 힘들거나 기쁜 것과는 무관하게 당신은, 언제나 괜찮았고, 지금도 괜찮으며, 앞으로도 괜찮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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