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친한 친구와 술자리에서 넋두리를 나누다 보면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한다.

'야 그건 누가 봐도 네 탓이 아닌데 왜 그렇게 힘들어하냐?'
'아니야, 그래도 그때 좀 더 잘했어야 하는 데...'

실연, 탈락, 중단 같은 주로 부정적인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면 더욱 그렇다.

 

바쁜 아침, 출근을 서두르다 차키를 집에 두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깜빡 실수했다 정도로 넘어갈 수도 있는데 '나는 유독 잔실수가 잦아', '내가 그렇지 뭐' '꼼꼼하지 못하고 일을 망쳐'라며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스스로의 결점을 탓한다. 이 정도의 실수를 살면서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주 드물게 매우 꼼꼼한 사람이거나, 그렇지 않다면 대부분 솔직하지 않거나 기억력이 좋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로 스스로를 과도하게 비난한다.

타인에게 유독 엄격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자신을 유독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 정도가 지나쳐 문득 깜짝 놀라거나, 그런 경향이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 고치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종의 나쁜 습관처럼, 스스로를 비난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어 애를 먹는 경우가 많다.

'자존심'이 타인의 관심과 인정을 통해 스스로를 확인하는 것이라면, '자존감'은 자기 존재 그 자체로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당신이 존중받아야 하는 이유는, 존중받을 만한 어떤 이유를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자신의 못난 모습들을 비난하다 보면 어떤 의문이 생긴다.

'나는 존중받을 만한 사람인가?'
나아가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가?'

역설적으로 자기 비난의 고리는 여기서부터 기인한다.

 

마음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다. 망각했다고 생각한 삶의 여러 사건과 그에 따른 감정들이, 의식보다 훨씬 더 깊은 마음의 바닥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어릴 적부터 우리는 본능적으로 사랑과 유대가 생존에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부모, 선생님, 친구, 연인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때로 어떤 일을 완벽하게 해 내거나, 예기치 않은 좋은 성과를 냈을 때를 돌아보자. 직관적으로 큰 기쁨을 느끼고, 주위로부터의 찬사와 인정 등이 보상으로 주어진다. 혹 그 시점에서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낀 적은 없는지. 그 실체는 '존중받고 싶다', '사랑받고 싶다'는 원초적 욕구가 충족되는 느낌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실패하거나 실수로 일을 그르쳤을 때는 어떠한가. 한 점의 티끌도 없는 완벽한 일의 수행은 애초에 매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완벽하지 못한 부분으로 인해 파급될 영향을 두려워한다. 실제로 평판, 경력, 관계에 여러 불이익이 주어지기도 한다. '실패, 실수'가 '약점'으로 연결되어 약한 모습이 드러나면 '존중받지 못한다.' '사랑받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발생한다.
 

사진_픽사베이


그리고 반복 학습된다.

'완벽하지 못하면 도태된다.'
'1등만 살아남는다.'
'약점을 보이는 순간 끝이다.'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캐치프레이즈들의 기저에는 결국 '부족하면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이다.'라는 마음이 있다.

흔들리지 않고 자라나는 나무는 없다. 매번 처음 마음만 같이 성공할 수는 없다. 실패에 꺾여 돌아가다 보니 어느새 어느 위치에 도달해 있는 것도 삶이다. 생각대로 나아가 진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감사한 일이다. 때로 좌절하여 차선 혹은 차악을 선택하며 꾸준히 걸어가는 것도 멋진 일이다. 이런 생각은 자기 위안에 불과한 것일까? 모든 일을 완벽히 성공할 수 없는 것처럼, 실상 완벽하게 충족되고 만족스러운 상태 역시 환상에 불과하다. 오늘의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는 어제의 과업을 훌륭히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나의 부족한 부분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일 수 있다.

 

루이제 레더만의 명저 '마음의 감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자신을 비난하는 것과 무언가를 바꾸고자 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비난은 변화가 아닌 슬픔과 괴로움이다.'

결국 스스로를 비난하는 것은, 내면의 약점이 외부로 드러나면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어쩌면 선한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타인에게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스스로가 먼저 내면의 두려움을 비난하고 배척하는 것이다. 사랑받고자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는 딜레마다.

누군가와 앙금이 쌓였을 땐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다. 이해할 수 없었던 일에 그 나름의 속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마음이 풀리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아껴주기도 모자란데 왜 이렇게 스스로를 비난하고 억압할까? 왜 스스로를 인정해주지 못하는 것일까?'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고 속상했다면 마음을 터놓고 자신의 내면과 대화를 나눠 보자. 어쩌면 깊은 마음속 상처를 확인할 수도 있고, 남몰래 흘렸던 눈물이 고여 있음을 알게 될 수도 있다. 다른 누구도 알아줄 수 없거나, 알더라도 보듬어 주기 힘든 나만의 비밀들을, 스스로는 다독여 줄 수 있다.

스스로를 비난하는 나 자신, 자아 그 자체를 먼저 보듬어 주자. 결국 '너도 나 스스로를 보호하고 싶었구나, 사랑받고 싶었구나, 많이 두려웠구나'라고. 마치 토라진 연인을 다독이듯 나를 비난하는 나 자신을 안아주자. 때로 세상은 당신을 비난할 것이다. 아껴주지 않을 수 있다.
그래도 당신과 당신 자신, 나와 나 자신,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 주자. 스스로의 마음은 다른 누구보다도 소중한 삶의 동반자다.

 

자기 비난을 멈추기가 힘들다면, 지금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이를 한 명 떠올려 보자. (가족, 친구, 연인, 자식, 집에 있는 강아지, 누구든 상관없다) 그리고 떠올린 그가, 방금 내가 스스로를 비난하듯 똑같이 자기 자신을 비난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당신은 옆에 앉아 그를 위로하며 어떤 말을 건넬 것인가? 떠올렸다면, 그 말을 스스로에게 그대로 해 주자.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