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그만 좀 내려놓자."
"내려놓고 마음 좀 비워."

일상적으로 쓰는 말들이다. 포기하자는 말 같기도 하고, 욕심을 버리자는 의미로도 들린다. 공통되는 뉘앙스는 '간절히 원했던 무언가가 있으나 이를 얻는 데 실패했으니 원하는 마음을 돌리자' 쯤이 되겠다. 당연히 잘 되지 않는다. 간절했던 것에는 간절했던 이유가 있는 법이다.

지금부터 '북극곰' 생각을 하지 말아 보세요. 이 문장을 보는 찰나에 북극곰이 얼마나 많이 생각이 나는가.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다. 이불을 차게 만드는 부끄러운 기억들일수록 자꾸 떠오른다. 더 이상 보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그 이가 자꾸 눈에 밟힌다. 아픈 기억은 그 고통의 정도에 비례하여 선명히 기억된다. 우리에 넣으려 목줄을 잡아끌면 끌수록 뒷걸음질 치는 돼지처럼, 마음은 내려놓으려 하면 할수록 어지러워지게 마련이다.

돼지를 우리에 넣으려면 앞에서 끌지 않고 뒤에서 당기면 된다고들 한다. 억지로 앞으로 끌 땐 뒷걸음질 치던 녀석이 역으로 뒤로 당기자 제풀에 반대로 우리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을 평온의 우리로 넣기 위해서, 억지로 끌지 않고 뒤에서 살살 당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흔히 쓰는 '내려놓는다'는 말속에는 앞서 언급한 대로 금지, 억압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억누를수록 끓어 넘치는 것이 마음이다. 그것이 원초적인 욕망과 관련된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찌개를 끓이다 국물이 넘쳐흐를 때 이를 막는답시고 뚜껑을 힘껏 누르면 어떻게 될까. 부글부글 끓어오르다 못해 터져버릴 것이다. 올바른 대처는 뚜껑을 열어 증기가 알아서 날아가 버릴 동안 지켜보는 것이다.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실연을 예로 들어 보자. 오늘 헤어졌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연인의 관계는 영원한 지속 혹은 결혼이라는 결실보다는 이별로 종료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리고 이는 여러 사람들이 경험하는 일상적인 일이다. 처음 만난 사랑과 운명처럼 여생을 함께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운명처럼 이란 미사여구가 붙는다. 사랑도, 영원의 약속도, 이별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실연한 이들은 때로 세상이 끝난 것 같은 느낌을 경험하거나, 다시는 사랑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겠다는 심한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루 종일 슬픔에 빠져 밥조차 넘기기 힘들 수도 있다.

 

사진_픽셀


이런 이들에게 주위에서 보통 하는 말이 '내려놓아라'가 되겠다. 그 의미를 풀어쓰면 '그만하면 충분히 잘 했다, 사람 마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들 겪는 과정이다, 떠난 사람 생각은 그만 해라, 취미를 가져라, 일에 몰두해라,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것이다... ' 정도가 될 것이다. 실제로 시간이 지나면 좋아진다. 하지만 그것이 이런 조언들 덕분은 아님은 조언을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 안다. 따뜻한 말을 건네는 그 자체로 전해지는 온기는 중요하다. 다만 진짜 내려놓는 것이 무엇인지는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끓어오르는 찌개 뚜껑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활짝 열어주는 마음가짐은 무엇일까? 그것은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이어 가보자. 이별을 한 후 여러 가지 판단이 시작된다. 우리의 관계는 무엇이었는지, 최선을 다했었는지,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였는지, 실수한 것은 없었는지... 완벽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임에도 완벽하지 못했던 티끌들을 복기하고 괴로워한다. 상대방에 대해 판단하고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바보같이 놓쳤다며 슬퍼한다. 서로에게 몰입하는 데 방해가 되었던 세상의 장애물들에 대해 판단하고 비난한다. 이러한 판단 내지 평가들은 일견 매우 객관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실은 절망의 감정에 매몰되어 부정적으로 편향된 경우가 많다.

좋다. 판단하지 않기로 하자. 그러면 앞서의 일상적인 예들과 마찬가지로, 판단하지 않기로 할수록 그러한 생각들이 더욱 계속 떠오르지 않을까? 이를테면 그에게 잘 해 주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을 때, 힘든 생각들이 더욱 떠오르게 마련이 아닌가 말이다.

맞다. 그래서 '판단하지 않는 것'의 형태를 조금 더 세밀히 되새겨야 한다. 이는 떠오르는 생각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떠오르는 생각을 붙잡지 않는 것, 흘러가게 두는 것,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게 못해 줬던 것을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가 아니라, '못해 줬던 것들이 생각이 나네'라고 흘려버리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각의 주체가 나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슬프고 힘들어 죽겠는데 그게 무슨 대수냐고? 생각과 감정의 주체를 찾아와야 한다. 내가 느끼는 기분, 떠오르는 생각은 하늘에서 밀려오듯 덮쳐 드는 것이 아니다. 나의 마음속에서 피어난 것이며, 내 것이다. 그것에 빠져들 권리도, 그것을 거리를 두고 바라 볼 권리도 온전히 내게 있다. 이를 인식해야 한다.

다시는 사랑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나는구나', 그를 그리워하는 '생각이 떠오르는구나', 소중한 사람이 떠나갔으니 슬픈 마음이 '느껴지는구나', 하며 생각이나 감정이, 열린 마음의 뚜껑을 넘어 마치 날아가는 수증기처럼 증발하길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해'라고 생각하는 시점에는 이미 판단이 들어 있다. '이런 생각은 내게 부정적인 거야, 나를 좋지 않은 상태로 이끌 거야, 그만두지 않으면 계속 슬픔에 빠질 거야'라고 말이다.

모든 생각과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만 그런 생각이나 감정을 붙잡고 '나쁜' 것으로 판단하여 스스로를 한 번 더 괴롭힐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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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직을 당한다고 해서 삶이 끝나진 않는다. 누군가에게 밉보였다고 해서 내일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삶은, 스테이지를 클리어하지 못하면 중단되는 게임이 아니다. 생의 항로는 길기에 단 하나의 우여곡절도 없을 가능성은 확률적으로 너무나도 낮다. 좌절을 느낄 때마다 부정적인 감정을 덧칠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힘든 일 자체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 때문에 힘들 것이다.

오늘의 고난이 미래에 어떤 멋진 순간의 밑거름이 될지는 지금 알 수 없다. 심지어 결국 지금의 고통은 그저 고통일 뿐이었음을 시간이 지나 알게 되더라도, 이를 돌아보는 미래의 나는 예측할 수 없는 전혀 다른 행복에 젖어 있을지도 모른다. 조금만 판단을 미루자. 안타깝지만 이런 일도 삶에서 일어났구나, 힘든 마음이 드는구나, 슬프구나 하고. 이는 굳이 좋은 쪽으로 억지로 생각하는 것과도 다르다. 그저 흘려보내는 것이다. '나는 나약한 사람이야, 부족한 사람이야,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큰 잘못을 저질렀어' 같은 부정적인 판단들은, 충분히 시간이 지난 다음, 적어도 객관적으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을 만큼은 회복된 후 다시 고민해도 늦지 않다.

그래서 레지던트 시절 은사님께서는 이런 표현을 쓰셨다.

"마음챙김은 결국 판단을 미루는 것이다."

힘든 일을 겪으며 은연중에 스스로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을 반복하진 않는지, 혹은 불편한 감정이나 생각이 마음을 휘젓도록 허락하는 중은 아닌 지 돌아보는 것은 마음에 대한 예의이다. 개개인은 스스로의 마음의 주인이다. 소유는 누릴 권리와 함께 가꾸고 돌볼 의무를 수반한다. 때론 자신의 마음을 지켜주고 돌봐주자. 굳이 불편한 생각을 막을 필요는 없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구나,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완벽하지 않다는 것은 죄악이 아니다. 원래 인간이란 그런 것이다. 삶에서 곡절을 경험하는 것은 부족하고 모자라서가 아니다. 원래 삶이란 그런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은 무엇인가가 잘못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원래 사람의 마음이란 그런 것이다.

원래 인간이란 원래 그런 삶을 살며 원래 그런 마음을 느끼는 것이다. 내겐, 이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비우기, 내려놓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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