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첫 만남부터 느낌이 이상했다. 객관적인 기준에서 외모나 여러 조건 같은 건 대단하다곤 볼 수 없을 것 같은데, 너무 매력적이다. 그가 좋아하는 것이 나도 좋다. 점점 이야기에 빠져든다. 몇 시간을 이야기했는지 모르겠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인데, 오랜 친구 같기도 하고 예전에 만난 사람 같기도 하다. 카페의 공기가 달라지는 것 같고, 주위 풍경이 한층 선명해지는 것 같다. 마음속에선 이미 연애가 시작되었다.

짧은 만남 속에서 특별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가. 분명 이야기를 나눈 적도, 마주친 적도 전혀 없는데 마치 예전부터 알고 지내며 서로를 나눈 사이인 것 같다니 이상하다. 심지어 첫눈에 반했다거나 비로소 운명을 만났다는 생각까지 들기도 하는데, 왜 그런 걸까?
 

사진_픽셀


어떤 느낌이나 생각에는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영역과 그렇지 못한 영역이 있다. 전의식(집중과 노력으로 의식화가 가능한), 무의식(집중과 노력으로도 파악하기 힘든) 등 후자의 영역은 의식의 영역보다 더욱 광범위하고 깊다. 보통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을 모두 파악하고 통제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이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알아차리기 힘든 숨겨진 마음들은 끊임없이 우리의 감정,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마음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형성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삶 그 자체이다. 의식화되는 기억의 영역에서 망각된 여러 사건들과 그때의 느낌들은, 여러 이유로 마음 저 아래에 침잠해 있을 뿐, 휘발하여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전에 중요했던 사람(부모, 선생님, 형제, 연인 등)과의 관계 양상이 진료실의 환자-의사 관계에서 재현되는 것을 전이라 한다. 단호한 주치의와 면담하며 엄했던 아버지가 떠오르는 것이 그 예이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새로 만남을 시작한 연인과 처음으로 다투다, 불현듯 헤어진 옛 애인이 비슷하게 화내던 때가 떠오르거나, 직장 상사에게 털리던 중 갑자기 어린 시절 별 것 아닌 일로 혼내던 어떤 선생님이 생각났다면 이는 일상 속 전이의 예라 할 수 있겠다. 절대 잊지 않는 것만큼 힘든 것이 누군가를 완전히 잊는 것이다. 가슴에 큰 감동 혹은 상처를 남긴 이라면 더욱 그렇다.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만난 순간부터 그와의 관계가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곧잘 생각한다. 하지만 이미 기억하기도 힘들 어린 시절부터 그 관계는 만들어지고 있었다. 천천히, 차곡차곡. 이전 관계에서의 경험은 지금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누구와도 백지상태로 관계를 시작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는 때로 성급함을 부르기도 한다. 상대방을 충분히 알아가기 전에 마음이 가는대로, (다른 사람과) 경험했던대로, 나름의 주관대로 그를 판단해 버리는 성급함, 쉬운 말로 콩깍지다.

만난 지 오래되지 않아 운명 같은 사랑의 불꽃을 발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리 끌리지 않던 남녀가 서로를 천천히 알아가며 젖어가듯 연인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전자는 순수하고 낭만적인 것으로, 후자는 지루하고 식상한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으로, 마음을 공부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뒤에는 이에 대해 다소 시각이 바뀌었다. 전자는 아름다우나 조금 위태해 보이고, 후자는 잔잔하지만 평온해 보인다.

실제로, 열정적으로 서로를 탐닉하다 금세 시들어버리는 관계를 주위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이를 전이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어떨까. 사람들은 타인을 볼 때 있는 그대로의 그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마음속에 그린 그 사람의 상을 본다. 내가 보는 그의 모습은 그의 본질적인 실체라기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몇몇 모습을 바탕으로 그려낸 내 나름의 이미지이다. 누군가에게 허겁지겁 빠져든다는 것은, 새로이 만난 이의 매력적인 몇몇 파편들 바탕으로, 나머지 그의 모습을 내가 바라는대로 채워 그리기 때문이 아닐까.
 

사진_픽사베이


누구나 바라는 이상적인 짝의 모습이 있다. 한 사람의 존재는 매우 복잡하고 다면적이다. 오래 두고 본 사람에게 비로소 끌린다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바라본 그의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까지도 감내할 만큼 그와 함께 하고 싶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서로가 서로를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차오르는 강렬한 연정은, 어쩌면 상대의 조그만 사랑스러운 모습을 토대로 쌓아 올린 내 나름의 피그말리온일지도 모른다. 그런 것이라면, 관계가 깊어질수록 나는 하나 하나씩 맞닥뜨려야 할 것이다. 나의 이상향과는 다른, 실제 그 이의 진짜 모습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물 밀 듯 밀려오는 사랑의 감정은 시간이 쌓일 때까지 우선적으로 인내하고 억눌러야만 할 것인가? 그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 자체로 이미 그 사람은 당신의 삶에서 몇 번 만나지 못할 정말 소중한 인연이다. 다만 속단하지 않도록, 나의 기준으로 그를 판단하거나, 나의 기준에 그를 구속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에게 실망하는 많은 부분이 어쩌면 그의 문제가 아닌, 나의 환상에 기인하였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그는 관계가 깊어지며 유달리 이상해진 것이 아니다. 다만 그는 나의 마음속에 그리고 있던, 세상에 다시없을 환상적인 누군가는 아니었을 뿐이다.

서로의 환상이 무너지고, 서로가 그렇게 특별할 것이 없는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남은 것은 큰 실망과 이별뿐일까? 만난 지 3년쯤 지나서도 서로를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별을 따주려 하는 경우는 잘 보지 못하긴 했다. 하지만 매일 티격태격하며 함께 맛있는 것을 먹고 삶을 위로하고, 나아가서는 같은 집으로 돌아가고 아이를 낳아 기르곤 하는 많은 이들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모든 관계는 다음의 관계와 연관되기에 이별을 하게 되었다면, 아름다운 끝을 맺는 것 또한 중요하다. 깨어진 유리조각 같은 이별의 파편들이 언젠가는 찾아 올 여생의 동반자를 찌르지 않도록 말이다. 후에 사랑하는 이가 유리를 밟아 다치는 것보단, 지금 내 손이 조금 베더라도 미리 갈무리하는 것이 덜 마음 아프지 않을까. 서로가 영원히 함께할 것이란 꿈을 저버린 그를 마음껏 원망하되, 꿈을 꾸게 해준 그에게 또 마음껏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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