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신재현 강남 푸른 정신과 원장]

 

사연) 

안녕하세요. 아들의 결혼 이후 생기는 문제들 때문에 고민이 많아 질문을 드립니다. 귀엽고 애교 많은 막내아들이 장성하여 올해 초에 장가를 갔습니다. 사실, 모든 시어머니 마음이 다 비슷하겠지요. 늦둥이로 자라 사랑을 많이 받고, 또 그만큼 반듯하고 착하게 자라면서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기쁨이 되었던 참 소중한 아들이었습니다. 예비 며느리라고 데려온 아이가 그리 탐탁지 않게 여겨질 수밖에요. 저도 모르게 그런 막내아들에게 기대가 참 컸나 봅니다. 그러니 며느리에게 저도 모르게 눈치를 주게 되더군요. 안 그래야지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오랫동안 봐온 아들의 모습과 겹쳐 저도 모르게 볼멘소리가 나옵니다.

아들의 태도가 바뀐 것도 좀 섭섭했습니다. 주변에서는 저에게 ‘아들은 장가가면 없는 셈 쳐라’ ‘아들은 원래 며느리에게 빼앗기기 마련이다’고 조언을 했지만, 내심 내 아들은 안 그럴 거라 생각했었나 봅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오던 안부전화가 점차 잦아들기 시작하니, 어찌나 서운하던지요. 서운한 감정이 며느리와의 관계를 더욱 나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끔 집에 찾아오는 며느리의 모습이 그리 편하지 않습니다. 가르쳐줬던 것을 자꾸 실수할 때면 일부러 그러는 건지 화도 나고, 속상하기도 하고요. 이래저래 복잡한 심경입니다. 잘 하려는 듯하다가도 엇박자가 나는 통에, 불편할 때가 많아요.

어떻게 하면, 아들과 며느리를 현명하게 대할 수 있을까요?
 

사진_픽셀

 

답변)

안녕하세요, 쉽게 이야기하기 힘든 고민을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마 질문자님께서 고민하시는 내용은 세상의 모든 시어머니라면 한 번쯤은 겪었던 갈등일 것 같아요. 이제는 ‘시월드’라는 단어가 많은 사람에게 익숙할 정도로 고부 갈등은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죠.

고부간의 갈등에 관한 해결책을 이야기하기 전에, 원론적인 부분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왜 이런 갈등이 나타나는 걸까요?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뭘까요? 우리 사회는 유교 문화의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가 발달을 거듭하며 외형적으로는 서구화, 현대화되고 있지만, 그 내면의 유교적 영향은 여전합니다. 사회 계층 간의 존중과 예의를 강조하는 장점 이면에 오랜 세월 동안 쌓인 부작용도 만만치 않지요.

<사도>라는 영화를 기억하시나요?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가 그릇된 길을 가려 하자, 뒤주에 가두어 목숨을 잃을 때까지 내버려 둡니다. 자식은 부모가 가르치고 훈육해야 할 대상이며, 그릇된 길로 가면 아이를 혼낼 수 있는 일종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는 가족 공동체의 주인이며, 자식들은 당연히 복종해야 하지요. 어떻게 보면, 자녀가 부모의 소유물에 가까워 보이기도 합니다. 자녀 또한 부모의 기대에 부응해 입신양명하고, 부모를 평생 봉양해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됩니다. 상명하복이 철저하면서 끈끈한 가족 관계는 농경 위주의 사회에서는 이점이 될 수 있었겠지만, 이 가까운 관계는 결국 서로를 구속합니다.

결국, 이런 부작용들은 현대사회에서 더욱 두드러지죠. 직업적 성취나 결혼 등이 지역 공동체 안에서 모두 해결되었던 과거와는 달리, 대학 진학과 취직, 결혼 등에는 필연적으로 가족의 분리가 뒤따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녀는 내가 책임지고 이끌어가야 하며 자식에게 부모의 ‘지분’이 어느 정도 있다는 인식은 변하지 않으니, 이 지점에서 갈등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죠.

 

아들은 나의 것일까요?

시월드를 지키고 계시는 많은 어머니께서 스스로 곰곰이 생각해보셔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아들은 정말 부모님의 것인가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녀의 성장을 옆에서 지켜보며 아이 인생의 절반을 함께 해온 부모님이라면, 아이의 변절 아닌 변절에 마음이 상하시겠지요. 하지만 아이는 어느 누구의 소유가 아니며, 결혼도 ‘소유권 이전’이 아닙니다.

아이는 결국 성장하고, 언젠가는 떠나갑니다. 발달심리학자인 에릭슨은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할 단계부터 부모로부터의 독립이 시작된다고 하지요. 이는 자연의 섭리에 가깝습니다. 결국 우리 부모님께서 정말로 해야 할 것은 아이의 건강한 독립을 독려하는 일입니다. 연락이 뜸해진 아들이나 며느리에 대한 원망 이전에 스스로 사랑하는 아이를 마음에서 독립시키지 못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아니, 어쩌면 부모가 아이로부터 졸업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아들을 향한 사랑에 대해 과도한 기대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시다. 기대의 좌절은 분노를 부릅니다. 아이에게 평소 느끼지 못했던 불편한 감정이 생겨나면, 애꿎은 화살은 새 식구를 향하기 마련이죠. 이것이 고부갈등의 시작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착각에 기반한 기대는 모래성처럼 쉽게 허물어집니다. 자신이 부모에게 받은 사랑이 그랬듯이, 우리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은 헌신입니다. 밑 빠진 독에 끊임없이 물을 길어 넣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아이의 건강한 성장 자체가 삶의 큰 기쁨이 아니던가요. 그 이상의 기대는 욕심일 뿐이겠죠.

아마 자신은 아이에 대한 소유욕이나 기대는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지만, 글쎄요. 아마 의식의 수면 밑에 가라앉아 있어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할 뿐입니다. 아이에게 사랑을 주었던 부모라면 당연히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정입니다. ‘설마 나한테?’ 하는 생각으로 부정하고 피하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잘 살펴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고무공 두 개를 너무 가까이 붙여 놓으면, 본래의 모습을 잃고 찌그러듭니다. 우리의 관계도 이런 모습이 아닐까요? 자녀에 대한 소유를 내려놓고, 조금씩 거리를 두는 것이 본래의 건강한 모습을 회복하는 길일지도 모릅니다. 맞아들일 새 식구와의 관계를 위해서도 그러하겠죠.
 

사진_픽셀

 

부모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기

비슷한 맥락에서, 아이의 결혼을 환영하지 못하는 데는 자신의 문제가 있지 않을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아이의 결혼이, 영영 자녀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한 것은 아닌가요? 점차 줄어드는 아이의 연락에 관계가 단절된 듯한 아픔을 느끼고 있지는 않나요? 비이성적이고 과도한 감정은 왜곡된 시각에 기인하며, 꽤 뿌리가 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성장 과정에서의 경험, 나를 키운 부모의 양육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 봐야 합니다. 대상을 막론하고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면, 이는 자신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래야만 자신이 행동의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대로 둔다면 애꿎은 피해자만 늘어나게 됩니다.

 

새 식구는 불편한 손님 대하듯

시어머니는 시어머니가 처음이고, 며느리 또한 며느리 역할이 처음입니다. 맞지 않는 옷을 입듯 생경한 느낌이 들죠. 더군다나 며느리로서 시어머니는 대하기 어려운 어른입니다. 그런 어른이 자신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는 것을 알게 되면, 두려움과 자괴감은 배로 커집니다. 초보 시어머니가 자신도 모르게 며느리에게 볼멘소리를 하는 것이 고민이시라면, 며느리 또한 시어머니에게 보이는 모습이 진심은 아닐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속엔 초조, 당황, 혼란이 있을 겁니다. 낯선 환경에 불안이 버무려지면, 인간은 당황하고, 어색한 행동을 하게 되니까요. 지켜보는 사람의 기다림과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생각합시다. 며느리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조금 불편한 손님’ 이라고요. 불편한 손님이 현관의 벨을 누르고 있다면 어떻게 대하는 것이 현명할까요? 마음에 들지 않으니 썩 나가라고 소리 지르거나, 나와 맞지 않는 부분을 일일이 지적하고 바꾸도록 노력해야 할까요? 그런 행동은 자신을 옭아매고, 괴롭게 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을 기울인들, 상대방이 태도를 바꾸기란 기적에 가깝죠.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일단 맞아들이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것입니다. 피하려는 노력, 상대를 바꾸려는 의도 모두 결국 자신에게 불편함을 남길뿐이니까요. 내가 편해야 상대도 편해집니다. 그래야만 관계에서 진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새 식구는 서먹하지만 만나면 좋은 사람, 서먹하지만 서로 도움은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 정도로 포지셔닝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것 같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라는 책을 인용하면, 새 식구를 외국인 대하듯 하라고 하죠. 길을 묻는 외국인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며느리는 우리 집이라는 문화에 첫발을 들인 이방인일 뿐입니다. 그러니 가르치고 안내해야 할 존재인 거죠. 우리 문화와 맞지 않는다고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녀도 30년 가까이 완벽히 다른 문화에서 살다 온걸요. 하루아침에 다른 문화를 흡수하기를 바라는 것은 폭력에 가깝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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