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신재현 강남 푸른 정신과 원장]

 

Q)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애지중지 키워온 외동딸이 얼마 전 너무 예쁜 손녀를 낳았습니다. 아기는 너무나 사랑스럽지만, 아기를 돌보는 딸아이는 막상 육아라는 큰 벽을 만나니 힘들기만 한 모양입니다. 저도 얼마 전 퇴직을 한 상태라 자주 아이를 돌봐주러 가는데, 은근히 딸아이가 육아를 도와달라는 눈치를 주는 것 같아서 많이 부담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 입장에서는 반나절만 아기를 봐 주어도 하루종일 지치고, 아이를 신경 쓰다 보니 생활리듬이 깨어져 심지어 밤에 잠도 오지 않는 등 불면증에 시달리는 경우도 다반사거든요. 주위에서는 ‘자기 자식은 스스로 키우는 거다’라며 선을 그으라고 이야기하지만, 육아를 도와줄 수 없다고 할 때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아이의 힘없는 목소리가 내내 마음이 걸립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일까요?

 

A) 사랑스러운 딸의 아이가 얼마나 눈에 밟히실까요. 여력만 된다면 얼마든지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얼마 전 불면증으로 진료실을 찾은 한 여성분의 힘겨워 보이는 표정이 생각납니다. 손자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며느리의 육아를 함께 돕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힘이 들어 거의 소진되다시피 한 상태(Burn-out)로 방문한 것입니다. 자신의 자녀와 수십 년의 간격을 두고 손녀를 다시 돌보려 하니, 자녀를 키웠던 경험은 온데간데없고, 나이가 들면서 노쇠한 체력은 금새 바닥이 나니 마음과 신체의 여유가 하나도 없더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도 아들과 며느리가 도움을 ‘당연시’ 하는 데 대한 부담감과 불편감도 만만치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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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녀가 독립하지 못하는 사회

문제는, 이런 케이스가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장성한 자녀가 부모의 도움을 여전히 받고 있고, 또 이를 당연시하고 의존하려는 경향이 심해졌습니다. 부모 또한 이전 세대와는 달리 노후에도 자녀들에 대한 책임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짊어져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기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할아버지의 재력’도 필수 요소 중의 하나라는 말이 우스개로 들리지만은 않는 씁쓸한 현실입니다. 과거에는 대가족이 흔한 가족의 형태였고, 많은 아이에 대한 풍족한 뒷바라지가 여의치 않아 결국 아이들이 성장하며 스스로 자립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말 그대로 살 길을 찾아 ‘각자도생’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급감한 출산율과 더불어 자녀의 수는 감소하고 가족의 구성이 단촐해졌지만 , 자녀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오히려 반비례하여 크게 늘어난 모습을 보입니다.

 

인간의 성장과 독립에 대해 서양의 정신의학에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진행된 바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자인 에릭슨(Eric H.Erikson)은 아이가 성장하고 발달하는 단계를 구분했는데, 아이의 자율성과 독립은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하는 단계인 1세경부터 이미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아이는 걸음을 떼면서 자신의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배워나갑니다. 부모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기만 하기보다는, 자신이 직접 손으로 음식을 먹으려 고집을 피우기도 하지요. ‘내 것’을 구분하고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나갑니다. 부모와 융합되었던 상태에서 점차 벗어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시기에 이러한 자율성과 독립에 대한 욕구가 좌절되거나 가로막힌다면 아이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회의와 수치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모험과 용기가 필요한 독립보다는 안전한 ‘의존(dependency)’을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의존은 안전하지만 아이의 성장을 정체시켜 성인기까지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로막힌 독립은 의존성을 증폭시키고, 이를 당연시하는 사회의 풍토는 이런 문제가 더욱 커지게 부채질합니다. 그리고, 아이가 독립하지 못하면 부모 또한 독립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네 사회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아이의 독립을 독려하기보다는, 부모가 감당할 수만 있다면 전적으로 아이를 지원하려 합니다. 질 좋은 교육과 대학 진학을 삶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는 분위기에서는 부모의 열정과 지원이 절대적이며, 아이 또한 점차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기 보다는 부모와 사회가 만들어놓은 시스템에 순응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의존성이 점점 커지는 만큼, 부모에 대한 요구도 늘어납니다. 부모도 의식하지 못한다면 점차 아이의 의존성에 익숙해져 갑니다. 청소년기에도, 성인기에도 아이는 부모에게, 부모는 아이에게 얽매이게 됩니다. 결코 건강한 모습은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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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멈추어 자신을 되돌아보기

아이의 독립(independency)에 대한 가치관이 아직은 확립되지 않은 사회 분위기와 더불어, 개인의 요소 또한 한몫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사회의 분위기로 인한 독립의 어려움을 이야기했지만, 개인적인 이유 또한 실로 다양합니다. 

아이를 자신의 표상이라 여기고 남들에게 보여지는 아이의 모습에 노심초사하진 않았을까요? 풍부하게 지원받지 못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신도 모르게 아이에게 필요 이상의 것을 주지는 않았을까요? 아이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웠던 것에, 완벽주의적인 예스맨인 자신의 성격이 작용했던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아이를 독립시킨다는 것이 부모의 불안감을 조장했을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이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못했던 자신의 행동 기저에 흐르고 있는 ‘진짜 마음’, 즉 무의식적인 부분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의외로, 내가 선택하는 많은 것들에 이러한 무의식이 녹아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을 되돌아볼 수만 있다면, 변화는 그 지점에서부터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충분히 표현하고, 또 감내하자

시간이 흘러 아이의 의존성이 저절로 사라지고, 부모에게서 독립하기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영원히 풀리지 않을 매듭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매듭이 너무 복잡하다 해서 짐짓 포기하기보다, 매듭이 얽혀있는 시작점을 조금씩 되짚어본다면 의외로 복잡한 매듭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원인을 어느 정도 탐색하고 방향을 잡았다면, 이제 실행할 단계입니다. 극단적이고 충동적인 방법을 선택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준비되지 않은 선택은 또 다른 갈등을 낳을 뿐이니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기’입니다. 싫으면 싫다, 곤란하면 곤란하다는 표현을 하라는 말입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부모가 자녀의 부탁에 거절하는 모습이 익숙지가 않은 것이 사실이지요. 부모는 언제나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이라는 왜곡된 이미지 때문입니다. 하지만,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고집을 부리거나, 자신을 둘러싼 시스템을 단박에 깨트리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작은 일들부터 의사표시를 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표현하고 이야기하지 못한 속내는 결국 몸과 마음의 병을 만들기도 하지요. 억누른 감정들은 언젠가는 사소한 일로 터져 나오기 마련이며, 그 때 타오르는 감정들은 걷잡을 수 없습니다. 작은 다툼과 생채기들을 통해서, 의사표시를 돕는 ‘마음의 근육’도 함께 단단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자녀의 성장기에 가족이 이미 겪었어야 할 과정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편하게 먹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의사 표시를 분명히 했다면, 그 다음은 ‘불편함을 감내하는’ 단계입니다. 자녀가 즉각적으로 반발해서라기보다, 실은 부모의 죄책감이 더욱 클 것입니다. 아이를 부모로부터 떼어내고 독립시키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불편하고, 미안하고, 씁쓸한 감정이 뒤엉켜 복잡한 심경이 될 것입니다. 자녀의 완강한 저항이나 거부에 부딪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과정이 바로 자녀를 더욱 성장시킬 수 있다는 것이지요. 자녀의 의존심에 부응하는 것은 짧게 보면 ‘모두가 평화로운 상태’를 만드는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부모와 자녀 양측이 서로에게 얽매이게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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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를 절벽에서 떨어트리는 어미 사자의 마음으로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에도 어느 정도의 균형감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일방적으로 한쪽이 희생하는 관계는 쉽게 금이 가기 마련이니까요. ‘부모니까’라는 생각에 자녀에게 헌신한다면, 관계의 무게추는 한쪽으로 더 기울어질 뿐입니다. 자녀의 요구 혹은 자녀에 대한 희생이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면, 현 상황과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충분히 마음을 표현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새끼가 죽을지도 모르지만, 절벽에서 떠미는 어미 사자의 마음이 이와 같을까요? 어쩔 수 없는 불편함을 감내하며 감정을 나타내고, 공감을 주고받는 과정은 결과적으로 자녀와 부모의 자연스러운 독립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부모님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자녀로부터 기쁘게 졸업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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